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어느 분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금 광야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광야'(wilderness)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텅 비고 아득하게 너른 들' 을 말한다. 모든 것을 잃고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과 슬픔만 가득한 경우에 우리는 '광야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살면서 슬픔의 광야를 지나가는 것과 같은 때를 경험할 때가 있다. 성경에는 이런 절망의 광야에서 방황하던 한 여성이 나온다.
그 여성은 아브라함의 첩으로 아들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이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들을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남편을 설득해서 자신의 여종 하갈을 첩으로 삼아 아들을 낳게 했다. 그러나 하갈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이 이후에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삭을 조롱하고 핍박하자 분개한 사라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쫓았다.
그 배후에는 아들의 상속권을 여종의 아들에게 빼앗길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는 아내의 요구에 깊은 고민에 빠졌었지만, 아내의 요구를 들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 보냈다.
이렇게 내어 쫓김을 당한 하갈은 아브라함이 준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어깨에 메고 브엘세바 광야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었다. 마실 물도 떨어졌다. 그들은 뜨거운 태양열에 타오르는 목마름을 견디지 못하고 떨기나무 아래에 누워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갈은 차마 자식이 보는 앞에서 울지 못하고, 아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들을 마주 보며 통곡했다. "가죽 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하고 살 한 바탕 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 대곡하니."(창21:15,16)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절망과 죽음의 광야에서 울부짖는 하갈을 만나 주셨다.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창21:17,18) 하나님의 천사는 하나님이 그녀와 그 아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돌보시고 그 길을 인도하실 것이고, 그 아들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계획이 있음을 말해 주었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이제 눈물을 닦고 일어나 쓰러져 있는 아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를 돌보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갈과 그 아들을 그 즉시 죽음과 절망의 광야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 않으셨지만, 광야 길에서 그들을 만나 주셨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을 밝혀 주시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배우게 하셨다. 그러니 하갈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필요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슬픔과 절망의 광야에 설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 하심에 대한 믿음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심이다. 성경에 하갈에게 필요했던 것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그 선하신 인도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신실 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지신 그 선하신 뜻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때로는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기도 하신다. 우리가 바라고 기대하던 것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삶의 실망과 절망감만 가득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서게 하실 때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고난을 주시지 않지만 선하고 특별한 목적 하에 고난을 허용하실 때가 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때야 말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때이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발견하는 때이고, 참된 소망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고, 진정한 믿음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는 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절망의 광야에 먼저 가 계시고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하나님 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텅 빈 광야가 아니면 우리 인생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히 굴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거룩하신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의도된 고난의 자리' 에 서게 할 때가 있다.
병든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에게 찾아왔던 여인이 있었다(마15:22-28). 그 여인은 예수님께 은혜를 구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이 들렸나이다."(마15:22) 그러나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가시던 길을 그대로 가셨다. 그러나 그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딸을 고쳐주시기를 다시 간청했다.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 그러나 그 여인이 더욱 간절히 도움을 청하자 주님은 또 이런 냉정한 말씀을 하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마15:26) 이 여인의 실망과 절망감이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15:27절)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15:28) 주님이 이렇게 이 여인의 소원에 응답해 주실 것을 왜 그동안 거절하시고 박대하셨는가? 이 여인의 믿음을 보시기 위함이었고, 이 여인의 믿음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믿음을 격려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이 여인이 받은 거절과 실망과 절망감은 주님이 그 여인의 믿음을 보고자 하신 '의도된 거절' '의도된 고통' 이었다!
그러니 어디에도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고 낙심과 절망만 가득할 때야 말로 하나님의 품으로 더욱 파고 들어야 할 때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과 생명의 주관자 되시니 하나님이 아니고 어디로 가겠는가! 하나님이 만복의 근원이 되시니 우리의 삶을 누구에게 의탁 하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기 까지 하신 우리의 영존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가! 그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기 위해 고난의 광야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하나님이 고난의 광야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를 향하신 특별한 뜻과 계획을 밝혀주시고,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성장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하고 슬픔과 절망 중에 특별하신 뜻 가운데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소망을 가지고 힘써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런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보기를 원하신다.
오래 전에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어린 딸과 함께 중국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중에, 그 마을에 심한 가뭄이 들게 되었다. 동네사람들은 백인들이 자신들의 동네에 들어와 살아서 신이 노해서 비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분개한 그들은 몽둥이와 농기구들을 들고 선교사님 집으로 몰려왔다. 그때 선교사님은 사역을 위해 외출 중이 셨고, 집에는 사모님과 어린 딸이 남아 있었다. 분개한 동네 사람들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사모님이 어린 딸과 함께 찻잔과 접시를 꺼내 테이블에 놓고 정성껏 차와 케이크와 과일을 준비했다. 그리고는 대문과 집안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딸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동안 사모님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살기로 가득한 동네 사람들이 집안으로 들이닥쳤을 때, 사모님이 침착하게 이렇게 말했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어서들 오셔서 차라도 한 잔 드세요!" 그리고는 정중하게 차를 권했다. 당황한 그들은 마지못해 사모님이 따라주는 차를 마시고 케이크와 과일을 먹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은 아무런 행패를 부리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그날 밤 그동안 가뭄으로 내리지 않던 비가 쏟아져 내렸다. 그 사모님은 어린 딸이 장성 했을 때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그때 도망칠 곳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 했기 때문에 그렇게 용감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단다." 이 이야기는 미국 여성으로 최초로 '대지' 라는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벅 여사(1892-1973)의 부모님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이렇게 담대할 수 있다.
