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명 총장(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Photo : ) 이상명 총장(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어느 주일, 목사 A는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오며 묘한 공허감을 느꼈다. 설교는 완성도가 높았다. 구조는 탄탄했고, 예화는 적절했으며, 결론은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그 주간에 본문 앞에서의 씨름이 없었다. 눈물이 없었다. 회중을 향한 절박한 간구가 빠져 있었다. AI가 초안을 썼고, 그는 그것을 다듬었다. 설교는 훌륭했지만, 그것이 과연 ‘그의 것’이었는지. 그는 처음으로 그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다.

AI는 교회의 기능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다. 설교 준비, 심방 메모, 상담 자료, 교육 콘텐츠까지, AI는 목회의 가시적 절차라면 무엇이든 능숙하게 처리한다. 마치 교회 사역의 모든 업무를 인턴 한 명이 밤새 처리해놓은 것 같다. 단, 그 인턴은 새벽 기도를 모른다. 도구로서의 AI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AI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충분히 좋은 기준’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충분히 좋은 것은 더 나은 것을 향한 갈망을 말없이 잠재운다. 그리고 갈망이 사라진 자리에서, 강단의 인격성, 공동의 신앙 언어, 목회자의 소명, 예언자적 발언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속도로 공동화(空洞化)된다. 곧, 겉은 남아 있으나 그 안의 실질과 생명은 서서히 빠져나간다.

설교와 권위: 설교는 목회자 자신의 것으로 남아 있는가
‘AI 설교와 인간 설교를 구별하기 어렵다’는 말이 AI의 능력으로 칭송받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AI는 수천 편의 설교 데이터를 학습해 기승전결의 구조, 예화의 배치, 감동적인 결론의 패턴을 정확히 익혔다. 인간 청중이 ‘좋은 설교’라고 느끼는 문장 리듬과 감정선을 통계적으로 최적화해 출력한다. 그러나 목회자는 바로 그 칭송 앞에서 전율해야 한다.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은, 설교가 ‘정보 전달 행위’로 환원되었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설교학자 필립스 브룩스(Phillips Brooks)는 설교를 “인격을 통해 전달되는 진리(Truth through Personality)”로 정의했다. 정보가 아니라 인격이 매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골수에 사무쳐 불붙는 것 같아서 참을 수 없었노라”(렘 20:9)고 고백했다. 그 내면의 불꽃이 설교를 설교이게 한다. AI는 수천 편의 설교를 학습했지만, 단 한 번도 본문 앞에서 밤을 새운 적이 없다. 그 씨름의 흔적, 그 불꽃은 AI가 통계화할 수 있는 데이터가 아니다. 설교가 언어의 완성도로만 평가되기 시작하는 순간, 강단은 이미 브룩스가 말한 ‘인격의 매개’를 내려놓은 것이다.

물론 미주 한인 목회 현실에서 이민 교인 상담, 영어권 2세 사역, 행정, 심방을 한 몸으로 감당하면서 매주 설교를 준비하는 일은 인간적 한계를 넘는다. AI에 기대는 것은 나태함이 아니라 생존이다. 그러나 명확한 원칙 없는 사용은 서서히 의존으로 굳어진다. 문제는 AI 설교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좋다’는 것이다. 충분히 좋은 대안은, 더 나은 것을 향해 나아가려는 동기의 뿌리를 말없이 잘라낸다.

매 설교마다 “이 본문 앞에서 내가 씨름한 것”, “이 성도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쳐 쓴 문장”을 두세 줄 남겨두는 설교 일지를 권면하고 싶다. 일지를 채우지 못한 주간이 있다면, 그것이 그 설교에 무언가 빠져 있다는 가장 정직한 신호일 것이다.

