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구속사에 따라 주일과 절기를 구분하여 지키도록 형성된 교회 달력을 “교회력 (Liturgical Year)” 이라고 한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적 사건들을 기념하고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응답을 드리게 함과 동시에, 과거의 사건을 현재로 가져와 “재현”하고 미래의 것을 현재에서 “기다리게” 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우리는 지난 2월 18일 참회를 의미하는 “재(灰, 잿더미)의 수요일” 을 기점으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며 영적 성숙과 성결을 추구하는 기간, 즉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까지, 주일을 제외한 총 46일간의 긴 여정을 지칭한다. 특별히 이 기간 중 종려주일 부터 부활주일 전 토요일까지를 Holy Week (거룩한 주간)로 기념하는데, 이는 “세족 목요일”(Maundy Thursday: 세족식과 함께 최후의 만찬으로 알려짐)과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기념하는 “성금요일”(Good Friday)을 포함한다.
필자는 한 교회에서 오르가니스트 겸 음악 조감독으로 섬기고 있다. 해마다 이 절기가 돌아오면 많은 교회가 Holy Week와 부활주일에 어떤 음악을 연주할지 기획하며, 실제로 다양한 연주회를 개최한다. 필자의 교회도 다르지 않다. 지난 칼럼에서 “교회음악이란 무엇인가”와 더불어 “교회음악의 종류”, “교회음악의 장르”에 대해 간략히 기고한 바 있는데, 이번 칼럼에서는 사순절에 널리 연주되는 교회음악의 한 장르인 “레퀴엠 (Requiem, 진혼곡, 이하 레퀴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레퀴엠은 가톨릭 예전 안에 있는 “죽은 이를 위한 미사(Mass for the Dead)”를 의미한다. 교회음악사에서 레퀴엠은 수많은 작곡가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소나타나 교향곡과 같이 음악사의 중요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는 건강상의 문제로 작곡 중이던 레퀴엠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였다. 이미 체결된 작곡 계약과 작곡료 문제로 인해 그의 부인은 모차르트의 사후에도 이 미완성 작품을 완성하여 출판해야 했다. 이에 모차르트의 수제자이자 생전에 가까이에서 그의 창작을 도왔던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에게 작품의 완성을 요청하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음악인 모차르트의 “Lacrimosa (라크리모사: 눈물의 날)”는 애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로 인간의 슬픔을 더한다.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한 이 “라크리모사”는 이후 쥐스마이어뿐 아니라 모차르트 음악 전문 학자들에 의해, 모차르트가 남긴 여러 작품을 토대로 그의 음악적 색채를 추정하여 보완·재구성되었고, 레빈이나 만더 같은 학자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다양한 판본으로 전승되고 있다.
베르디 (Giuseppe Verdi, 1813–1901)는 오페라로 유명한 이탈리아 작곡가이다. 오페라 작곡가다운 극적 감각이 반영된 그의 레퀴엠은 알레산드로 만초니를 추모하기 위해 작곡되었으며, 단순한 종교음악을 넘어 거대한 스케일과 강렬한 표현을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의 상징과도 같은 “Dies Irae (디에스 이레: 분노의 날)”는 음악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처음 몇 마디만 들어도 베르디의 레퀴엠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강렬하고 인상적인 곡이다. 베르디는 이 “분노의 날”을 통해 인간이 죽음 이후 심판대에 섰을 때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를 폭풍처럼 몰아치는 합창과 타악기, 금관의 폭발적인 울림으로 표현한다. 이로써 죽음은 조용한 안식인 동시에 심판대 앞에 설 인간의 실존적 두려움을 드러낸다.
브람스 (Johannes Brahms, 1833–1897)의 레퀴엠, 즉 “독일 레퀴엠”은 전통적인 레퀴엠과는 다른 독창적인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레퀴엠은 가톨릭 전례문인 라틴어 미사 통상문을 바탕으로 작곡된다. 그러나 브람스는 이러한 전통에서 벗어나 라틴어 대신 독일어 성서 본문을 선택함으로써 음악과 더불어 가사가 주는 위로를 강조하였다.
브람스는 레퀴엠을 작곡하기 전 깊은 상실의 슬픔을 겪었다. 그의 절친한 동료 음악가 슈만의 죽음에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개인적 상실과 좌절의 경험을 이 작품에 녹여냈다. 브람스에게 있어 레퀴엠 “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미사”이면서 동시에, 죽은 이를 그리워하는 가족과 친지, 친구들, 곧 “남겨진 자들을 위한 위로”에도 초점을 둔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브람스의 레퀴엠은 베르디의 오페라적 성향의 레퀴엠이나 전통적 라틴어 미사 형식을 따른 모차르트의 레퀴엠과 뚜렷이 구별된다. 그는 자국의 언어 (독일어)를 통해 위로와 소망을 더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음악적 색채를 더했다. 이 작품은 7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악장에 인용된 성경 구절은 위로의 메시지로 가득하다. 특히 제5악장의 소프라노 독창에 등장하는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는 이사야 66:13을 인용함으로써, 인간이 주는 위로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안식을 확신하게 한다.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기독교 절기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향한 기다림의 시간이다. 레퀴엠 또한 애도의 음악이면서 궁극적으로는 위로와 소망을 향한 신앙의 표현이 음악적으로 나타난다. 교회음악이 가지는 많은 역할 가운데, 교회음악은 절기마다 단순히 전통을 재현하는 계승을 넘어 공동체의 신앙을 형성하는 중요한 매개가 된다. 브람스의 레퀴엠이 보여주듯 음악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잃지 않으면서도 그 너머의 소망을 노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순절을 지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절기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다리며 참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궁극적 위로와 희망으로 채워지는 절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 원고의 내용은 전적으로 저자의 것입니다.
유양선 교수는 센트럴신학대학원 예배학과 교수 (겸임)로서 달라스제일장로교회 오르가니스 겸 음악조감독으로 섬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