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면 즐거워하는 특권이 있습니다.(2절)

구원받은 우리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모두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던 자들입니다.(롬3:23) 구원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등진 채로 세상의 것을 구하며 그 쾌락에 빠져 살던 자들 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앞으로 엄청난 축복이 더 남아 있기에 더욱 즐거워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오실 때 우리는 들림을 받게 될 것이고 이 낮고 천한 몸이 죄 없는 영화로운 몸으로 변하게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예배해 놓으신 천국에 가서 영원토록 말로 다 할 수 없는 매일 기적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의 스토리가 아니고 바로 저와 여러분의 스토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해 놓은 영광을 바라보면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로마서 5:2절에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여기서 들어감을 얻다 영어로는 access하다 이것은 한사람이 다른 사람을 에스코트해서 높은 사람을 만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당시 로마에서 황제를 배알 하려면 황제 측근이 동행을 해서 그 사람을 황제 앞으로 인도해 들여야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만나려고 한다고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알현 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만나는 특권은 바로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직접 만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그들이 예배드리는 성전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외소와 성소와 지성소입니다. 외소는 이방인들과 여자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곳입니다. 성소 중 지성소는 아무리 이스라엘의 경건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또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들어 갈 수가 없는 곳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높이 60Feet와 넓이 30Feet의 6inch 두께의 휘장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위용을 보면 다리가 후들 거릴 것입니다. 감히 그 휘장을 걷고 들어갈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이 구분되어 분리된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가르셨습니다. 당신의 피로 제물 되셔서 이 구분을 없애버리신 것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그날 바로 이 성전의 휘장은 둘로 갈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여기에 들어가도록 허락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 입니까? 우리의 관계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감을 얻게 된다고 본문은 우리에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3~4절 -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우리의 의롭다 함, 화평, 즐거움은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적 체험인 신유, 환상, 방언을 경험한 사람 중에는 자기 것만 대단하다고 말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주관적입니다. 내 체험이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환난으로 하나님께서 양육시켜 가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환난이 올수록 내 믿음이 객관화되는 것을 느낍니다.

인간의 사랑은 맹목적이거나, 이기적이거나, 이해관계에 얽혀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나를 양육해 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목적이 뚜fut하기 때문에 무턱대고 양육하고, 보호하고, 복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단잠도 주시고, 환난도 주시고, 가난도 주시고, 박해도 주십니다. 육체와 물질과 정신의 고통은 모두 영적 시련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환난은 누르다, 짜내다, 분쇄하다 그런 뜻입니다. 구원을 이루어 가는 필수 코스입니다. 바울 사도가 275명과 함께 행선하다 유라굴로 광풍의 환난을 만났습니다. 배가 파손되고, 기구, 재물 다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생명에는 지장 없이 로마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환난에는 인내가 올 수밖에 없습니다.

인내는 무엇 밑에서 누구 아래서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 밑에 있어보지 않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인내를 모릅니다. 인내는 누구 밑에서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성도님은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한 것은 시어머니 밑에서 극심한 시집살이를 하고 남편 밑에서 힘든 경험을 당해보지 않았으면 어떻게 교회에서 권사로 구역장으로 성도를 섬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날마다 한다고 합니다. 온유와 화평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확고부동함으로 끝까지 버티는 것을 인내라고 합니다. 연단은 그런 인내를 가지면 인정받는 품질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인정받은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소망은 인정받은 인격에 예수 안에서 항상 좋은 것만 바라고 기대하도록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3절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5절 -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이 소망이 강해 보일 때도 있고, 약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했다, 미워했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바" 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성령님이 하십니다. 환난이 주제가 되고, 성경이 교과서가 되고 성령이 스승이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도 소망을 부끄럽게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만취한 상태로 음주운전을 한 차에 치어 온 몸에 화상을 입은 이지선 자매의 간증을 많이 듣습니다. 그 자매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미팅에서 만나야 될 의대생을 스물 셋의 처녀가 발가벗고 병원에서 만나는 환난을 겪으면서 스무살의 나이를 없애버리고, 세살로 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올바른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지선이의 어머니는 지선이가 아프고 고통당할 때 부둥켜안고 울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엄마가 감정적이 되면 아이를 돌볼 수 없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수술에 들어가면서 지선이는 다른 아무 것도 안 보고 엄마 눈이 흔들리는가만 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눈에 힘주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면 울지 않았다고 합니다. 냉정하게 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눈물 안 나게 해달라고 기도했기에 열 세 번 수술에 한 번도 울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힘이었고 계모 소리를 들을 정도로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울어야 할 때와 안 울어야 할 때를 이렇게 구별하시기 바랍니다. 가해자가 떠오르지 않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 바 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화상을 당해서 힘이 든데 가해자를 떠올린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내 힘으로 못하는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지선이가 하루, 하루를 눈물로 시작하고 모든 거울을 다 치웠는데 숟가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면서 '살려놓았으면 대책이 있으실 것 아니냐'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이 화상을 알기나 하느냐고 따졌다는 겁니다.

제가 전에 조그만 화상을 입고 화상 병원에 간 적이 있는데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는 완전히 사포(sand-paper)로 문지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선이가 전신화상으로 55% 이상 피부가 죽었기 때문에, 온 몸을 날마다 소독하고 거즈를 붙이면서 당하는 고통은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믿으면서 이런 과정을 거칩니다. 믿음이 어릴 때는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좀 성숙했을 때는 완벽주의가 생깁니다. 죄에 대해서 예민한 것까지는 좋은데 화평이 깨질 정도로 예민하게 되면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님이 안 고쳐주신 질병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질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안질인지, 간질인지 모르지만 안질이라고 해도 기가 막히고, 간질이라고 해도 기가 막힙니다. 그렇게 대단한 분이 설교하다가 갑자기 발작을 하면서 쓰러지고, 그러다 다시 일어나서 설교를 한다면 그 모습이 어땠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얼마나 싫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끝까지 안 고쳐주셨습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편두통이 심해서 일주일에 두 세 번 편두통이 발작하면 정신 착란을 일으키고 졸도까지 했다고 합니다. 유명한 신학자이고, 설교자인데 그 분이 화평을 누렸겠습니까. 그러니 날마다 나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모든 언행심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정죄감과 완벽주의 때문에 예수 믿고 나서도, 의롭다 함을 얻고 나서도 화평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시고, 우리는 100% 죄인입니다.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과 100% 죄인인 인생이 만나는데 어떻게 날마다 공포와 두려움과 갈등이 없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보겠습니다.

6절 -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