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교회(담임 최모세 목사)가 2010년을 맞이하며 신년 축복성회를 개최한다. 오는 1월 1일(금) 부터 3일(주일)까지 이어질 신년 축복성회는 본국 강남 중앙침례교회와 양수리 수양관을 개척한 김충기 목사가 강사로 나선다.


성회 시간과 주제

1월 1일 금요일 저녁 7시
에배소서 4:22-24 “회복하자”

1월 2일 토요일 오전 10시
신명기 28:1-6 “축복의 복음”

1월 2일 토요일 저녁 7시
로마서 13:11-14 “시대를 알자”

1월 3일 주일 오전 11시
시편 133:1-3 “우리는 형제다 연합하자”

1월 3일 주일 저녁 7시
마태복음 24:3 “때를 알고 살길을 찾자”

김충기 목사 소개
<-출처 김충기 목사와 한국교회 부흥운동->


42년 동안 오직 하나님 중심, 오직 성서 중심, 오직 성령 중심, 오직 하나님의 은혜 중심으로 한국 부흥운동을 이끌어 온 순수한 부흥사, 순수한 목회자인 김충기 목사는 1932년 6월 19일 충남부여에서 5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김사인 씨는 선대로부터 강한 유교적 전통을 물려받은 분이었으나 기독교인인 김경자 여사를 아내로 맞았다. 김경자 여사는 권사 직분을 받은 강인한 신앙의 소유자로서 불신 남편의 모진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인의 순종과 사랑의 모범을 보였다. 때로는 물리적 핍박이 극심하여 머리를 잘리우는 수난도 당하였으나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교회에 출석하였으니 그러한 풀뿌리 신앙이 김충기 목사의 유년기 신앙적인 토대를 형성해 주었다. 어거스틴에게 기도의 어머니 모니카가 있고, 황금의 입이라 불리우는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스에게 신앙의 어머니 안투사가 있듯이, 김충기 목사에게는 어머니 김경자 권사의 신실한 신앙의 밑받침이 있었음을 결코 간과 할 수 없다.

김충기 목사가 어린 시절부터 출석한 동아 기독대는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이르러 극심한 박해에 시달렸다. 1935년에는 펜윅 선교사가 72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같은 해에 일제는 한국 민족에게 신사참배와 황궁요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동아기독대는 '달편지'를 통해서 신사참배에 절대 참여치 말 것을 시달했다. 이로 인해서 1935년에 5명의 동아기독교 지도자들이 원산에서 옥고에 시달려야 했다. 1940년에 이르러 일제는 교단의 명칭을 동아기독대에서 동아기독교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동아기독대라는 명칭은 펜윅 선교사가 1933년에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양무리라는 의미로 사용한 교단 명칭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동아기독대라는 명칭이 군대 명칭 같아서 전황군대에 저항감을 준다는 이유로 명칭 개정을 요구한 것이었다. 1940년부터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조직적으로 교회 탄압을 시작하였다. 1941년에는 제 1차 원산 사건이 일어났는데 원산의 일본 헌병대가 원산의 동아기독교를 수색하여 침례교 신약전서 6500권과 복음 찬미 500부를 소각하고 교단의 중요서류를 압수한 것이었다. 1942년의 제2차 원산 사건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동아기독교의 지도자들을 32명이나 구속한 사건이었다. 총회장 이종근 감목부터 시작해서 32인의 지도자들이 순차적으로 압송되어 원산 헌병대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고문과 구타 속에서도 모두 신앙의 정절을 지켰으며 일부는 옥에서 순교하였다. 결국 1944년 5월 10일 일개 지역 법원에 지나지 않는 함흥 형무소는 동아 기독교의 교단 해체 명령을 내렸다. 교회 건물을 폐쇄 당하였고, 교회의 재산은 몰수당하는 대 암흑기를 맞이했으나 1945년 해방으로 인해 암흑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김충기 목사는 가정적인 어려움에 국가적인 식민치하의 고통과 아울러 교단적인 암흑의 시기에 태어나 성장하며 어떤 환란과 고통에도 불굴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의 강인성과 순수성을 키워나갔다. 해방의 기쁨도 잠깐이요 1950년부터 발발한 동족상잔의 비극은 청년 김충기로 하여금 수 십 차례 사선을 넘어야 하는 전쟁터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군인이 되게 하였다. 그 와중에 전상을 입고 야전 병원에 옮겨져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회복되며 자신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기를 서원하고 퇴원 후 신학 수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고전 15:10)는 바울의 고백을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삼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것도 이 때부터 이다.

