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사 5: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I. 교회가 회복하여야 할 하나님의 성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이다. 죄로 말미암아 그 형상이 심각하게 훼손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완벽한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성숙하여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안의 생활을 시작했다면, 그리고 예수를 따라 성숙하기를 원한다면, 예수의 계명을 통하여 우리의 성숙을 추구하고 그 계명으로 우리를 평가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는 것과 행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 자라남이 하나님의 뜻이자 우리의 의지라면, 우리가 본받을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일까? 우리가 닮을 부분은 무엇일까?
예수의 제자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필연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쉬운 일은 아니다. 로마서 2장 24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말씀하는데, 이는 이전 시대뿐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교회가 겪는 문제이다. 한국 교회가 많은 학자와 목회자, 그리고 수다한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서는 종종 지탄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능하신 하나님과 십자가를 지신 사랑의 예수께서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면, 믿음을 가진 신자, 믿음의 주인공이 된 우리가 문제가 아닐까? 혹 우리가 예수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 때문이 아닐까? 이는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쳐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분히 전해주신 말씀을 놓치고,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과 정의”가 신자와 교회를 통해서 바르게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여기서는 하나님의 많은 성품 중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중심으로 우리가 묵상하여야 할 관심사를 나누려고 한다.
II. 하나님의 성품, 아가페 사랑.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질문을 받을 때, 우리는 곧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라 어렵지 않게 대답한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보다 더 구체화 된 조직신학의 항목도 있으나 “사랑과 공의”와 같은 성품은 중요하기도 하고, 어렵지 않게 묵상하면서 나눌 수 있는 친근한 주제이다. 더구나 사랑은 기독교의 핵심적 미덕이자 목표이며, 정의와 공의는 교회뿐 아니라 사회과학과 철학 분야에서도 큰 관심을 가지지만, 기독교 신학과 철학 그리고 윤리학에서도 관심사가 되는 주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본적 성품에 대하여 얼마나 교회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 성품을 인격과 행동에 내면화시키고 있는지 자신할 수 없다. 조직신학의 신론(神論, theology proper)에서는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 을 나눈다. “공유적 속성”은 사랑, 공의, 거룩, 선, 긍휼, 자비 등과 같이 하나님과 인간이 공동으로 소유할 수 있는 성품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사랑과 정의만을 묵상하려고 한다. 먼저 사랑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시작하여 보자.
1. 가장 큰 계명과 이웃 사랑.
『아가페와 에로스』(Agape and Eros, 1930)라는 고전적인 저술로 유명한 안더스 니그렌(Anders Nygren)은 “사랑이라는 기독교의 중심 개념이 소홀히 다루어졌다”고 말하며,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사랑의 깊이를 충분히 다루는 연구는 거의 없었다고 단언한다. 니그렌에 의하면, 사랑은 아가페와 에로스를 나누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니그렌은 그의 아가페 이론이 기초하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을 어디서 찾고 있는가? 그는 무엇보다도 예수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 아가페 사랑의 핵심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예수는 아가페 사랑을 자신의 가르침의 최고의 경지로 이끌어 올리며 구약을 재해석했다고 본다.
