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교회 안에 자주 나타나는 장애에 대한 오해를 다루는 시리즈입니다. 매주 한 가지 오해를 살펴보며 성경과 신학과 목회적 관점에서 성찰하여 장애를 가진 성도들이 비장애 성도들과 함께 건강한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는 길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지난 글에서는 “장애는 죄에 대한 징벌이다,” “장애인은 연민의 대상이지 동역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 “장애인은 일반 사람과 소통할 수 없다,” 그리고 장애인은 치유만을 원한다” 라는 오해를 다루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장애”라는 단어는 종종 하나의 동일한 범주처럼 취급됩니다. 누군가가 휠체어를 사용하면 사람들은 즉시 장애를 떠올리지만,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이들은 같은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통증, 만성 질환, 신경 발달의 특성, 정신 건강의 어려움이 꾀병이나 과장으로 오해되는 일도 있습니다. 또한 선천적 장애와 후천적 장애는 삶의 경험 자체가 크게 다릅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와 함께 살아온 사람은 일상의 리듬 속에서 정체성과 관계를 형성해 왔지만, 사고나 질병으로 후천적 장애를 경험한 사람은 이전의 삶과 현재의 삶 사이에서 깊은 상실과 전환을 겪습니다. 어떤 장애는 치료와 회복의 기대 속에서 관리되지만, 어떤 장애는 삶의 여정 속에서 오래 함께 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장애를 가진 성도와 진정한 교제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교제는 서로를 편의대로 이해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고, 각자의 고유한 삶을 존중하는 데서 자라납니다.
이 글은 의료적 관점과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이 오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참고로 장애에는 의학적,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관점 등이 있습니다. 의료적 관점은 보편적으로 활용되고 설명이 비교적 명확하다는 이유로 선택했으며, 이것이 유일하게 옳은 관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첫째, 지적장애는 지적 기능의 제한과 적응 기능의 제한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적응 기능은 단순한 지능 점수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생활을 스스로 디자인하고 책임지는 능력,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고 의사 소통하는 능력, 시간과 돈과 안전을 관리하는 능력,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 등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지적장애가 있는 성도는 예배 순서나 모임 규칙을 익히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고, 안내 문장을 더 단순하고 반복 가능하게 제시할 때 참여가 훨씬 쉬워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제공해야 할 것은 단정이 아니라, 이해 가능한 언어와 기다림입니다.
둘째, 발달장애라는 용어는 맥락에 따라 범위가 달라 혼동이 생기기 쉽습니다. 한국의 법과 제도 안에서 발달장애는 지적장애와 자폐성장애를 중심으로 정의됩니다. 그러나 목회 현장에서 사람들이 발달장애라고 부를 때에는 보다 넓은 의미로 신경 발달의 다양한 차이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발달의 특성이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이 유창하고 학업 수행이 가능해 보이더라도 감각 과부하, 실행 기능의 취약함, 사회적 신호 해석의 어려움,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급격한 긴장 증가 같은 영역에서 큰 부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겉으로 보이는 능력만으로 그 사람의 필요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정신장애는 우울장애, 불안장애, 양극성장애, 조현병 스펙트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과 같이 정서, 사고, 수면, 에너지, 대인 기능에 지속적이고 임상적으로 의미 있는 손상을 가져오는 상태를 말합니다. 지적장애와 달리 지적 능력 자체가 제한되어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당사자는 겉으로 매우 기능적으로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소진과 자기 비난, 불안, 공포, 외상 반응을 숨기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특히 보이지 않는 장애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밝게 인사하고 봉사도 열심히 한다는 이유로 고통이 없다고 판단하는 순간, 공동체는 이미 늦은 시점에서야 절박한 신호를 듣게 됩니다. 교회가 배워야 할 것은 표정이 아니라, 삶의 무게를 묻는 태도입니다.
넷째,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autism spectrum) 발달적 특성으로서 사회적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의 어려움, 제한된 관심과 반복적 행동 양상이 핵심 특징으로 제시됩니다. 스펙트럼 혹 범위 라는 말처럼 언어 사용 여부, 지적 능력, 감각 민감도, 일상 기능이 사람마다 크게 다릅니다. 또한 자폐의 원인은 하나로 확정되지 않았고, 뇌 발달의 차이와 관련된 복합적 요인들이 논의됩니다. 그러므로 자폐를 부모의 양육 문제로 돌리는 말은 근거가 약할 뿐 아니라 당사자와 가족에게 깊은 상처가 됩니다. 교회 안에는 자폐인을 향해 감정이 없다는 오해도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는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과 타이밍이 다를 수 있습니다.
또한 “자폐인은 모두 천재적 재능이 있다”라는 오해도 흔합니다. 대중문화가 보여 주는 특정 이미지, 그리고 유명 인물의 사례가 자폐를 한 가지 모습으로 고정시키는 효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라는 드라마 주인공 우영우의 천재적 암기력과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 syndrome)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테슬라의 대표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바로 그런 오해를 불러이르 킵니다. 일부에게 특정 재능이 나타날 수 있지만, 모든 자폐증을 가진 이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은 아닙니다. 자폐 스펙트럼 안에는 언어로 의사소통이 매우 제한적이어서 다른 방식의 소통 지원이 필요한 사람도 있습니다.