스물 네 살의 나이로 1955년에 첫 목회를 시작한 곳은 충남 서천군에 있는 망월 침례교회였다. 학문과 현실과의 괴리를 느끼고 갈등과 좌절의 쓰디쓴 체험을 시작한 곳도 이 곳이었다.

목회의 벽이 높다는 것은 3년 후인 1958년에 충남 부여군 세도면의 반조원 침례교회로 목회지를 옮긴 이후에도 똑같이 체험할 수밖에 없었다. 박인애 사모를 만나 신혼 살림을 시작한 곳도 반조원 침례교회였다. 그러나 처음 부임시 80명이었던 교인은 불과 2년 만에 9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목회 현장의 궁핍함은 박인애 사모의 표현으로 "먹은 것은 없었고 굶기를 밥먹듯이 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처절한 실패의 현장에 하늘 보좌로부터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성령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성령의 바람은 1960년에 부산 영주동 감리교회 목사이었던 정영문 목사와 세도면에서 장로교회 목회를 하던 정덕진 목사를 중심으로 계룡산 양정고개 기도원에서 침수례를 강조하며, 지정의의 인격성과 성령의 체험을 아울러 강조하는 기도 모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본래 성령 운동을 싫어하던 정영문 목사는 용문산 꼭대기 바위에서 성령의 엄청난 능력을 체험하면서 수많은 부흥사를 배출하는 능력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1960년 8월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 여름에 계룡산 최고봉인 금잔디밭에서 전국 목회자 집회가 열리게 되었다. 목회 실패로 방황하던 김충기 목사도 한 평신도의 권고로 계룡산 정상 금잔디밭으로 향하게 되었다. 계룡면에 버스를 내려 2시간 반 동안 나뭇가지를 헤치고 올라가 계룡산 정상의 금잔디밭 집회에 참석하였다. 한 주일간의 집회에 참석하여 큰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김충기 목사는 다음 해 5월까지 무려 9 개월 동안 끈질긴 기도생활을 계속하여 드디어 1961년 6월 첫 주부터 50일간의 부흥성회가 계속되었다. 사모조차도 김목사를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김목사의 기도는 전심을 다한 것이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한 이후 영적 계시가 동반된 주일 낮 설교는 두시간 이상 지속되었다. 30분의 설교에도 졸던 신자들이 두 시간의 설교도 지루한 줄 모르고 집중하였다. 철야 기도회를 10일 이상 지속하니 교인들은 숟가락 들고 식사하다가도 졸고, 불 때다가도 졸게 되었다. 일상사에 조는 교인들을 본 김목사는 교인들에게 잠을 재웠는데 잠자는 가운데 교인들에게 방언이 임하고 성령의 진동이 임하여 깨우는 사람이 없어도 새벽 네시반 되면 모두 일어나 새벽기도에 임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김목사가 아내와 자녀들을 모두 미치광이로 만든다고 하여 온 동네가 징을 치며 반대하고 김목사를 동네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떠들어대며 주일 예배 드리는 예배당에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오순절 기간을 본받은 50일동안의 부흥회에 마귀의 역사도 대단하여 기도 중에 쓰러져 마귀의 형상을 드러내는 사람이 생기면 김목사 부부는 밤새 기도하여 치유하였다. 자기 부인이 집회에 참석했던 한 남편은 문구멍으로 예배당 안을 드려다 보니, 설교하는 김목사의 손과 입에서 불이 나오고, 강단에는 자욱한 안개와 이슬비가 내리는 모습이 보여 김목사를 마술사로 알고 도망했다는 간증도 있다. 성령의 은혜가 없을 때는 김 목사의 살림이 매우 핍절했으나, 은혜가 임하니 생활 문제도 저절로 해결되었다.

