제목 : 독생자를 보내신 이유 The reason God sent us his only Son

본문 : 요일 4:9 ~ 11

일시 : 2009년 12월 20일 성탄주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강절 네번째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예수 그리스도)을 보내시는 이유는 3가지입니다.

첫째,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꽃을 꺽으면 당분간은 살아있지만 곧 시들어버립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신데,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는 인생은 당장은 살아있지만 곧 죽게 됩니다.
“아들(예수 그리스도)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2-13) 예수님은 우리 각 자에게 물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이민와서 아무리 성공하고 출세했어도 생명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불행합니다. 아무리 명문대학에 합격하고, 인물이 출중하고, 인기가 많아도, 죽어가는 환자는 행복하지 못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생명을 보장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보내시는 두번째 이유는 하나님과 나 사이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나의 죄’입니다. 내가 짓는 죄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고, 체험하지 못합니다. 내가 짓는 죄는 나를 고통과 불안의 어두운 곳에서 갇혀 살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죄사함의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용서받은 사람은 어디를 가도 자유하고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주신 세번째 이유는 우리도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4:32) 마음에 미움의 감정을 품은 사람은 기도하지 못합니다. 기도가 막히는 데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가운데 가장 심각하고 안타까운 문제는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몰라도 너무 몰라~.’ 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발생하는 문제가 불안과 분노입니다. 현대인의 정신적 특성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세가지 불안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문제, 죄에 대한 문제, 허무에 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라고 하시고,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오십니다. 우리는 ‘주님, 우리 마음에 임하소서. 우리를 고쳐주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대학에서도 가르쳐주지 않고, 신문에서도 취급하지 않지만, 주님을 영접하면 주님께서 해결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1. 죽음에 대한 불안

누구든 죽음에 대한 불안감이 있습니다. “죽어야지 이렇게 오래 살아서 무엇하나?”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분도 막상 병에 들어 임종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 불안해합니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죽습니다. 죽을 때는 혼자 죽습니다. 집단적으로 죽는다 해도, 죽음은 개인적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죽음은 다른 사람이 개입할 수 없는 나만의 사건입니다. 나의 죽음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절대 비밀입니다. 그 누구도 나의 죽음의 시간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우리 불안을 하나님이 가장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이 바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이 평소에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부모없이 오빠만 믿고 살던 마르다와 마리아는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빨리 오시라고 전갈을 보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에게 더 큰 선물을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저 병에 걸렸다가 낫는 은혜가 아니라, 아예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려주시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주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11:14-15)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1:41-42)

이번 성탄이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요? 예수님이 나에게 오셔서 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맞이해야 할 죽음을 두려움과 공포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 가운데 영생을 확신하며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소망을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4:9)

2. 죄에 대한 불안

인간의 내면에는 죄로 인한 고민이 있습니다. 소설을 보십시오. 영화나 연속극, 드라마를 보십시오. 죄가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고통을 일으키는 것을 봅니다. 운동선수에게도 죄 문제가 있습니다. 정치인에게도 죄 문제가 있습니다. 교육자에게도 죄 문제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도 죄가 있습니다. 노인에게도 죄 문제가 있습니다. 죄 문제는 종교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을 망가뜨립니다. 죄는 내 안에서 하나님의 이미지를 파괴시켜버립니다.