다섯째, 다운증후군은(Down syndrome) 21번 염색체가 세 개인 유전적 상태로, 지적 발달 지연과 특징적인 외모가 나타날 수 있으며 심장 질환 등 건강 문제를 동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인차가 매우 큽니다. 그럼에도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은 다 비슷하다”라는 말이 쉽게 등장합니다. 실제로는 성격, 관심사, 학습 속도, 사회성, 유머 감각이 모두 다릅니다. “항상 행복하다”라는 말도 선한 의도처럼 들릴 수 있으나, 한 사람을 특정 이미지로 고정시키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사람도 슬픔을 느끼고 좌절을 겪으며 존중과 위로가 필요합니다.
덴마크에서 다운증후군 태아의 낙태를 국가가 강제하는 정책이 확인되는 것은 아니지만 1분기 선별검사의 이용률이 매우 높고, 다운증후군으로 산전 진단될 경우 임신중단(낙태) 비율이 높게 보고되어 출생 수가 크게 감소해 왔습니다. 이 현상은 생명의 가치가 누구의 기준으로 판단되는가 라는 윤리적 질문을 제기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형상에 근거한 생명의 존엄을 고백하며, 환대와 돌봄을 구체적 실천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여섯째, 뇌성마비는(cerebral palsy) 출생 전후의 뇌 손상으로 인해 운동 기능에 어려움이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근육 경직, 조절의 어려움, 균형 문제 등 형태가 다양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적장애가 동반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가장 흔한 오해는 뇌성마비를 곧바로 지적장애로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신체적 어려움과 지적 능력은 별개의 영역입니다. 말이 느리거나 발음이 분명하지 않아도 이해력은 온전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뇌성마비는 전염성이 없는 신경학적 상태입니다. 뇌성마비 자체는 대체로 진행성 질환이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며 피로와 이차적 통증이 증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의사소통에 더 많은 시간과 인내를 제공하고, 표현의 어려움을 이해력의 부족으로 해석하지 않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일곱째, 척수 손상은 사고나 질병으로 척수가 손상되어 마비가 발생하는 상태입니다. 손상 부위에 따라 하반신 마비나 사지 마비로 나타날 수 있으며, 많은 경우 후천적 장애로서 삶의 전환을 경험합니다. 휠체어 사용자를 향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는 오해가 있습니다. 실제로 감각 손실의 정도는 다양하며, 어떤 이들은 심한 신경통과 만성 통증을 겪기도 합니다. 또한 회복에 대한 기대를 충분한 정보 없이 던질 때,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뇌와 척수의 신경은 손상 후 완전한 재생이 어려운 경우가 많아, 재활과 보조공학, 그리고 줄기세포를 포함한 다양한 치료 연구가 병행되고 있습니다. 완전한 회복이 어렵더라도 재활을 통해 기능을 향상시키고 삶의 질을 크게 높일 수 있으며, 휠체어는 속박이 아니라 이동성과 자유를 제공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장애는 단일한 경험이 아닙니다. 원인도 다르고, 특성도 다르고, 필요도 다릅니다. 보이는 장애와 보이지 않는 장애, 선천적 경험과 후천적 전환, 지적 영역과 신체 영역의 차이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모든 장애는 동일하다”라는 말은 편리해 보이지만, 결국 장애를 가진 성도를 한 인격으로 만나는 길을 막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려면 사랑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구체성은 분류표에서 오지 않고,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지체가 서로 다르며 그 다름 속에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말합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고전 12:26). 더 나아가 성경은 인간의 시각으로 약해 보이는 지체가 필요 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요긴하고 공동체에 필수적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2:22). 장애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일은 각 사람을 고유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는 첫걸음입니다.
실천을 위해 다음 세 가지를 권합니다. 첫째, 동일한 방식의 배려를 모든 장애에 적용하려는 습관을 내려놓으십시오. 예배 참여를 돕는 방식은 장애 유형과 개인의 선호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둘째, 장애를 가진 성도에게 직접 묻고 듣는 태도를 회복하십시오: “예배 중 어떤 요소가 가장 힘드신가요,” “공동체 안에서 어떤 방식의 참여가 편하신가요” 처럼 구체적으로 질문하고, 답을 그대로 존중하십시오. 셋째, 교회 환경과 소통 방식을 점검하십시오. 예배 순서의 사전 안내, 조용히 쉴 수 있는 공간 안내, 과도한 조명과 소음에 대한 배려, 의사소통 속도를 늦추는 문화는 많은 성도에게 실제 도움이 됩니다.
새해가 다가오며 개인과 교회는 여러 계획을 준비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와 사회에서 외면받기 쉬운 장애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따뜻한 복음의 메시지와 사랑이 전달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더 활발하게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