성령의 큰 능력이 역사하기 시작하니 교단 신학교로부터 신학적인 핍박도 시작되었다. 당시 선교사로서 교장을 지냈던 도월태 선교사는 반조원교회에 와서 토레이 신부의 성령론 책을 차에 싣고 와서 교인들에게 풀어놓고는 이 책의 사상과 다른 김충기 목사의 사상은 이단이라고 공격하였다. 신학교의 학생과장이던 조효훈 목사도 김충기 목사를 이단시 하였다. 그러나 대전 보문산 겟세마네 기도원에서 집회할 때에 많은 신학생들이 참여하여 은혜를 받으니 학생과장으로서 불건전한 기도원을 정탐한다는 의도로 조효훈 목사가 김목사의 낮 집회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그 집회에서 은혜 받고 집회 후에 김목사의 안수기도를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이후로는 우호적인 동역자가 되었다. 조목사가 서울 침례교회나 산호세 침례교회를 담임할 때도 계속해서 부흥 강사로 김목사를 초빙하는 관계가 되었다.

김충기 목사는 계룡산 산정 금잔디밭 짐회에서 은혜 받은 후 은혜받은 종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세계 기도 동지회"의 총무로 봉사하였다. 세계 기도 동지회는 이뢰자라고 불리우던 이유성 목사가 말세 비밀의 계시를 주장하며 가담함으로 인해서 내부적인 갈등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와해되기 전까지 수많은 한국 강단의 부흥사를 배출하는 산실이 되었다. 침례교단의 오관석 목사, 고승혁 목사, 안중모 목사등이 모두 그 영향으로 능력 받아 교회 부흥의 큰 일군들이 되었고, 성결교단, 감리교단의 부흥사들 가운데도 그 영향을 받은 사람은 대단히 많았다. 비록 세계 기도 동지회는 와해되었어도 1960년대에 계룡산에서 능력 받은 부흥사들은 각 교단의 개교회로 흩어지면서 1970년대의 숫자적 부흥의 기수들이 되었다.

반조원침례교회의 부흥소문은 전국 각처에 퍼지게 되었고 그 이후로 부흥사로 초청 받으며 능력의 역사를 교단을 막론한 전국 교회에서 일으키게 되었다. 매주 한번 내지 두 번의 부흥회를 인도하며 전국과 전 세계를 두루 섭렵했으니 그 숫자적인 기록은 일일이 기록할 수 없는 것이며 웨슬리나 휫필드의 활동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1962년에 초청 받아 부임하게 된 함열침례교회는 교회의 주동이었던 한 안수집사가 담임목사를 구타하여 추방함으로써 분쟁이 심했던 교회였다. 김 목사를 담임목사로 초빙하자 어려운 교회를 일으켜 세우라는 부르심으로 알고 응하였다. 반조원교회의 교인들은 눈물로 반대하였으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백마강에서 배를 타고 함열교회에 부임하자 첫 설교로서 "이 교회는 밑 떨어진 가마솥과 같으니 쇠망치로 부수어서 용광로에 넣어 새 솥을 만들려 한다고" 담대히 선포하였다. 주동 안수 집사는 온 가족들이 교회의 중요직분을 맡고 있었으므로 권세가 대단했는데 김목사의 부임설교를 건방지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김목사가 안수집사의 신앙을 검토해 보니 약정 헌금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목회자의 활동에 일일이 반대하기 일쑤였다. 안수집사를 심방한 김목사는 대화를 시작하였다:

"집사님, 이 교회의 주동이 누굽니까?"

"나요"

"주동이 뭐 하는 것입니까?"

"주동이 주동이요"

"주동되는 안수 집사님부터 신앙생활 바로 해야 교회가 부흥되지 않습니까?"

"내가 뭘 잘못 했습니까?"

