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면서 채움보다 비움이 생각처럼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선교지에 머물며 사역을 하다가, 때로 기내 가방 하나만을 달랑 들고 고국이나 미국을 오갈 때가 있다. 그 작은 가방 하나에 담긴 물건조차 채 다 꺼내 써보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가져올 때면, 짐을 풀며 잠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곤 한다. 인간의 소유욕이란 이토록 끈질기며, 정작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 때문이다.

2006년 처음 니카라과 땅을 밟은 이후 참으로 먼 길을 걸어왔다. 싼 베니또 빈민촌부터 마나과의 쓰레기장 마을 비야 과달루뻬, 카리브해 블루필드의 외딴섬들(뿌에르또 엘 불룻, 라마 카이 부족 공동체)을 품고 쉼 없이 내달렸다. 그 발걸음은 국경을 흐르는 라오 강의 와슬라와 비스무나, 1502년 콜럼버스가 닻을 내렸던 역사의 현장 카보 그라시아스 아 디오스를 거쳐, 북동쪽 끝 망망대해 위 카요 미스키토 군도의 인디언 수상 가옥 마을까지 이어졌다. 이제 온몸으로 부딪혀 온 그 20년의 삶과 선교 여정을 조용히 내려놓고 마무리할 시간이다.

출국이 불과 스무 날 밖에 남지 않은 지금, 집 안에 놓인 많은 책과 서재 도구, 살림살이와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업은 결코 녹록지 않다. 생각처럼 시원하게 버려지지가 않는 것은, 필시 갖고 있는 물건을 쉽게 놓지 못하는 나의 해묵은 습관 때문일 것이다. 작은방 구석에서 과감히 버리겠다고 밖으로 꺼내 놓았던 물건들을 빤히 바라보다가, 어느새 나는 그것들의 공간 위치만 슬쩍 바꾼 채 다시 집 안쪽으로 들여놓고 있다. 이 작은 미련 하나 끊어내지 못하는 연약한 본성을 마주하며, 전적 타락과 무능력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다시금 묵상하게 된다.

 나의 작은 '비움'이 진행되는 이 시공간 너머로, 내 삶의 가장 거대한 '떠남'의 소식이 교차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98세의 어머님. 벌써 두 주째 음식 섭취를 전혀 하지 못하고 계신다. 형제들이 모인 단체 채팅방에는 숨 가쁘게 어머님의 실시간 상태가 사진과 동영상으로 올라온다.

형제들의 무거운 마음이 담긴 문자 메시지가 쉴 새 없이 오간다. 조금이라도 기력이 남아 있으실 때 며느리들과 손주들, 친척들에게 긴급히 연락을 취해 어머님을 뵈러 오게 하고, 한편으로는 조심스레 수의와 장례 절차를 의논한다. 그리고 어머님께서 생전에 마지막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에 대한 무거운 대화들이 이어진다.

'어머님, "언제 오냐, 보고 싶다" 늘 말씀하시던 이 셋째 아들이 서른 날만 지나면 고국으로 돌아가 어머님 곁에 서게 될 텐데, 부디 그때까지만이라도 버텨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타국에서 짐을 싸며 속으로 수없이 삼켜내는 애달픈 부르짖음이 가슴을 친다. 하지만 어머님의 남은 호흡과 영혼마저도 이제는 온전히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손길에 맡겨드려야 할 때인 것이다. 나의 비움과 떠남이 맞물린 이 시점에, 어머님의 이 세상에서의 시간, 떠남도 함께 찾아왔다.

