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수 서울신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Photo : 기독일보) 박명수 서울신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 9월 2일 대동강변에서 평양군민들의 공격을 받고, 불에 타 버렸다. 이 때 토마스선교사도 순교하였다. 약 한 달이 지난 다음에 중국 지푸의 미국영사 샌포드에게 이 소식이 들려왔고,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가 왜 공격받았는가? 선원은 어떻게 죽었는가? 혹시 생존자는 있는가? 알고자 하였다.

미국은 1867년 1월 아사아함대의 슈펠트 함장(와츄세트호)을 보내 이 사건을 조사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여기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양감사 박규수는 분명히 미국이 다시 올 것이며, 그때를 위해서 소위 "의답조회"를 작성하고, 동일한 대답을 하도록 했다. 이 문서는 조선정부가 미국에 전달한 이 사건에 관한 유일한 공식문서였다. 그러면 이 문서는 얼마나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박규수는 "의답조회"에서 제너럴 셔먼호가 처음부터 조선인들에게 난폭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초기에 제너럴 셔먼호와 조선인 사이에 심각한 갈등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배에 몰려와서 이양선을 구경하고, 서로 물건을 매매하기도 했다. 토마스는 이들에게 과자와 성경을 나누어주었다.

제너럴 셔먼호와 조선측이 충돌한 이유는 중군(中軍, 일종의 지역사령관) 이현익이 납치되었기 때문이다. "의답조회"는 이현익이 제너럴 셔먼호과 조선인의 마찰을 막고자 배를 타고 감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너럴 셔먼호가 이현익을 납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현익의 구술을 기록한 "패강록"을 보면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측이 자신들을 유인하여 상륙시킨 다음에 섬멸하려한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을 막기 위해서 이현익을 납치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연구했던 게일선교사도 먼저 조선측이 공격을 해왔기 때문에 제너럴 셔먼호가 이현익을 납치했다고 본다.

또한 "의답조회"는 평양군민이 이현익을 구출하기 위해서 땔나무에 불을 붙여 제너럴 셔만호를 공격하니 배에 저장된 폭약이 굉음을 내며 폭발하였고, 사람은 다 죽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부의 공식문서인 "평양감영계록"에도 배가 불타고 있을 때, 토마스와 중국인 조능봉이 배에서 나와서 살려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군민에 의해서 살해당했다고 기록되었다. 1884년 평양에 가서 이 사건을 조사한 미국공사관 무관 버나돈은 토마스는 평양 감영에 끌려갔으며, 이곳에서 중국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으나 평양감사는 이것을 무시해 버리고, 처형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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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또 다른 문제는 생존자 여부이다. 제너럴 셔먼호를 조선에 보낸 메도우사에 의하면 이 배에는 24명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측은 죽은 사람은 모두 20명이라고 밝혔다. 그러면 나머지 4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미국은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약 20년 이상을 청과 조선 사이의 밀무역에 종사하였고, 지푸의 외국인들과 잘 아는 중국인 우문태가 1867년 여름 평양에 갔을 때, 오래동안 알고 있던 조선상인 김자평(金子平)으로부터 평양에서 서양인 2명과 중국인 2명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 이 소식은 북경의 외교가를 뒤흔들어 놓았다.

1868년 봄 미국은 페비거 함장(셰난도어호)를 조선에 파송해서 우문태의 말이 사실인가를 확인하고자 했다. 조선측은 여기에 대해서 자신들은 김대청(金大靑)은 알아도 김자평은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김대청은 1867년 초 슈펠트가 조선에 왔을 때, 함께 와서 장연 육도에서 우문태를 만난 적이 있었다. 조선측은 이 김대청을 우문태에게 생존설을 말한 김대평이라고 간주(?)하고 체포하여 미국측과 함께 심문했다. 조선측은 김대청에게 우문태를 만난 적이 있냐고 물었고,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우문태에게 서양인 2명과 중국인 2명의 생존설을 말했는가를 물었고, 김대청은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조선정부는 미국측에게 우문태의 주장은 거짓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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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해서 미국측은 김대청에게 언제 우문태를 만났는가 물었다. 그는 1867년 초라고 답했다. 우문태가 김자평을 만난 것은 1867년 여름이었다. 만난 날짜가 다른 것이다. 또 미국측은 김대청에게 주소와 직업을 물었다. 그는 장연 육도에 사는 어부라고 했다. 하지만 김대평은 작도에 사는 상인이었다. 미국측은 조선측이 데리고 온 사람은 김자평이 아니라 김대청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측은 김대청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황해감사는 대원군의 명령으로 세난도어가 정박해 있는 바다 앞에서 김대청을 효수해 버렸다. 이런 사건을 본 셰난도어호 선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페비거는 조선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고 보고하였다.

제너럴 셔먼호의 진상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기록을 면밀하게 살펴본다면 우리는 좀 더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한미수교 14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기독교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실체를 밝혀 한미관계의 첫 단추를 바로 채우고, 한국개신교의 시작을 바로 알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