"지난 5년 동안 약정한 헌금들 하나도 내지 않았지 않습니까?"

"목사는 고생을 해야지요?"

"그러면 목사는 찬물 마시고도 된 변을 보아야 합니까?"

"아니 둘째 아들만도 못한 젊은 목사가 까불고 있네."

이렇게 말한 안수 집사는 일어나서 김목사를 주먹으로 치려고 하였다. 꽈배기 다리를 하고 당당히 앉은 김목사는 "전임 목사님도 이렇게 때려 내 쫓았습니까? 예수님도 33세에 십자가를 지셨는데 셋째아들보다 어린 예수님을 어째서 믿습니까? 당신이 나를 치면 하나님이 당신 손을 그냥 두실 줄 아십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김목사는 담대히 주동 안수집사의 죄악을 책망하자 그 후 그 집사는 교인을 규합하여 김목사 추방 운동을 전개하였다. 김목사와 사모는 철야하며 기도함으로써 이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다. 그 후 약사인 아들조차 치료할 수 없는 중병이 들게된 안수집사를 김목사의 안수기도로 치료하게 되었고, 참된 주동 집사로 변모하게 되었다. 교회는 큰 부흥을 이루었고, 땅 590평을 매입하여 건물을 신축하게 되었다.

김 목사는 매주 한번 이상의 부흥회 인도를 위해 출타하면서도 금요일에는 함열교회의 철야예배를 인도하였고 밤새 설교하며 안수하였다. 함열교회의 철야 예배는 방언 은사와 능력 역사가 예배시 마다 물불 듯 부어졌다.

1967년에 이르러 대구 중앙침례교회의 부르심을 따라 함열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대구 중앙교회도 시험이 들어 교인은 4분5열 되었고, 담임목사도 억울하게 쫓겨나게 된 상황이었다. 주일에는 불과 10여명이 참석하는 예배에도 다툼이 극심하여 동대구 경찰서의 경찰이 파송된 상황이었다. 함열교회 교인들이 이삿짐 트럭 앞에 누워버리는 반대 속에서도 기어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한 김목사는 중앙교회 부임 즉시 전임 목사를 몰아낸 세 사람의 집사를 교회에서 퇴출시켰다. 박인애 사모는 365일내내 교회 안에서 기도를 지속하시며 영적인 내조에도 혼신을 다하였다.

당시 대구는 장로교의 예루살렘이었다. 감리교가 아무리 훌륭한 예배당을 건축해도 백 명을 넘길 수 없었고, 성결교는 70명 수준에 머물렀으며, 순복음교회는 이단시되었고 침례교는 이단중의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이렇듯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김목사 내외는 날마다 철야기도 하며 목회에 전념하였다. 기도하는 대로 응답의 역사가 일어나 예배당도 건축하고 사택도 건축하며 전도의 열매도 커서 대구 직조 공장의 여직원들이 모조리 교회에 출석하였다. 박인애 사모는 공단의 여공들을 끌어안고 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고, 주일이면 일곱 번씩이나 밥을 해서 먹이는 수고를 아끼지 아니했다. 이로 인하여 취임 시 10명에 불과하던 교인들이 700명으로 부흥되는 열매가 나타났다. 당시 장로교에서 가장 유명했던 이상근 목사의 교회가 800명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대구 중앙교회의 부흥은 대구 동부 지역 장로교인들에게 비상사태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은 장로교회 목사들이 김목사가 대구를 떠나려하자 도리어 만류하였다는 사실이다. 대구의 큰 장로교회에서 집회초청을 받은 김목사가 엄청난 은혜의 역사를 일으키자 장로교회들이 강력한 영적인 도전을 받게 된 것이 그 이유였다. 김목사는 대구 지역의 유일한 부흥사요 장로교회에도 선한 영향을 크게 미치고 있으니 떠나지 말아 달라는 당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년의 대구 중앙교회의 목회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오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김목사는 고령 지역에서 교회묘지를 매입하고 동촌에 있는 비행장에 새로운 침례교회를 개척하고자 했고, 월배 지역에도 침례교회의 개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교인들은 교회버스도 사고, 교회를 더 확장한 연후에 지교회를 개척하자고 김목사의 계획에 반대하였다. 김목사는 이러한 반대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대구를 떠나 서울에서의 새로운 사명을 위해 출발하게 되었다.

