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에 발견된 사해사본들과 동굴을 관련시킬 직접적인 단서가 없으므로 동굴 가까이에 있는 쿰란 수도원(Khirbet Qumran)을 발굴하는 것이 절대적 의무였다.
그리하여 요르단 정부의 고대유적장관 하딩(G. Lankester Harding)과 예루살렘의 불란서 고고학연구소 소장 드보 신부(Pere Roland de Vaux)와 팔레스타인 고고학 박물관의 3부 합동 1951, 1953, 1954, 1955, 1956년 5차에 걸쳐 고고학적으로 쿰란 수도원을 발굴하였다.

쿰란 수도원은 고도 2600ft 되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16마일 거리 해발 1292ft가 얕은 사해의 서북편 유다 광야에 있으며 예류살렘보다 3900ft가 얕다. 여리고에서 남쪽으로 8마일, 쿰란 수도원에서 남쪽으로 엔게디 오아시스와 마사다가 있다. 사해에서 1000m 정도 떨어져 사해보다 약 135ft 정도 높은 곳에 남쪽에는 쿰란 와디(Wadi는 계절천으로 비가 올 때에는 물이 흐르지만, 보통은 물이 없는 곳)가 있다.

쿰란 수도원은 본관 127X100ft(37X30m)의 건물이 발굴되었다. 북동쪽에는 출입구쪽에 3피트 정도의 두꺼운 2중 벽으로 좁은 출입구가 있고 밖에 창문이 없고, 다른 건물과 격리되어 있으며, 남쪽과 동쪽에 건물 밖으로 통로가 있어서 고고학자들은 방어탑으로 여긴다. 성지에서 특이한 것은 성마다 반드시 성루가 있다는 점이다. 고고학자들은 벽이 두꺼워서 이 탑은 3층으로 되어 있다고 해석한다.

발굴에서 특이한 것은 서남쪽의 2층 방에 16.5ft(5m) 길이로 20inch 높이의 벽돌로 쌓은 길다란 테이블과 두 개의 짧은 테이블을 발견한 것이다. 구리로 된 잉크 통과 진흙으로 만든 잉크통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마른 잉크가 있었다. 사본을 베긴 같은 잉크이다. 학자들은 이 방이 두루마리를 베긴 사본실(Scriptorium)이라고 부른다.

쿰란 수도원의 남쪽에는 72.5X15피트(22X4.5메타)가 되는 큰 방이 나타났다. 바닥과 벽에 회칠을 하고, 또 벽에 얕고 잘 회칠한 벤치가 네 벽에 있어서 이 곳은 수도원의 전체가 모이는 회의실, 예배실, 강의실로 여겨진다. 서쪽에는 약간 높게 둥근 돌 발판이 있어서 사회석으로 보인다. 바로 큰 방 아래에는 30여개의 요리접시, 200여개의 식사접시, 700개가 넘는 사발, 70여개의 잔 등 1100여 개의 그릇이 조심스럽게 쌓은 방이 있어서 큰 방이 예배와 회의와 공부만이 아니라 공동 식사하는데도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 방은 지붕을 받치는 받침대가 있어서 아마도 종려나무 가지로 뜨거운 해를 가렸을 것으로 생각한다.

수도원 발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물 저장소이다. 네 개의 큰 물 저장소(Cisterns)와 여러 개의 작은 것들이(baths) 발견되어 40m3의 물을 저장할 수 있었다고 본다. 특히 사막에서 물을 잘 보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비가 오는 우기 철에 물 한 방울도 흘려 보내지 않으려고 홈을 파서 물을 저장소에 모은다. 벼랑의 바위산 위에서 물을 모아 수로를 통하여 수도원까지 잘 인도되었다. 물에 대한 기록은 매일 목욕하고, 흰 옷을 입고, 공동 식사를 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세례식을 거행하였다는 점이다.

그 밖에 창고, 빵 굽는 곳, 큰 밀가루 공장, 부엌, 세탁소, 도자기 굽는 곳 등 여러 사실이 발견되어 도시에서 떨어져 외딴 사막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한 것을 보여준다. 수도원에서 가까운 피쉬카(En Fishkah)를 중심으로 농사도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관에는 침실이 없어서 그들이 근처에 천막을 치고 자거나, 동굴에 기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근처에 토기가 발견된 동굴이 25개가 발견되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건축 바로 동쪽에 1,100여개의 무덤이 있다. 40여 묘를 파보았는데 머리를 남쪽으로 놓은 것으로 보아 유대교나 기독교나 회교의 장례법이 아닌 것을 보여주었다.

쿰란 수도원 발굴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은 많은 토기의 발굴인데, 동굴에서 발견된 2자 높이, 10인치의 (60cmX25cm) 좁고 길다란 항아리와 수도원에서 깨어지지 아니한 것이 발견되어 두루마리를 넣는 특수 토기가 아니라, 물이나 포도주나 음식이나 기름을 넣는 일상용품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쿰란 수도원의 발굴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750여 개의 동전이 나온 것이다. 하스모니안 왕조의 요한 휘르카누스(John Hyrcanus, 135-104 BC)때 부터 시작하여 헤롯 왕 때까지, 그리고 유대인의 전쟁 때까지의 동전과, 바 코코바의 제2유대인의 항전(AD 132-135)때의 동전이 나왔다. 그리하여 쿰란 수도원은 주전 2세기부터 200년간 사용하였는데 층계가 14인치 가량 주저 앉아서 주전 31년의 지진으로 무너져 살지 못하다가 같은 목적으로 재건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쿰란 수도원은 제 1기 주전 2세기 중엽에서 31BC까지, 제 2기 4BC-AD68까지 사용하고, 제3기는 AD132-135까지 로마와의 항쟁에서 다시 사용하였는데 쿰란 수도원과는 무관하다.

쿰란 수도원의 곡학적 발굴로 1947년에 발견된 사해사본들이 쿰란 수도원에서 기록한 것이 입증되어 수도원과 동전들과 두루마리들이 유기적 연관이 있다는 것이 판명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해 두루마리들을 기록하고 읽고 보존한 분들은 쿰란 수도원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공동생활을 하였다. 그들이 왜 불모지인 사막에 와서 수도원을 건설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그들의 신앙과 생활을 계속하여 살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