구약에서 ‘헤세드,’ ‘아하바’ 등으로 표현된 사랑이라는 단어가 신약에서 ‘아가페’로 번역되었는데, 이 개념은 구약에서 시작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신약에 들어와서 구약보다 훨씬 더 깊고 심원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개념이 되었고, 다른 개념보다 훨씬 더 차별적인 의미로 고양되어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22장 35-40절에서 예수님은 율법사의 질문을 받고 구약의 가르침을 집약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정리하셨다. 그리고 이 두 계명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동등한 위상과 중요성을 가진 하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가르치실 때, 이 가르침이 율법과 선지서의 핵심이자 가장 큰 두 계명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에 동일하게 “아가파오”(ajgapavw)라는 동사의 명령형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첫 번째 계명인 하나님 사랑은 신명기 6장 5절 말씀이며, 둘째 계명인 이웃 사랑은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이다. 아울러 예수님은 이 두 계명이 동일하게 중요하고, 함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셨으므로, 사도 요한은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은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노라”(요일 1:4)고 가르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별될 수는 있지만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이 둘이 함께 십계명을 이루기 때문이다. 십계명의 두 돌판에 나오는 하나님 사랑의 계명 1-4 계명과 이웃 사랑의 5-10 계명으로 구별되지만, 이것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귀중한 짝을 이루며, 같이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처음 4계명은 하나님 사랑의 방법론으로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기, 우상숭배의 금지와 예배를 위한 형상을 만드는 행위의 금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하지 않기, 안식일의 준수를 가르친다. 그러나 나중 6계명 이웃 사랑의 방법론은 부모 공경,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의 금지와 이웃에 대한 탐욕의 금지를 가르친다. 이웃 사랑의 부정적인 요소에 대한 금지와 함께 신약에서는 이웃 사랑의 적극적인 방법을 말하는데 그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를 통해서 나타난다.
2. 이웃 사랑의 모범, 선한 사마리아인
예수님은 이웃 사랑이라는 명제를 이론적으로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시는데 이것이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37)이다. 이 비유는 예수께 질문하며 시험하는 율법사의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율법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성경의 핵심적 명령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이것을 그대로 행하면 구원을 얻는다’ 말씀하신다. 율법사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묻는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여기서부터 심오한 경지로 접어든다. 예수의 심오한 가르침은 몇 가지로 집약할 수 있으나, 이 심오한 비유는 깨달아 아는 만큼만 겨우 전달할 수 있을 뿐이다. 첫째로 예수님은 이웃을 정해주지 않으시고 ‘네가 이웃이 되라’ 말씀하시므로, 감히 이웃이 된다는 일이 범위를 정하고 ‘이제 다 행했다’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의 대상을 제한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무제한의 외연을 열고 있다. 이것이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자의 겸손함을 자각시킨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제사장, 레위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와 당시의 교제를 금하는 대상이 된 사마리아인을 대조시킨다. 그리고 이웃이 되는 사람이 의외로 사회적 배제의 대상이 되는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다는 고통스러운 비유를 제공함으로 율법사의 교만을 명백히 드러낸다. 셋째로 이웃이 되는 사람은 종교적 역할을 가진 자의 ‘직분’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관건이 됨을 보여준다. 사회적 직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위자의 사랑의 마음이다. 넷째로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Ferdinand Tönnies)가 분류한 공동사회와 이익사회의 구분처럼, “이웃”(neighbor)이란 공동사회에서 애정, 친밀함과 책임감을 느끼는 존재이지만, 지나쳐 간 사람들은 공동체적 의식이 없는 사회적 구성원 “행인”(passerby)에 속한다.
이웃이 된다는 것은 그러므로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웃 사랑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고난 속의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사람 곧 행인이 되지 않으며,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웃은 타인의 고난에 반응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폴 리쾨르(Paul Ricoeur)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동료와 이웃”(The Socius and the Neighbor) 이라는 논문을 통하여 비유를 확장하여 “사회적인 인간과 이웃”을 나눈다. 그에 의하면 이웃이 된다는 것은 아가페적 인간이 되는 놀라운 일이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사회 속에서 직장 동료, 행인 그리고 심지어는 교인도 이웃이 아닐 수 있다. 이웃은 사회학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웃의 사회학은 존재하기 어렵다. 이웃이 되는 사람은 이웃의 고난에 대하여 사랑으로 반응하는 사람이다. 사회적 인간은 조직이 해체되거나 직분이 정지되면 소원하거나 무관한 관계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웃은 행동한다. 제사장이나 레위인 그리고 행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쳐가는 다분히 제도적 의무에 매인 인간일 수 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돕지 않은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바쁠 뿐 아니라 죽은 사람, 혹 죽어가는 사람을 만지면 부정해지기 때문에, 직업적으로 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고, 시간과 물질을 투여할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책임 있는 자처럼 행동한다. 이웃은 사회학적인 인간 이상이며, 사회적 기구나 제도나 파일 정리를 통한 행정적 우회를 요구하지 않는 직접적인 만남을 가지는 ‘사랑하는 자’이다.