1975년 12월 오직 성령과 말씀을 무기 삼아 서울로 올라온 김목사 가족은 1976년 2월 1일 역사적인 강남중앙침례교회의 창립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칠판 설교를 통해서 설교의 주요 내용들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면서 말씀 중심의 목회를 하였고 성령의 생수와 기적의 역사가 예배마다 나타나면서 교회는 사도행전적인 부흥을 이루었다. 개척한지 2년 9개월 만인 1978년 11월 19일에 1120평의 대공사를 마치고 강남중앙침례교회의 성전 입당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런 대 역사는 영국 스펄전 목사의 부흥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며 교회 역사 속에서도 드물게 볼 수 있는 빠른 교회 성장의 역사였다.

교회 개척과 동시에 김충기 목사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음껏 부르짖고 은혜 받을 수 있는 한국 교회를 대표할 만한 기도원을 세우는 것이었다. 개척 이듬해인 1977년부터 김목사는 서울 주변과 경기도 일대에 기도원으로 적합한 부지를 찾아다녔고, 심지어 강원도나 강화도라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는 열성을 보였다. 그 와중에 대법관을 지낸 한 성도가 은혜 받고 판교 지역의 2만 5천 평되는 되는 땅을 기도원 부지로 교회에 헌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김목사 마음에 있는 땅은 양수리에 있는 20만 평의 광대한 땅이었다. 그 대법관을 지낸 성도는 자신의 헌납을 교회가 받아주지 않자 섭섭한 마음으로 교회를 떠났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목사의 마음은 20만 평의 양수리 땅이 사로잡고 말았다. 그 땅은 이미 불신자 네 명이 위락 시설 건설을 위하여 다섯 번에 걸쳐서 매입을 시도하고 있던 땅이었다. 네 사람은 20만 평 가운데 5만 평만 사겠다고 제안하였고, 그로 인하여 흥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목사는 손에 쥔 현금도 없는 상태에서 20만 평 전체를 다 사겠다고 제안했고 거래를 성사시켰다. 대지 구입 자금은 한 부자 성도에게 2년 내에 상환하겠다는 조건으로 1억 원을 빌렸다. 당시 대학 등록금이 20만원에 못 미치는 상황이었으므로 1억 원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급속도로 부흥하여 1억 원의 부채를 불과 1년 만에 다 청산하고 말았다. 1982년 8월 28일 양수리 수양관 기공 예배를 기점으로 하여 2000명을 수용하는 벧엘 성전, 식당과 숙소를 갖춘 에녹관, 대식당과 숙소, 세미나실을 갖춘 두란노관, 객실을 갖춘 바울관, 1513평의 4층 건물 예루살렘 성전, 축구장, 테니스장 등이 계속해서 건축되면서 명실공히 목회자, 사모, 신학생, 평신도들이 영적 훈련을 할 수 있는 최고, 최대의 장이 되었다.

효율적인 교회 교육의 필요를 느낀 김충기 목사는 1983년 9월에 교육관 건축 기공 예배를 드리고 1984년 12월에 1315평 규모의 교육관 입당 예배를 드렸다. 이로써 강남중앙침례교회는 예배당, 교육관, 수양관의 3박자를 고루 갖춘 대형교회로 성장하게 되었고, 그 성장 속도는 가히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김충기 목사의 부흥 사역은 국내, 국외를 막론하고 매년 40회 이상 지속되었으니 그 체력도 초인적이라고 하겠다.

교회는 개척 10년 만에 교역자 20명, 행정 및 관리인원 20명, 제직 800명, 재적 성도 1만 명, 300개 구역에 달하는 규모를 갖게 되었다.