신문의 사회면을 보면 시대가 바뀌어도 죄를 짓는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왜 경찰서가 있지요? 왜 전쟁이 일어납니까? 왜 부부가 싸움을 합니까? 왜 육법전서가 있습니까? 왜 재판을 합니까? 왜 총을 사용합니까? 그 이유는 다 죄 때문입니다. 인간이 왜 죽습니까? 그 이유도 죄 때문입니다. 타이거 우즈가 왜 이혼 당합니까? 죄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인생에서 고통을 당합니까? 죄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죽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진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 다 죄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없는 사람이 하는 짓은 영적으로 보면 다 죄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조그만 친절을 베풀고서,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해주었지~.’ 속으로 그 사람을 정신적인 노예로 삼습니다. ‘너는 나에게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해~. 나에게 신세 진 놈이 그럴 수 있느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일생 동안 고자세를 취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선을 행해도 절망에 빠집니다. 선 속에도 악이 있습니다. 겸양을 떨지만 그 안에 교만이 웃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 지은 사람의 마음에는 평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동생을 죽인 형, 가인의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까? 인간은 아무리 악해도 죄 짓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영적으로든지, 양심으로든지, 법적으로든지, 하나님의 눌림을 받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종일 끊임없이 신음으로 내 몸은 탈진하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밤낮 손으로 나를 짓누르셨기에, 나의 혀가 여름에 풀 마르듯 말라 버렸습니다.”(시편32:3-4. 표준새번역)

이번 성탄절에 주님이 우리 마음에 오시면 무엇을 하실까요? 우리의 모든 죄를 말끔히 씻어주십니다. 주님이 내 마음에 임하시면, 우리는 죄를 뱃어내고 싶어집니다. 더 이상 쓰레기봉투같은 죄를 끌어안고 잘 필요가 없습니다. “드디어 나는 내 죄를 아뢰며, 내 잘못을 덮어두지 않고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주님께 내 허물을 고백합니다 하였더니, 주께서는 나의 죄를 기꺼이 용서하셨습니다.”(시편32:5. 표준새번역)

하나님은 이번 성탄절에 예수님을 우리 각자에게 보내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3. 허무에 대한 불안


어느 작가가 쓴 글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모여 각각 “나는 무엇을 가지고 싶은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은 여러가지 것을 갖고 싶었습니다. 되고 싶은 것 또한 많았습니다. 학자도 되고 싶고, 예술가도 되고 싶고, 대통령도 되고 싶어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들도 많았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내 가슴 속에 뜨거운 마음과 나를 미치게 할 만큼 큰 비전이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청년은 외부적인 소원이나 되고 싶은 어떤 것을 말한 게 아니라, 마음속의 감격을 원했습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허무한 마음입니다.

사람은 의미를 묻습니다. 고통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의미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동물은 고기만을 찾지만, 사람은 의미를 찾습니다. 내 영혼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살다가 갑자기 죽으면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만약 그 의미를 찾지 못하면 허무주의자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훼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을 썼습니다. 노인이 바다에서 고기 한마리를 잡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합니다. 그러면서 무엇 때무에 이 고기를 잡아야 하며, 이 고기가 자신과는 무슨 원수관계인지, 나는 왜 이렇게 해야만 하는지 가만히 생각을 합니다. 고기는 이 노인이 원수같겠지만, 사실 노인은 그 물고기에 대하여 그저 호감을 가진 것 뿐입니다. 노인은 힘도 없습니다. 고기를 잡아도 노인이 먹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노인은 고기가 걸렸으니까 그 고기를 잡습니다. 굉장히 큰 고기였습니다. 그것을 끌고 뭍으로 나올 때 상어떼들이 와서 다 뜯어먹고 노인은 지쳐 쓰러지고 맙니다. 결과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을 모르면, 아무리 부지런히 살고 열심히 일해도 이와 같이 결과는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시지프스의 신화도, 까뮈의 이방인이라는 소설도 이런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번 성탄절에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임하셔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민 와서 열심히 돈을 번다고 한들, 만약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허무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되실 때, 우리에게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평안>을 주십니다. 불안감에서 해방되고 평안한 마음이 넘쳐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예수님을 내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면, 주님은 나를 향한 <사랑>을 체험하게 해주십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주님이 나를 만드셨으며, 주님은 나를 위한 영원한 계획을 세워놓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완전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던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완전한 사랑을 받으면서 경험하는 그 황홀한 행복감은 세상 그 무엇과 비교하겠습니까?

주님이 나에게 오시면 내 삶이 <의미>를 찾게 되고, <생명력>이 넘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10:10)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을 확신하게 되고, 그 영생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줍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또한 주님께 받는 사랑의 기쁨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해줍니다. 내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