3. 이웃 사랑의 극치, 황금률과 원수 사랑
이웃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을 이루는 방법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 사랑의 범위를 정해 놓고 행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발적 봉사의 행동이다.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에 대한 강조와 해석은 마태의 산상설교(마 5-7장)와 누가의 평지설교(눅 6:17-49)에서 발견된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는 팔복(八福, Beatitudes)에 대한 선언에 이어 구약을 재해석하시는 가운데, 원수 사랑의 명령을 마태 5장 43-48절에서,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6장 14-15절에서, 황금률(the golden rule)에 대한 가르침을 7장 12절에서 가르치신다. 누가의 평지수훈은 마태복음보다는 비교적 짧지만, 많은 유사점을 가진다. 그중 마태복음에서 언급한 아가페적 사랑의 말씀은 누가의 평지수훈 6장 17-49절 속에서 한 부분 27-38로 집약되어 있다. 누가는 원수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중(6:27-36)에 황금률(6:31)을 소개하며, 용서에 대한 말씀은 뒤에 소개하였다(6:37-38). 용서의 말씀을 제외한 27-36절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6:27-30 완벽한 원수 사랑.
미운자, 저주하는 자, 모욕하는 자, 뺨을 치는 자,
겉옷을 빼앗는 자, 구하는 자와 가져가는 자.
6:31 황금률: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6:32-34 칭찬받을 만한 원수 사랑.
대조적인 사랑, 죄인들보다 뛰어난 사랑.
댓가를 구하지 않는 사랑. 원수 사랑과 선대.
6:35-36 결론: 원수 사랑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다.
너희의 상이 크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라.
아버지의 자비로움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예수님의 설교 중에서 그러므로 이웃 사랑의 명령은 원수 사랑과 황금률로 구체화된다.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은 산상수훈과 평지수훈 속에서 원수 사랑과 황금률로 다시금 소개되고 있는데, 마태복음 22장 40절과 마태복음 7장 12절의 공통된 공통분모 “율법과 선지자”의 명령이라는 예수님의 강조가 이 두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같은 정신에 해당함을, 즉 이웃 사랑과 황금률이 공통적으로 구약의 핵심이라는 판단이 가능해진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9-40)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예수에 의하면, 마태복음 22장 사랑의 이중 계명이나 마태복음 7장 황금률이 똑같이 구약을 대표하는 공통된 정신이다. 더욱이 마태 7장 12절의 황금률은 누가의 황금률과 내용이 같은데, 누가의 황금률은 원수 사랑의 맥락 속에 있다. 따라서 사랑의 이중 계명이나 황금률은 구약의 요약일뿐 아니라, 사랑의 계명이 황금률과 원수 사랑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원수 사랑을 실천하는 기본적인 마음의 상태는 누가복음 6장 27-36절의 명령 중앙에 있는 황금률로 집약된다. 이는 기독교윤리의 핵심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이웃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과 이어져 있다. 이웃 사랑은 곧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는 황금률의 정신과 바로 맞닿아 있다. 황금률은 타인의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이웃에게 대접하라는 것이다. 황금률에서 보여주는 이웃 사랑은 그러므로 나에 대한 사랑과 닿아있음으로, 나와 남의 차별과 구별을 철폐하는 정신, 곧 기본적으로 공동체의 정신과 닿아있다. 그것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실천하여 나와 이웃의 차별을 허무는 사랑이다(요 1:12).