김충기 목사의 영적 지도력은 개교회에 국한 될 수 없는 것이었고 교단뿐 만 아니라 초 교파적인 한국 교회 전체에 미치는 것이었다. 1988년 3월에는 침례회보 사장으로 취임하였고, 같은 달에 한국 기독교 부흥 협의회 제 19대 회장으로 취입하였다. 1989년 9월에는 기독교 한국 침례회의 총회장으로 취임하여 이듬해 8월에 제 16차 침례교 세계 대회를 서울에 유치하여 전 세계인이 보는 앞에서 하루에 1만 명을 침례 주는 대 역사를 이루어냈다. 초대 교회가 하루에 어떻게 5천 명에게 침수례를 베풀었겠느냐는 타교단의 비난을 일순간에 물리쳐 버린 쾌거였다. 1991년에는 한국 기독교 기도원 총 연합회 공동 회장을 연임하였다. 해외 선교와 국내 선교 특히 구령의 황금 어장이라 불리우는 군 선교에 기여한 김목사의 공헌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것이며, 1997년에 발간된 강남중앙침례교회의 「창립 20주년사」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김충기 목사의 부흥운동이 기독교 한국 침례회 교단 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 전체에 끼친 공헌은 수량으로 측정할 수 없는 지대한 것이었다.

첫째로, 김목사는 한국 침례교 역사에 있어서 동아 기독교와 기독교 한국 침례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였다. 1946년 2월에 충남 칠산에서 교단 재건 회의를 했을 때의 동아기독교 잔존 교세는 남한 교회 40개와 약 350명의 교인에 불과하였다. 유력한 타 교파에 귀속하자는 통합론까지 대두되었던 형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로 한 명의 젊은 동아 기독교인이었던 청년 김충기가 성령의 능력을 받게 되자 기독교 한국 침례회의 중심 인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미국 남침례교회가 미친 영향보다는 동아기독교의 뿌리가 더욱 강했던 김충기 목사는 그러므로 동아 기독교와 이후 침례교 접목의 중심 대들보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타교파에 의해서 이단시되고 배척되었던 침례교의 위상을 크게 드높이고 침례교의 성서 중심성과 복음성을 크게 홍보함으로써 침례교단이 한국 교회의 당당한 중심 교단으로 자리 잡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한번은 감리 교단에서 감리사의 위치를 가진 감리교 목사가 시무하는 감리교회에서 부흥 성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감리교회에서 설교하면서도 김충기 목사는 세례를 침례로 읽었고, 침수례가 성경적임과 침수례로 말미암아 받는 축복에 관해서 설교하였다. 침수례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침수례가 갖는 영적인 의미는 깊은 것임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감리교 목사는 큰 은혜를 받고 감리교인 40명에게 침수례를 베풀도록 허락하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감리교 목사는 감리사 총리국이라는 곳에 소환 당하여 감리사 직분을 해고 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감리교 목사는 다시 김충기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자기 교회에서 개최하였다. 감리사 직분 해고 당하는 것보다 은혜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감리교 목사의 가문은 감리교단 내에서 큰 부흥을 이룬 가문이 되었다.

대구 중앙침례교회에서 목회할 때에 처음에는 김목사를 이단시하던 장로 교회 목사들도 나중에는 도리어 대구에 머물러 달라고 간청했다는 일은 이미 전술한 바 있다. 또한 1990년 8월에 하루 일만 명에게 침수례를 베푼 침례교 세계대회를 서울에 유치 한 것은 침례교회의 위상을 최고로 높인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셋째로, 김충기 목사의 부흥 성회는 교회의 영적, 숫자적 부흥에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기적과 은사가 꼭 필요한 것임을 한국 교회에 깨우쳐 준 공헌이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1901년부터 성령 은사 운동이 일어났으나, 미국에서는 이미 성령 은사 운동은 백안시 되고 있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성령 은사 운동은 전 교단으로 확산되었고 교회 역사가들은 이를 가리켜 카리스마틱 운동 (Charismatic Movement) 라고 하였다. 1960년에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체험한 김충기 목사는 외국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운동에 관해서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언어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온 육신을 감싸는 불과 진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면 죽은 영혼들이 살아나고 교회가 부흥되는 산 증거를 보여주었으니, 성령의 은사를 몰랐던 한국 교회에 성령의 능력을 소개한 공헌이 지대하다고 하겠다. 성경공부에 의한 교회성장도 교회를 세우는 한 방편이 되겠으나 성령의 은사에 의한 교회 성장도 폭발적인 위력이 있는 방편임을 증거하였다.

