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제 24회 '서울올림픽'은 동서 '냉전시대'에서 '탈냉전시대'의 전환되는 징조와 계기를 제공하였다. 특히 냉전 시대의 상징인 분단국 한반도에서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의 160개의 국가들이 참여함으로 화합의 한 마당을 이루었다. 이는 선교사적인 관점으로 볼 때에 매우 의미있는 세계적인 지구촌의 축제의 한 마당이었다. 한국인들은 세계로 나아 갈수 있는 세계 속의 한국인이 되었고, 한국 교회는 이로 인하여 공산권과 회교권을 비롯한 세계 각국으로 선교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북한은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인의 올림픽 축제를 방해하고 맞서기 위해 1989년에 제 13차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여 177개국의 청년들이 평양에 모여 세계평화축전을 거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북한도 건국 이래 가장 큰 국제 행사를 치렀다. 결과적으로 북한도 세계 속의 나라인 것을 드러내었고, 북한 정권은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1988년에 평양 봉수교회와 평양 장충성당을 건립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1989년에는 칠골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해외에서 1만 달러의 헌금을 모아서 1992년에 헌당하였다. 칠골 교회는 김일성이가 어린 시절 그의 모친 강반석과 같이 교회를 다녔었다. 그 사실은 김일성의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 책에서 김일성 자신이 고백하였다. 이 교회는 김일성의 외조부 강돈욱이 해방 전에 개척한 교회였고 칠골은 김일성의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는 곳이었다. 김일성은 자신이 다녔던 그 교회 위치를 찾아내어 그 자리에 건축하도록 함으로 헌당되게 된 것이다.
1994년에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평양을 방문하여 칠골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북한 정권은 교회를 대외적 창구로 적극 활용하였고 이러한 종교 정책의 변화는 북한 지하 성도들에게도 새로운 의욕과 자극을 주었으며,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종교 제한을 완화시켰다. 이러한 대외적 종교의 새로운 흐름에 지하성도들은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분명한 사실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는 북한 정권의 폐쇄적 대외 종교 정책 외에도 다방면으로 변화와 자극을 주었으며 북한 일반 주민들에게도 세계적 큰 행사로 새로운 각성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김일성은 1989년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 이후 더욱 적극적인 대외 정책의 일환으로 해외 한인 목사들과 세계 기독교 단체들을 초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북한의 전반적인 종교의 자유를 합법적으로 허용한 것이 아니라, 대외적으로 전략적 변화를 추구한 것에 불과하며, 북한의 일반 주민들이나 지하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자유를 합법적으로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 대한 실례로서 노동당에서 지정한 교인들만 평양의 봉수교회나 칠골교회 교인이 될 수 있었을 뿐, 그 외 일반 주민들은 접근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 교회의 찬양대도 정부로부터 선발된 평양 음대 성악부 출신들이었다.
북한의 종교에 대한 대외적 변화는 지속되었다. 1990년 4월 조선 기독교도연맹은 '세계성서공회연합회'의 협력으로 1만권의 성경책과 찬송가를 홍콩에서 인쇄, 발행하였다. 이는 일반 개인의 사용 목적이 아니라 제한된 공적 예배인 칠골교회와 봉수교회에서만 공용으로 사용되는 것으로서 그 교회 성도들은 그 성경책을 개인적으로 소지할 수도 없었다.
1992년 4월에는 종교 활동에 관한 헌법이 개정되었다. 개정 내용에는 종교 선전을 불법화했던 조항을 삭제하고 종교 선전의 자유를 허용할 것과 종교적 목적을 위한 건축을 허락하며 종교 활동을 허용할 것을 추가했다. 이 헌법 개정은 김일성에 의해 이루어진 종교 정책의 변화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또 다른 목적은 북한에 종교의 자유를 합법화 하는 법 조항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북한 인권과 관련된 국제적 비판을 모면키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에게는 이러한 변화가 매우 희망을 주는 징조로 받아들여졌고 언젠가는 북한에도 종교의 자유가 중국처럼 개방 정책으로 이어져 신앙의 자유가 합법적으로 보장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갖게 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