황금률은 그러므로 이웃 사랑의 심오한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특성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첫째, 황금률은 이웃 사랑을 통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함을 지향한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를 이해하는 것과 마음의 공감을 바탕으로 하여 시작된다. 이는 대가를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한다는 정신이다. 이것은 당사자 사이의 상호관계와 호혜 정신(reciprocity)을 부여하고, 이웃을 위한 관심과 배려(consideration), 이웃을 향한 관대함(hospitality)과 풍성함(superabundance)을 실천하려는 것이다. 이전의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마 5:43-44. 비교, 레 19:18) 윤리와는 다른 새로운 아가페 윤리를 제시한다. 그 결과 황금률을 통하여 구체화된 이웃 사랑은 더 나아가 아가페적 공동체의 형성에 이르게 된다. 아가페 사랑은 인간관계를 회복시키는데, 깨어졌던 관계가 사랑의 연대성(solidarity)을 가진 자발적 공동체(community) 혹은 공영체(commonwealth)인 교회를 형성한다. 사랑의 끝에는 그러므로 나눌 수 없는 공동체 교회가 보인다.
황금률은 둘째 새로운 종류의 경제, 즉 “선물경제”(the economy of the gift) 라는 새로운 사고의 틀을 제시함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심는 대로 거두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소망을 준다. 우리는 시장경제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현대의 시장경제는 기본적으로 교환경제이며, 이 교환은 직접적인 물물교환이나 화폐를 매개로 하는 매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에수께서 가르쳐주시는 “선물경제”는 시장경제의 기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장경제의 한계를 치유한다. 선물경제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고받는 경제이며, 내가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행하는 ‘경제’ 행위이다. 이 놀라운 황금률의 ‘비경제적 경제’는 우리에게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것의 실행은 성경에 실려있는 엄청난 하나님의 은총 속에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해방은 선물이지, 교환이 아니다. 우리가 얻은 칭의는 교환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물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우리에게 주신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좋았던 우리를 향한 선물이다. 에덴도 선물, 홍수 이후의 화석연료도 선물, 각종 과일과 곡식과 아름다운 환경도 선물이다. 황금률은 그러므로 이러한 선물을 받은 사람이 구체적 삶의 정황에서 선물을 다시 되돌려 주변에서 필요를 느끼는 대상에게 줄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결국 황금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추구하는 이웃 사랑이다. 황금률을 통하여 이웃 사랑은 극단적 적용인 원수 사랑과 맞닿을 정도로 확장된다. 원수에게까지 확장된 이웃 사랑은 미워하는 자, 저주하는 자, 모욕하는 자, 뺨을 치는 자, 겉옷을 빼앗는 자와 무엇을 구하거나 가져가는 자에게까지 확장된다. 아울러 원수에게까지 사랑을 베푸는 행위는 이 세상의 죄인들보다 훨씬 탁월한 사랑, 칭찬 들을 만한 사랑이라고 예수께서 설명하신다. 이러한 사랑의 특징은 하나님의 아가페를 경험한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다. 이 명령을 관통하는 정신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닮으라(눅 6:36)는 명령이다. 이웃 사랑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닮으라는 것이며, 이러한 아가페는 결국 하나님의 사랑의 차원,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부하고 저주하며 악을 악으로 갚으려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다. 원수 사랑의 계명은 “악을 선으로 갚는 차원,” “선으로 악을 이기는 차원”의 신앙을 요청한다(마 5:43, 롬 12:20-21).
리쾨르에 의하면 원수 사랑의 윤리는 일반적인 윤리의 범위를 넘어서는 “초윤리적”(hyperethical) 행위이며 “새로운” 계명(the new commandment)이다. 이는 하나님을 따르는 순종의 윤리이자, 모방의 윤리이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원수 사랑의 모범은 하나님에게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인 우리는 예수의 피로 그 빚 곧 죄를 탕감받았으므로, 아가페를 실천함이 마땅하다. 복음을 믿을 때 우리 가운데 오신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아가페의 사랑을 이루며 우리를 강권한다. 성령님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게”(엡 4:15) 한다. 성령님은 별수 없는 우리 인간성 속에 김대건 신부와 손양원 목사의 원수 사랑의 인격, 곧 아가페적 인격을 창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