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Photo : 기독일보) ’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평양의 봉수교회와 칠골교회의 설립 계기는 매우 다르다. 칠골교회는 김일성과 그의 모친 강반석과 그의 친정 지계들이(강돈욱. 강양욱) 개척했고 섬겼던 교회였기에 김일성이 말년에 그 교회 자리를 찾아내어 재건시킨 교회였지만, 봉수교회는 1989년 '세계학생청년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외국인들에게 보이기 위해 세워진 정치적 목적을 갖고 세워진 교회였다.

이교회는 평양의 가장 상징적 교회로서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1907년의 장대현교회(사무엘 마펫)가 1938년 신사참배를 거절하고 폐교함으로 사라진 후, 지상에 나타난 최초의 교회로 볼 수 있다. 북한 공산정권은 대외적으로 북한에도 신앙의 자유가 있음을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관제 어용교회인 봉수교회를 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2천 년대 들어서면서 북한과 한국과 관계가 화해 시대가 되자 한국교회는 낙후되어 버린 봉수교회 건물을 약 6백만 불의 건축비를 지원하여 크게 재건축 하였다. 그러나 이 교회는 철저히 관제화 되고 대외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교회였기에 흔히 가짜 교회로 인식되었다. 이 교회의 모든 기물들은 한국교회와 해외 동포 교회의 헌물로 채워졌고, 종종 미주 한인교회 목사님들이 방문 시에 설교하도록 허락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그 교회를 통해서도 구원의 역사와 회심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의문을 가져보게 된다.

이 교회에 대해 2016년 탈북해 한국에 온 태영호 영국 공사관 출신인 그가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본인이 평양에서 직간접적으로 들은 봉수교회 이야기를 <태영호 증언 3층 서기실의 암호>라는 책에서 이같이 증언하였다.

"1988년을 고비로 평양에는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이 건설되었다. 좋게 말하면 한국의 반정부 종교 단체들과의 교류를 확대하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교회나 성당을 평양에만 세우고 지방에는 짓지 않는 이유가 있다. 원래는 원산이나 강계 등 지방 주요 도시에 종교 시설을 건설하려던 계획이 있었지만, 결국은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관리가 안되기 때문이었다. 북한에서 교회가 있으려면 목회자와 가짜 교인이 있어야 한다. 목회자는 당이 양성한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을 세울 수 있지만, 가짜 교인은 교통 관계상 교회의 주변 사람들 가운데서 선발하여야 했다.

그래서 봉수교회와 장충성당 근처에 거주하는 간부 부인들 중 '빨갱이 여성들' 200명을 뽑았다. 진짜 교인이 생길 요소를 미리 제거했다. 이들이 주일에 참여하는 데에는 참석률이 낮자 출석부를 만들어 감시하였다. 출석이 저조한 사람들은 총화에서 비판을 받아야 했다. 이들을 대상으로 특별 사상 교육도 시켰다. 그들이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 이유를 "교회나 성당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단순한 활동이 아니라,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투쟁 활동이다. 미제와의 반미 성전에 떨쳐나선 남조선 종교계 인사들을 쟁취하기 위한 , 그리고 조국의 통일을 위한 숭고한 투쟁이다."

그럼에도 출석률이 나아지지 않았지만, 약 2년이 지나면서 출석률이 높아졌다. 이들은 교회에 나와 함께 찬송부르고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듣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믿음이 생기면서 교회 분위기도 달라졌다. 어느 열심 교인은 예배 두 시간 전에 나와 찬송하고 말씀을 보고, 기도하는 열성분자들이 생긴 것이었다. ... 더 놀라운 일이 목격되었다. 교회에서 찬송가가 들려 오면 청년 몇 명이 나타나 교회 담장에 기대어 무언가를 열심히 적는 것이었다. 보위부가 그들을 체포하였다. 놀랍게도 평양음악대학교 작곡반 학생들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찬송가를 들은 그 학생이 음대 친구들에게 알렸지만 예배당에 들어 갈수 없자, 친구들은 교회 담장에서 찬송가의 곡조를 채보하였던 것이다. 그 학생들은 경고를 받고 풀려났다.

그 다음 목격된 사례도 당으로서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그 옆길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배 시간 11시에 교회 근처에 수백 명이 나타나 교회를 바라보며 눈을 감고 있었다. 12시에 예배가 마쳐지면 모두 사라졌다. 보위부가 이들 일부를 잡아 조사해 보니 기독신자들이었다. 김일성은 조선에는 더 이상 기독교인들이 없다고 확신했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조사를 받은 어느 노령의 신자는 이같이 고백했다.

"당신은 예수를 믿는가?"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비록 내가 교회 들어가서 예배를 보지 못하더라도, 찬송은 못 부르더라도 내가 교회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합니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저는 평양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40년 이상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울면서 말한 여인은 성분 좋은 간부의 부인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북한의 체제를 대외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세운 관제 교회에도 구원의 역사를 나타내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