신앙 교육과 공동체: 같은 교회, 다른 신앙
같은 교회 청년 다섯 명에게 묻는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10년 전이라면 표현은 달라도 같은 신학적 토대 위에 서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다르다. 각자가 AI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고, AI는 각자의 관심과 맥락에 맞게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설명했다. AI의 답변은 이단적이지 않다. 오히려 대체로 균형 잡혀 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 이단은 경계선이 보이지만, 균형 잡힌 개인화는 경계선 자체를 지운다. 균열은 내용이 아니라 구조에서 온다.

초대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고 했다.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가 말했듯, “기독교 신앙은 고독한 개인이 채택하는 신념 체계가 아니라, 특정 공동체 안에서 형성되는 삶의 방식이다.” 신앙은 혼자 다운로드받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내는 것이다. AI는 개인에게 맞춤화된 신앙 정보를 제공하지만, 바로 그 맞춤화가 공동체를 해체하는 동력이 된다.

물론 AI를 통해 성경을 더 깊이 탐구하게 된 성도도 있다. 문제는 탐구의 시작이 아니라 귀결이다. 개인화된 탐구가 공동체적 고백으로 수렴될 때는 유익하다. 그러나 각자의 탐구가 공동의 나눔 없이 굳어질 때, 10년 후 같은 예배당에 앉은 성도들이 ‘은혜’라는 단어를 저마다 다른 의미로 쓰고 있는 날이 온다.

가장 실제적인 대응은 교회 고유의 신앙 언어를 의도적으로 빚는 것이다. 구원, 은혜, 성령, 기도, 교회를 ‘우리 교회는 이렇게 고백합니다’는 방식으로 담은 열 페이지 안팎의 신학 언어 소책자를 성도들과 나누기를 권한다. 이 공동의 언어가 먼저 뿌리내려 있을 때, AI는 분열의 씨앗이 아닌 보완의 도구로 자리를 찾게 된다.

목회자의 영혼: 효율이 쉼을 잡아먹을 때
AI를 도입한 어느 목회자는 처음 몇 달간 시간의 여유를 경험했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자 그는 더 바빠져 있었다. 설교 준비 시간이 줄었으니 심방을 더 했고, 행정이 빨라지니 새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AI가 만들어준 빈 시간은 금세 다른 사역으로 채워졌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하고, 목회자의 일정은 여백을 싫어한다. 1년 후 그는 생애 최악의 번아웃 앞에 섰다.

더 교묘한 것은 AI가 만들어내는 비교다. 즉각 생성되는 완벽한 설교 초안 앞에서 목회자는 자신의 작업이 불완전하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새벽에 울며 기도하며 빚어낸 설교, 수십 년간 쌓아온 목회 직관, 이 모든 것이 AI의 깔끔한 출력물 앞에서 초라해진다. 영성 신학자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목회자의 세 가지 유혹으로 “연관성(relevance), 장관성(spectacle), 권력(power)”을 꼽았다. 쉽게 말하면 “나 요즘 뜨는 사람이야”, “내 설교 보면 깜짝 놀랄걸”, “내가 없으면 이 교회 안 돌아가”의 유혹이다. AI가 제공하는 효율과 완성도는 바로 이 세 가지 유혹을 동시에 건드린다. AI 시대의 번아웃은 ‘너무 많이 한다’가 아니라 ‘충분히 했어도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에서 온다. 그리고 그 느낌은 소명의 뿌리를 갉아먹는다.

그러나 갈멜 산 승리 후 광야 로뎀 나무 아래 쓰러진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더 많은 사명이 아니라 쉼과 음식과 침묵을 먼저 주셨다(왕상 19:4-7). 하나님의 처방전에는 ‘사역을 더 하라’는 항목이 없었다. AI가 확보해준 시간을 더 많은 사역이 아닌 더 깊은 임재와 회복으로 향하게 한 목회자들은, 오히려 목양의 깊이를 되찾았다고 고백한다.

