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박사
▲정일웅 박사

여러분, 15세기 중엽에 형제 연합교회가 기독 구원 신앙의 본질이 믿음, 소망, 사랑임을 성경에서 확인하고, 후스의 개혁 정신을 잘 따르고 있었을 때, 1517년 10월 31일 16세기 초엽, 루터는 후스의 교회개혁 이래, 독일에서 또다시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게 됩니다. 그 이유는 여전히 중세가톨릭교회가 구원 신앙의 진리를 여전히 왜곡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세가톨릭 교회는 신앙의 본질인 믿음 소망, 사랑은 형식적으로 만들어놓고, 그 가운데서 사랑의 중요성만 강조하여, 소위 선행 구원론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특히 면죄부 판매 사업은 구원론 왜곡의 결정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 고전13:13절 말씀과,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는 갈5;6절의 말씀을 근거로, 사랑이 믿음의 근원임을 주장한 그 당시 스콜라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루터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의(구원)는 오직 믿음(sola fide)으로만 얻게 되는 칭의의 은혜뿐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생각하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후스와 마찬가지로 구원 신앙의 본질을 깨우치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전통적으로 이어온 믿음, 소망, 사랑의 구원 신앙 본질과 그가 주장한 이신칭의 구원론 사이에서 적잖은 선택적 고민을 했으며, 마침내 믿음, 소망, 사랑은 노력하여 얻는 인간의 공로적 행위(meritorium)로 판단하여(오캄의 영향으로) 외면하면서"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이란 이신칭의를 강조하였습니다(참고, Thomas Soeding의 연구 Trias, Glaube, Hoffnung, Liebe bei Paulus 1992). 물론 동시대의 종교개혁자들인 쯔빙글리, 멜란히톤, 부쳐, 칼빈 등의 협력과 지지로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후예는 이신칭의 구원론에서 일치하고 있었지만, 다른 교리적 해석의 차이들로 인한 논쟁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분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1519년에 이르러, 100년 먼저 보헤미아-모라비아에서 교회개혁을 부르짖다가 순교한 후스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의 개혁 정신을 따랐던 형제 연합교회가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형제 연합교회의 신학자 루카스(Lukas)는 스스로 사절단을 이끌고 비텐베르그를 방문하여 루터를 지지하였고, 얼마간 양 교회는 프로테스탄트로서 동질성을 확인하면서 교제하였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루카스와 루터와 멜란히톤이 다 천국 간 후, 이들 형제 연합교회와 루터교회 사이에 교제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1555년 루터교회와 가톨릭교회 사이에 맺은 "아욱스부르그 평화화의"조약 때문이었는데, 거기 명시된 cuius regio, eius religio란 라틴어 문구가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통치자의 영역에는 통치자의 종교를"이란 뜻으로, 종교의 선택권이 지역 통치자(영주)에게 부여한 것이었습니다. 이 조약은 루터파 교회로서는 다수를 차지한 유럽의 가톨릭 환경에서 존립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이기는 했지만, 이 조약은 정작 가톨릭 황제가 통치하던 보헤미아의 형제 연합교회에는 참으로 부당한 것이었고, 엄청난 신앙 박해를 받는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결국 서로의 교제는 단절되었고, 형제 연합교회는 때마침 프로테스탄트 연합을 강조한 제네바의 칼빈을 지지하면서, 독일 개혁파교회와 교제하였습니다. 칼빈의 신학에서 확인된 여러 일치 점들, 특히 장로제도의 도입과 성찬의 성령 임재설, 성경 말씀의 철저한 신뢰와 순종은 이미 형제 연합교회가 실천하고 있던 것들로, 오늘날 역사 연구는 형제 연합교회야말로 칼빈주의 이전의 칼빈주의 자들이었음을 평가해 놓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역시 "기독교 구원 신앙의 본질인 믿음, 소망,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17세기 형제 연합교회의 대를 이어 구원 신앙의 본질을 가장 성경적 구원론으로 체계화해 준 인물은 역시 얀 아모스 코메니우스(J.A.Comenius,1592-1670)였습니다. 그는 형제 연합교회가 독일 개혁교회와 교제한 후, 개혁 신학(컬빈주의) 교육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았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독일 개혁파교회가 설립한 헤어보른과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고, 1616년 형제 연합교회 목사로 안수받았으며, 1618년 풀넥에 있는 교회와 학교의 책임자로 목양 사역을 맡게 됩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의 그곳 사역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해에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에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30년 종교전쟁(1618-1648)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발단은 프로테스탄트(후스와 루터와 칼빈파)를 지지하던 독일과 보헤미아의 제후들이 연합하여 가톨릭 편에 서 있는 황제를 내쫓고, 그들 편의 황제(독일 팔츠 지역의 성주 프리드릭)를 세우려는 정치적 봉기 때문이었습니다(1618- 21), 그 봉기는 2년간의 전쟁 끝에 프로테스탄트가 패하게 되었고, 정치권력을 다시 잡은 가톨릭 황제 페르디난트(합스부르그 가문)는 보헤미아에 있는 모든 프로테스탄트에게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요하였으며, 명령 거절은 재산 몰수였습니다(1627). 코메니우스는 형제 연합교회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따르는 성도들과 함께 폴란드 리사(레스노)로 망명하게 됩니다(1628). 거기서 코메니우스는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을 꿈꾸면서 여러 책자를 출판하였고, 그것들이 유럽 여러 나라에 알려지면서 교육학자로 명성을 얻게 됩니다. 시간 관계상 이부분은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