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트하우스선교회 대표 박광철 목사
(Photo : 기독일보) 솔트하우스선교회 대표 박광철 목사

1)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한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 5:14). 무엇이 단단한 음식인가? 음식으로 말한다면 몸에는 좋은 것이지만 먹기에 불편하거나 힘들고 어린 아이들은 원하지 않는 종류일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음식 가운데 시금치와 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확실히 건강에 좋은 것이지만 특별한 향이 있고 별로 맛이 없기 때문에 거절하는 것이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이 있듯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주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거나 손해를 보며 힘겨운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곧 단단한 음식일 것이다. 성경 말씀의 깊은 것을 깨달으며 주님을 위하여 자신을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이 곧 "단단한 음식"에 해당될 것이다. 또한 주의 복음을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것이다 (히 11:4).

그렇게 단단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지각을 사용할 줄 안다. 즉 사물에 대한 판단력과 분별력이 확실하여 선과 악을 잘 분별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세대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온통 혼합되어 있다. 그래서 다수가 인정하는 것이 선이고 진리라거나 자신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곧 선이라는 독선도 많다. 그러다 보면 절대적인 의미의 선과 악의 구분이 흐려지고 진리와 비진리의 구별이 어려워진다. 종교 다원주의나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하는 사상은 현대인들로 하여금 참된 진리에 대한 확신을 빼앗아가고 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시대와 문화와 지역에 따라서 천차만별인 선악의 구분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에 근거하여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다. 사실 그러한 분별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예를 들어서 나라와 종족에 따라서 선과 악의 기준이 전혀 다를 수 있다. 쉬운 사례로 서구 나라의 속국으로 오랫동안 지낸 중남미의 어느 나라에서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결코 죄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도 "미안하다"거나 또한 "내가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럴까? 남의 나라의 속국이 되어 노예로 살던 그들은 주인에게 "미안하다"거나 "내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주인의 손에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을 때라도 한사코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지 않고 여러 가지의 변명을 말하는 것이 일종의 관습이 되었다는 것이다.

신학 대학에서 학생들을 교수할 때에 선교사 희망생들을 모아서 학내에서 일정한 기간에 걸쳐 신앙 훈련을 하고 선교지 현지 답사와 단기 선교를 간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 가운데 타이완에 갔을 때의 일을 기억한다. 그곳 사람들의 관습 중에는 외부 손님에게는 결코 상대방을 불편하게 할 수 있는 "아니오"라는 거절의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용납하기 싫어도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고 단순히 "네"라고 답변한다는 것이 손님에게 대한 예절이라는 것이다. 동료와 함께 어느 집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 다음 주일에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놀랍게도 거절하지 않고 "네, 네"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다음 주일에 교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예의상 "네"라고 말한 것이지 그것이 진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이런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여 상대방이 "신앙적 결단"을 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변하고 상황에 따라 다른 판단 기준인 세상에서 어떻게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영원히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24:35). 성경의 표현법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했으며 앞으로도 또 변하겠지만 그 원래의 의미와 핵심 내용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의 말씀에 견고한 자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다.

2) 하나님의 뜻에 순복한다.

기본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는 하나님이 뜻에 순복한다. 믿음과 가장 가까운 단어가 순종이라는 말에 의미가 깊다. 성경을 통해서도 진정으로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기만 하면 그대로 순종했다. 그 가운데 믿음의 영웅 몇 사람만 고려해 보자.

우선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라. 그가 처음부터 영적으로 성숙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지는 판단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가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주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가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는 진정으로 믿음의 사람인 것이 드러났다. 그리고 믿음이 깊어짐에 따라 100 세에 기적적으로 얻은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결단까지 했다. 그도 순식간에 신앙이 성숙한 믿음의 영웅이 된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의 시련과 의심과 갈등을 겪으면서 주의 말씀의 능력을 인정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늙은 그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웃지 않았는가? 그 웃음은 일종의 불신의 웃음이었다. 그의 아내 사래도 천사의 말을 듣고 천막 뒤에서 속으로 웃었다. 그런 가슴 아픈 과정을 통해서 그는 믿음이 성숙했으며 결국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가장 복 받는 길인 것을 깨닫는 사람이 되었다.

요셉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가 형들의 시기 때문에 청소년 시절에 낯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그가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은 것도 아닌데 애굽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고 고난을 당한 것도 하나님의 뜻인가? 그런데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는 중간에 어느 시점을 보고 결론을 내리지 않아야 한다. 결말을 봐야 한다.

마치 멋진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색채와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고 "왜 그런 색을 씁니까?"라거나 "무얼 그리는지 알 수가 없군요"라고 말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화가의 머리 속에는 이미 그림 전체가 들어 있기 때문에 부분 부분을 그릴 때에는 아무도 어떤 작품이 될지 알 수가 없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에도 결말을 보기 전까지는 그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많은 고난과 위험한 상황을 통과하고 애굽의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 요셉은 지난 날의 모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과정이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어느 날 그를 찾아온 형들을 보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 45:5). 요셉이 그 동안 말없이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인 것을 스스로 확인한 것이다.

모세의 경우를 보라. 그는 애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무술과 학문에 뛰어났다 (행 7:22). 그러나 자신의 동족인 히브리 백성의 고난을 보면서 의협심에 불타서 결국 살인을 저질렀다. 그는 애굽을 떠나 멀리 미디안 광야에서 지내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고 있는 자기 백성을 구하라는 엄청난 명령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이 언변이 없고 그런 큰 일을 할 능력이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모세야,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서 80 세의 나이에 지팡이 한 개를 들고 애굽에 내려갔다. 그것은 경험과 실력을 믿은 자신감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이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비록 하나님의 명령이 이해가 되지 않거나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굴복하여 주의 뜻을 성취하는 사람이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는 다메섹에 가는 길에서 극적으로 회심한 후에 불타는 열정으로 예수의 복음을 전했다. 그는 과거 유대교에 속해 있을 때에 교회를 극렬하게 박해하던 것 이상으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했는데 스스로 계획을 세우기보다 하나님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는가에 집중했다. 그가 에베소를 떠나면서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행 18:21). 즉 그는 성령께서 막으시는 길이라면 억지로 가려고 하지 않았고 반면에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이라면 고난이 있어도 끝까지 주를 신뢰할 수 있었다.

사도 야고보도 영적으로 성숙하여 무슨 일이든지 함부로 하지 않았다. 늘 주의 뜻에 마음을 둔 것이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약 4:13-14). 살고 죽는 것이 모두 주의 뜻에 따라 되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왜냐 하면 우리의 인생이 잠깐 보이다가 속절없이 사라지는 안개와 같기 때문이다 (약 4:14).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둔 때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인간 예수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십자가 처형을 바라보신 것이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그런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싶지 않으셨지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결국 자신의 소원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것이다. 참으로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계획과 꿈을 이루려고 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