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Photo : 기독일보) ’북한교회사’ 저자 강석진목사

6.25전쟁이 발발한지 4개월 만인 10월 하순에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마침내 수복하였다. 그동안 공산 치하에 있었던 이북 지역의 모든 교회들은 다시 신앙의 자유를 되찾게 되어 다시 제 2의 해방을 맞이한 것 같은 감격을 맞이했다. 약 5년의 공산 치하에서 김일성의 통치에 지지와 협조하지 않는 교회들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철저히 공산 정권하에서 연명하듯 교회를 유지해왔던 교회들이 유엔군이 이북 지역을 점령하자 비로소 온전한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평양이 수복되자 가장 먼저 그곳에 도착한 선교사들 중에는 지난 날 평양의 첫 선교사 사무엘 오스틴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의 아들 하워드 마펫 선교사(전쟁 후에 장신대 교수, 프린스턴 신학대 교수 역임)였다. 그다음 날에는 평양에서 선교 활동하였던 다른 선교사들(Edward Adams, Hary Hill, Arch Campello, Kinlser 등)과 평양에서 목회하였다가 공산화로 인해 남으로 왔던 목사들인 이민식, 김양선, 유호준 등이 도착하였다.

며칠 후에는 장로교회 교단 총회 임원과 이북 성도 대표회 임원들이 철도를 따라 황해도 각 교회를 시찰하며 평양에 도착하였다. 이 가운데서 군복을 입고 평양에 도착한 황은균 목사(동평양교회,평양신학교 32기)가 가장 돋보였다. 그는 평양시청 광장에서 이승만 대통령 환영 시민대회를 열어 그 단상에서 공산주의 비판에 기염을 토했는데, 그의 탁월한 웅변에 군중들은 매료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모란봉 극장에서 공산주의 비판 이론가로 명성을 떨쳤다.

평양 시내 모든 교회들이 다시 문을 열었다. 전쟁을 전후해서 많은 목회자들이 희생되었기에 교회를 맡을 목회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여러 교회들이 연합하여 청소년면려회를 조직했고, YMCA 재건, 평양연합찬양대의 조직, 신학교 개교, 영어 성경 강습소 개강 등 기독교 기관들을 재건하였다. 그동안 억눌렸던 교회 활동이 한꺼번에 분출되었다. 평양은 빠른 속도로 공산화되기 전의 모습으로 활기를 되찾아 갔다.

감리교 측에서는 박대선, 김용옥, 한승호 목사가 그동안 굳게 닫혔던 학교의 문을 다시 열었다. 남산현에 있는 감리교 소속 광성고등학교, 성화신학교, 요한학교 등을 개교하고자 했다. 순식간에 청년들 500여 명이 영어를 배우겠다고 몰려들었다. 감리교 성화신학교 선생들은 열정과 정성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지도했다. 이는 제2의 해방과도 같은 사회 분위기로 고조되었다.

한편 평양의 장로교회는 10월 29일(주일) 오후 2시 '서문밖교회'에서 대중 집회를 열었다. 일찍부터 너무 많은 교인들이 모여들어 예배당 안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많은 교인들은 창문을 통해 강단에서 말씀 선포하는 것을 들었다. 김영준 목사가 예배를 인도했고 신의주 제일교회를 담임했던 한경직 목사가 구약 이사야서 60장 1절로 "일어나 빛을 발하라"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다. 이어서 온 회중이 다 함께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찬송했다.

광고 시간에는 미군 군목이 보켈(Voelker)목사가 지프차에 성경을 한가득 싣고 왔으니 필요한 사람들은 구입하도록 알렸는데, 회중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1945년 8.15 해방 이후 지금까지 성경을 구입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평양을 탈환하고 나서 평양의 교회는 참 자유가 왔다는 기쁨 속에서 지냈다. 이들은 교회 재건과 부흥 운동을 추진했다. 기독교인들은 국군과 유엔군이 조만간에 이북 전역을 공산당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11월 초순에는 서울 종로 양재순 장로 집에서 교회 지도자 약 60여 명이 모여 이북 교회의 재건 방안을 논의하였다. 지금부터 당장 재건 부흥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기로 하고, 그 자리에서 참석자들이 헌금을 작정했다.

또한 11월24일에 모인 경기 노회에도 이북 신도 대표회가 모금을 청원했고 노회가 이 청원을 받아들였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자 온 교회들이 신사참배와 일본 총독부하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신앙의 자유를 되찾은 것과도 같은 감격의 때를 맞이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