존 오트버그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직면한 문제 앞에서 절망과 희망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고난의 상황에 절망과 희망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곧 고난 중에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날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고난 중에 희망을 선택하고 용기와 소망을 가지고 도전 할 수 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변치 않으며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결코 중단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란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121:5-8)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발걸음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고 돌보아 주시며 결국에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신다.
불평과 원망을 다스림
그런데 광야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며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받기 위해 우리가 다스려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불평과 원망의 마음' 이다. 불평과 원망의 마음은 고난의 광야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의 길로 가지 못하게 하고, 우리 자신을 불행의 울타리 안에 가두게 하고 우리의 삶을 퇴보하게 만든다.
이런 불평과 원망의 마음을 무엇으로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와 긍정의 마음' 을 가지는 것이다. 불평과 원망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우리 마음에 날 돌보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하며 긍정의 생각과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 가운데 주어진 '의도된 고난' 이라면 더욱 우리는 '의도적인 감사와 긍정의 마음' 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광야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받는 믿음의 자세이다.
내가 아는 어느 분은 날마다 컴퓨터로 자신의 은행 계좌와 잔고를 확인하곤 한다. 그분의 은행 잔고가 점점 줄고 마음에 염려가 생길 때 그분이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은행계좌에 나오는 pay off 한 크레딧 카드 기록을 보는 것이다. 크레딧 카드 계좌 옆에 '발란스 제로' 라고 기록된 것을 확인하고는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컴퓨터를 끈다. "그래도 크레딧 카드 하나를 pay off 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분은 이렇게 날마다 염려가 아니라 감사의 마음을 갖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을 한다. 우리에게 이런 감사와 긍정의 마음을 갖기 위한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일을 당 하든지 감사와 긍정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 바라보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갈보리 언덕의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처리 되었고,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가장 좋은 복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얻었고,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살 새로운 삶의 목적을 찾았고,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하나님의 사랑의 돌보심을 받으며 사는 이 모든 증거가 갈보리 언덕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크신 은혜와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으로서 무슨 일을 당하든지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하며 용기와 소망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한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5:20)
성경에 하갈에게 하나님이 바라셨던 것도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와 긍정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었다. 하갈의 마음에 왜 자기를 내어쫓은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한 미움과 원망의 감정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이 그런 소득 없는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기 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을 바라보며 감사와 긍정의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 의인이라 인정받았던 욥은 한 순간에 자녀와 재산을 모두 잃고 몸에 병을 얻어 극심한 고난에 빠졌을 때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왜요?"라는 질문을 수 없이 했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고 더욱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을 비로서 바라보고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3)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6) 욥은 이런 회개 후에 비로서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입술의 언어가 감사와 긍정의 마음과 언어가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감사는 곧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받기를 원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C&MA 교단의 파송 선교사님으로 몽골에서 선교사역을 하시던 이현호 선교사님이 1년 반 전에 코로나로 인해 몽골을 떠나 미국에 들어와 안식년을 가졌다. 그런데 안식년을 마치고 지난 6월에 다시 몽골로 들어가려 했지만 비자가 거부되어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고, 그러던 중에 이 선교사님은 교단의 구제 긍휼사역팀인 카마(CAMA, compassion and mercy associate)의 부름을 받아 캄보디아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다. 이 선교사님은 그동안 힘써 사역을 해오던 몽골 사역의 길이 막힌 것으로 인해 실망과 낙심이 되었지만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캄보디아로 가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이 선교사님의 이런 결정을 보고 몽골 사역의 디렉터가 이 선교사님을 걱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몽골어를 배우느라 고생을 많이 했는데, 왜 또다시 캄보디아어를 배우는 힘든 길을 택하려고 하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며 이 선교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도전이었습니다. 광야! 제가 미국에 정착 했다가 몽골로 선교를 간 것도 도전이었고, 다시 캄보디아로 가는 것도 도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광야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하나님은 거절과 잃어버림과 실망과 슬픔과 두려움과 절망의 광야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광야에서 새로운 길을 준비하시고 인도하고자 하시는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사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긍정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감사로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선한 길이 보인다.
성경에 하갈이 절망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창21: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혀 주셨고, 미리 예비해 두신 샘물을 보게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눈을 밝혀 주시면 그동안 보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가 보이고 전혀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
하나님이 일 하시면 우리의 삶의 문제가 일 순간에 해결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하갈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 하심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갈의 아들이 광야에 거하면서 성장하고 한 가정을 이루고 또 큰 민족을 이루기까지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고 그의 길을 인도해주시고 복을 내려 주셨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결코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형통 함을 주시는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1-13)
그러므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슬픔의 광야에 서게 될 때에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감사하고 긍정의 마음을 가지라! 슬픔과 절망의 광야에 길을 내시고, 절망이 변하여 새로운 삶의 기회가 되게 하시고, 근심과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고, 탄식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신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결국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완성시켜 주실 것이다.
이범훈 교수는 센트럴신학대학원 상담분과 조교수(겸임)이고, 시카고 모자이크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