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좌절과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 사상과 진화론 및 무신론주의는 그동안 견고하게 부흥되어 온 조선의 모든 교회에 큰 위기와 분란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격동기 가운데서도 대체적으로 부흥과 성장으로 이어갔다. 시대적으로 가장 암울한 시기에 영적으로 큰 부흥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길선주 목사에 이은 김익두 목사 였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군국주의 강화와 천황 숭배의 강요는 모든 학교와 교회에도 강요하면서 교회에는 존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이념적 혼란과 위기 속에서 교회를 통해 내세의 소망을 갖게 되었으며 민족의식을 더욱 자각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교회의 성장이 이어지면서 교회는 백만구령운동으로 점화되어 부흥은 지속되었다.
그러한 부흥의 시기에 교회를 향한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1935년 3월에 평남 지사로 부임한 야스다게는 11월 4일 평남도 공.사립 중등학교 교장 회의를 소집하고 평양 신사(神社)에 참배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에 평양의 숭실학교 교장 윤산온 선교사와 숭의여자중학교와 의명중학교 교장은 신앙 양심상 문제로 참석할 수 없다고 끝까지 거절하다가 교장직을 파면당하였다.
이를 계기로 기독교 학교는 폐쇄되더라도 신사참배에 불응한다는 마펫 선교사 계열과 학교를 살리기 위해서 신사참배에 동조해야 한다는 언더우드 선교사(2대) 계열로 분열되기도 하였다. 당시 장로교계 학교는 전문학교가 3개교, 중등학교가 12개교, 초등학교가 60개교로 수용 학생은 약 10만 명에 이르렀다. 만일 문제 해결이 곤란하게 될 경우 최후에는 평양 및 전국에 퍼져 있는 모든 기독교계 학교가 폐쇄될 수도 있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1937년부터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군국주의 강화를 위해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명분으로 천황 우상 숭배를 강요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교회 측에서도 의견이 양분되었다. 먼저 선교사들 간에도 의견이 갈리워졌다. 이어서 교회에도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내용으로 집요하게 강요하였다. 그것은 교회당 안에 일장기를 달 것, 국기에 대한 경례, 국가봉창, 동방요배, 황국신민의 선서 제창, 서력 연호 사용 폐지, 신사참배였다. 이어서 교회에 대해 더욱 노골적인 반기독교적인 요구를 강요하였다. 그것은 교회 내에 "가미다나"라는 작은 우상 신단을 만들어 두고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그곳에 절을 하게 하는 "동방요배"를 강요하였다. 이에 대해 평양 산정현 교회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는 10계명에 위배되는 죄요,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입니다."라며 거부하였다.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제27차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가 열렸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를 필두로 총회 산하의 평양 노회, 평서, 안주, 만주 등 총대 88명과 장로 88명, 선교사 30명 등 총 206 명이 참여하였고 평양경찰서 순사들이 예배당을 삼엄하게 둘러쌓아 일체 다른 방청객들의 입장을 차단하였다. 이 총회를 대표해서 평양 노회장 박응률 목사는 "신사참배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다."라고 하면서 신사참배 결의안을 제의하자, 평서 노회장 박임현 목사의 동의와 평안도 안주 노회장 김인섭 목사의 재청으로 사회자 홍택기 총회장이 "신사참배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라고 설명하였고 이에 목사 회원들은 "예"하고 신사참배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때 총회장은 부를 묻지 않고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고 선포하였다. 이날 총회를 마치고 신사참배를 즉시 실행할 것을 특청하여 전국 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해서 평양의 '서기산 신사'에 도착하여 참배하였다. 이날은 교회사적으로 가장 수치스런 교회의 배도였다.
이 신사참배 결의와 통과에는 평양의 대형 장로교 목사들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이들은 참된 신앙의 사수보다는 교권을 유지하기 위한 배도를 서슴없이 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사참배에 목숨을 걸고 결연히 거부한 주기철, 박봉진, 허성도 목사 등이 있었으며 이에 동참한 성도 약 2천여 명이 있었고 폐쇄한 교회가 200개가 있었다. 한편 평양신학교 학생들과 교수들은 이를 성토하였으며 신사불참배 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으나, 평양 경찰서는 이런 기미를 눈치 채고 학생 다수를 체포하고 교수 박형룡과 김인준을 불구속 입건하였다.
신사참배에 배도를 거부한 일부 목사는 중국 만주로 집단적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거주하며 교회를 재건하기도 하였다. 평양신학교는 1939년 3월 자진 폐쇄를 감행하였고 교수로 재직하였던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 등은 만주 봉천(요령성 심양)에 소재한 '만주봉천신학교'(현 동북신학교/1940년 설립)로 옮겨 그곳에서 신학도를 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