전북 옥구군에 있는 성덕리의 장로교회는 33년 된 교회였으나 한 장로가 동네에서 덕을 세우지 못하고 부흥의 저해 요인이 됨으로 인해서 노회로부터 교회 폐쇄 결의가 내려진 교회였다. 그러나 교회를 살리고자 힘쓰던 안수 집사 한 분이 함열에서 목회하던 김충기 목사를 찾아 부흥회를 요청했다. 부흥회를 인도하기 시작하던 때의 교인은 10명 미만이었고 동네 사람들은 교회를 향하여 돌을 던졌다. 집회 중에 울고 있는 한 여자가 있었고 사연을 물은 즉 처녀 시절에 성가대도하고 교사도 했는데 불신자 집안으로 출가해 와서 신앙생활을 중지하고 우상 숭배를 하다가 날 때부터 곱추가 된 아들을 낳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전주 예수 병원에 가서 미국인 의사에게 물은 즉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푸닥거리, 묘자리 옮기는 일 등 온갖 미신 행위를 계속 했으나 차도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 부인의 남편은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었지만 자기의 작은 아버지인 그 교회의 안수 집사를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붓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곱추 아들을 김목사가 안수기도 하고 숙소에 돌아와 휴식하고 있을 때 곱추 아들의 부모가 숙소로 찾아와 김목사에게 큰 절을 하였다. 곱추 아들이 회복되어 멀쩡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그 부부는 크게 회개하고 교회에서 간증하며 집회는 열흘이나 연장되고 동네 무당도 회개하여 무당집을 뜯어버리는 역사가 나타났다. 교회는 크게 부흥되고 곱추의 아버지는 현재 장로가 되어 충성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도행전적 역사는 집회마다 일어났다.

넷째로, 김충기 목사는 한국 기도원 운동 사상 기도원의 위상을 획기적으로 높여주는 공헌을 하였다. 호텔급의 숙소와, 최상의 경치를 갖춘 전경, 일류 식당급의 배식 시설, 맑은 공기를 흡입할 수 있는 체육 시설, 일류의 집회 시설을 가진 양수리 수양관은 단지 기도 처소로서가 아니라 종합적인 기독교 수양 시설의 지평을 열었다. 전국 목회자, 사모, 평신도 지도자들이 수준 높은 시설의 혜택을 누리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영적 전쟁의 능력을 충전하는 한국 교회의 보배가 되었다.

다섯째로, 김충기 목사는 부흥되는 개교회의 전형적인 모델을 제시했다는 공헌이 무엇보다도 큰 것이지만, 부흥의 과정 속에서도 끊임없이 교회 개척을 시도하는 모범을 보인 점이 큰 공헌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물질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필요한 경우에는 적지 않은 숫자의 교인들을 아낌없이 함께 보내주었다는 점이 특이한 것이다. 1997년 5월에 설립된 분당 강남중앙침례교회나, 2001년 1월에 개척된 일산 강남 중앙 침례교회, 2002년 1월에 개척된 용인 강남중앙침례교회의 예가 그 명백한 증거이다. 물론 물질적 지원으로 설립된 여러 군부대의 교회나 지역교회들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러나 인적 자원의 지원까지 마다하지 않은 개척지원의 모델은 분명 다른 데서 찾아보기 어려운 큰 마음의 선교라고 하였다.

김충기 목사에게는 미국 그랜드 캐년 대학에서 명예 신학 박사 학위, 달라스 침례 대학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에 이어 2001년 5월에는 침례 신학 대학교로부터 오관석 목사와 함께 교단 최초의 명예 신학 박사 학위가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