이곳 니카라과에서의 비움과 떠남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사용하던 낡은 물건들을 버리고 육신의 거처를 옮기는 일일 뿐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의 준비도 결국 이와 같을 것이다. 욥이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욥 1:21)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이 세상의 그 어떤 귀한 물건이라도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결국 모두 내려놓고 비워야만 한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옛말처럼, 진정한 비움 없이는 온전한 떠남이 불가능하다. 이처럼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떠남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던지는 '맡김'뿐이다. 이는 마치 물속에서 생존하는 이치와 같다.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하는 내게 가장 필요한 첫 번째 원칙은, 몸에 들어간 힘을 빼고 물의 부력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머리로는 이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만, 막상 물에 들어가면 살겠다는 발버둥으로 잔뜩 힘을 주며 고개를 쳐들게 되고, 결국 그 힘 때문에 더 깊은 물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오래전, 경북 후포항에서 울릉도까지 긴 시간 배를 타고 일행들과 함께 간 적이 있다. 파도가 거세게 치며 배가 요동치자, 나도 모르게 온몸에 바짝 힘을 주게 되었다. 긴장과 불안 속에 몸을 경직시키니 편안한 여행은커녕, 나와 같은 승객들 대부분이 심한 구토와 멀미로 고통스러워했다. 그때 옆에 계시던 연륜 있는 한 선배님이 넌지시 조언하셨다.

"파도와 거스르거나 싸우려 하지 말고, 그냥 파도에 몸을 맡기게나."

믿음과 생활의 원리도 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신앙이란 내가 무엇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나를 내어 맡기는 데서 비롯된다. 내가 평소에 '즐거운 신앙생활, 행복한 선교'를 입버릇처럼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의 명예나 물질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이 작은 물건 하나 제대로 버리지 못해 밖으로 꺼냈다 안으로 들였다를 반복하는 내 모습을 보며, 세상과 물질에 대한 그 '가벼움'의 고백이 얼마나 피상적이었는지 철저한 부족함과 연약함을 마주하게 된다. 비움과 떠남,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의 철저한 맡김을 통과할 때에야 비로소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즐거운 삶, 행복한 선교와 목회가 완성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되돌아본다.

평소 그림을 무척 좋아했던 터라, 지난 세월 현지 사람들과 지인들로부터 선물 받은 그림들을 거실 벽면 가득 걸어두고 바라보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이제 짐을 정리하며 그 벽에 걸려 있던 그림들이 모두 떠났고, 그 자리는 비워졌다. 처음 빈 벽을 보았을 때는 허전함이 밀려왔으나, 이내 그 텅 빈 공간이 주는 기묘한 평안을 느낀다. 채워야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비워낼 때 비로소 드러나는 여백의 아름다움이 삶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눅 9:3)고 명하셨다. 나는 평소 이 말씀처럼 두 벌 옷과 두 켤레의 신발을 소유하지 않는 '가벼운 나그네'의 마음으로 살아가려 다짐해 왔다. 하지만 짐 정리를 하며 쏟아져 나온 물건들 앞에서, 나 역시 무소유의 흉내만 내었을 뿐 여전히 너무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살아왔음을 회개하게 된다.

20년 전, 화물 가방 두 개와 기내 가방 하나를 꽉꽉 채워 들고 이 뜨거운 태양의 땅 니카라과에 첫발을 디뎠다. '현지인 중심의 자립 선교'를 외치며 달려온 시간,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도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했지만, 이마저도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가방 하나씩만 간소하게 챙겨 들고 고국행 비행기에 오르려 한다.

가벼워진 짐가방의 무게만큼이나 내 영혼도 세상의 찌꺼기를 털어내고 가벼워지기를 소망한다. '선교가 삶이고 삶이 곧 선교'라는 고백은, 결국 나의 욕심을 비우고, 익숙한 것들로부터 과감히 떠나며, 앞으로 펼쳐질 고국에서의 소외된 이들과 265만 이주민을 위한 새로운 복음 선교의 여정을 하나님의 섭리에 온전히 내어 맡길 때 완성될 것이다. 비워진 벽처럼, 가벼워진 가방처럼, 오직 성령의 채우심만을 기대하며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간다.
구름 낀 하늘에 바람이 불고 가랑비가 흩뿌리더니, 먹구름은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다.

글: 니카라과에서 김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