목회자 자신에게 조용히 물어보기를 권한다. AI 사용 시간이 늘어난 만큼 기도와 묵상 시간도 함께 늘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AI가 확보해준 시간을 미리 달력에 기도의 시간으로 정해두는 것이 효율의 함정을 빠져나오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그런데 영혼이 고갈된 목회자에게는 한 가지 공통된 징후가 있다. 안으로 쫓기는 사람은 밖을 향해 말할 여력이 없다. 번아웃의 가장 은밀한 결과는 설교 준비의 부실이나 성도 돌봄의 소홀이 아니다. 가장 먼저, 가장 조용히 포기하는 것은 바로 세상을 향한 예언자적 발언이다. 네 번째 균열은 거기서 시작된다.

예언자적 사명: 교회가 침묵할 때 세상이 말한다
아모스는 당대의 경제 구조를 직시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파수꾼으로 삼았으니… 깨우치지 아니하면 그 피 값을 내 손에서 찾으리라”(겔 3:17-18)고 하셨다. 파수꾼의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공모다. 그렇다면 지금 교회는 말하고 있는가?

AI 활용 세미나와 목회 적용 논의는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AI가 만들어내는 노동 구조의 변화나 알고리즘 윤리 문제에 대해 교회가 공적으로 신학적 입장을 밝히는 사례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미주 한인 교단 차원의 AI 윤리 논의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교회가 AI 도구를 ‘어떻게 잘 쓸까’를 논의하는 속도에 비해, AI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신학적으로 묻는 목소리는 현저히 조용하다. WCC가 2023년 AI 윤리 성명을 발표하고, 일부 신학교가 기술 윤리 과목을 개설하기 시작한 것은 교회가 이 의제를 감당할 수 있다는 선례다.

성도들은 이 문제를 매일 직면한다. 알고리즘 편향으로 취업 심사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이민자 이웃, AI 자동화로 일자리를 잃는 한인 노동자, 딥페이크로 명예를 훼손당하는 피해자까지,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창 1:27)된 존재들이다. 인간의 존엄은 알고리즘이 측정할 수 있는 항목이 아니다. 기술이 인간을 섬겨야지, 인간이 기술의 효율을 위해 최적화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AI 시대의 교회가 선포해야 할 예언자적 언어다.

연 1회라도 강단이 AI 윤리를 직접 다루어주기를 간곡히 권한다. 성도들이 월요일 직장으로 돌아갈 때, 주일 말씀이 신학적 나침반이 되어줄 수 있다면, 강단의 침묵이 남긴 자리를 알고리즘과 시장의 언어에 내어주지 않아도 된다.

결론
강단의 인격성, 공동의 신앙 언어, 목회자의 영혼, 교회의 예언자적 목소리. 이 네 가지 균열은 모두 서서히 진행된다. 급격한 위기는 대응하기 쉽다. 아무도 ‘이렇게 되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문득 그렇게 되어 있는 균열이 더 치명적이다.

그러나 이 위기들은 동시에 교회의 소명을 가장 선명하게 재확인하는 역설적 기회다. AI가 설교의 절차를 완벽하게 수행할수록, 그 어떤 알고리즘도 통계화할 수 없는 것들—본문 앞에서 밤을 새운 씨름, 특정 성도의 이름을 불러가며 흘린 눈물, 공동체가 함께 고백하며 빚어낸 신학 언어, 세상을 향해 울리는 파수꾼의 목소리—이 얼마나 대체 불가능한지가 오히려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처음의 목사 A로 돌아가자. 그는 강단에서 내려오며 물었다. “이 설교는 과연 나의 것인가.” 그 질문이 불편했다면, 그 불편함이 바로 답이다. 씨름의 흔적, 눈물의 자국, 특정 성도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쳐 쓴 문장들이야말로 설교를 ‘그의 것’으로 만드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AI가 끝내 흉내 낼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도끼가 나무꾼 위에 스스로를 높이지 못하듯(사 10:15), AI는 소명 위에 스스로를 높일 수 없다. 그 균열의 지도는 이미 그려져 있다. 지금 이 시대의 목회자에게 필요한 것은 지도를 읽는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