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가정교회인가?"에 대한 의문은 대개 이렇게 시작됩니다. "지금은 시대가 다르지 않은가? 꼭 이 방식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저 개인의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제 양심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습니다. "우리의 기준은 무엇인가?" 아니, "나의 삶의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면서 단 한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막 1:17). 전략이 아니었습니다. 삶을 함께 나누는 하나님의 가족 관계,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곁에 머물며 보여주고, 함께 걸으며, 가르치셨습니다.
처음 성령을 받은 초대교회도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빵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행 2:46). 핍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그리스도인에게 핍박은 훈장입니다). 성령이 그들을 그렇게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고백합니다. 이 도제식 방식은 본래부터 가장 힘든 길입니다. 목사인 저 자신부터 가장 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성도들이 "목사님은 왜 예수님 같지 않냐"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완벽해서 이 길을 가는 게 아닙니다. 어차피 주님을 따라 살 것이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제 분수에 맞게, 제 역량이 닿는 데까지, 조금씩이라도 닮아가 보려 합니다. 여러분도 함께 그렇게 가 주시겠습니까? 누가 쓰러지면 조금 더 성한 분들이 같이 일으켜 세워 주면서 끝까지 갑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합니다.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게 하라"(딤후 2:2).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충성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목장이고 1대1 동행이며, 시대를 초월하여 성경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제자 삼는 방식입니다. 제자는 자식 낳아 기르듯이 아프고 힘들지만 그렇게 만들어지는 게 본질입니다. 이게 "성경대로"입니다.


























































![김라니 목사 선교 에세이 [그 눈물이 찬양이 되기까지]](https://kr.christianitydaily.com/data/images/full/145528/image.jpg?w=250&h=154&l=50&t=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