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중심 서기 전부터 국제적으로 인정
여의도순복음교회 성장하면서 위상 더 높아져
국제교회성장연구원, 조 목사 전 세계에 알려
오순절 운동 넘어 복음주의 운동 영역 확장해
빌리 그래함과 NAE, 조 목사 주 강사로 초청

국제적 인지도 통해, 국내 위상까지 공고해져

조용기 목사 별세를 맞아, 박명수 박사님(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의 글을 소개합니다. 이 원고는 박사님의 <급하고, 강한 바람: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세계 오순절운동>에 수록된 것입니다. -편집자 주

5. 세계 선교와 여의도순복음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가 한국교회의 중심에 서게 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세계가 조용기 목사를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조용기 목사가 한국교회의 중심에 서기 오래 전부터, 조용기 목사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지도자가 되었다.

우선 조용기 목사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통로는 오순절교단이었다. 조용기 목사는 1964년 미국 하나님의성회 창립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유창한 영어로 한국교회를 소개하여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미국 하나님의성회는 조용기 목사가 전 세계에 다니며 집회를 인도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성장함에 따라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세계적인 오순절대회를 개최하는 주요 장소가 되었다.

조용기
▲1987년 아르헨티나 성회 당시 알폰신 대통령과 만난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1973년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성전 헌당식을 할 때, 세계오순절대회를 갖게 되었다. 이때 전 세계 39개국에서 2천명의 사람들이 참석하였는데, 김포공항이 설립된 이래 가장 많은 외국인이 방문한 것이었다.

그 후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수많은 국제대회를 개최해서 세계 오순절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국제적으로 위상이 높아진 것은 국제교회성장연구원 때문이다.

조용기 목사는 1976년 국제교회성장연구원(Church Growth International)을 창립하였고, 전 세계의 많은 교회들을 초청하여 교회성장의 원칙과 방법을 강의하였다.

조용기 목사의 국제교회성장연구원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전 세계에 알리는 통로였다. 이것을 통해 전 세계 교회는 오순절신앙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를 알게 되었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교회성장연구원을 통해서 전 세계적인 교회성장학자와 오순절지도자들을 한국에 초청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인해서 그는 보다 국제적인 네트웍을 강화했고, 국제적인 지도자로 더욱 부상하게 되었다.

교회성장연구원이 발전함에 따라서 이 모임은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여러 장소에서 개최되게 되었다.

조용기 목사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보다 본격적인 국제 전도집회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데이비드 조 복음선교회(David Cho Evangelistic Mission)을 조직하였다.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를 모델로 하여 만든 이 조직은 조용기 목사의 국제 집회를 계획하고, 진행한다.

조용기
▲조 목사의 솔로몬군도 집회 모습. ⓒ여의도순복음교회

사실 조용기 목사는 오래 전부터 국제적인 집회를 인도하였고, 이것은 그를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전도자로 만들었다. 흔히 하는 말로, 조용기 목사는 한국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는 말은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조용기 목사는 해외에서 거의 국가 대표급 대우를 받으면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특별히 아프리카나 남미의 가난한 나라의 지도자들은 국민들에게 희망을 전해 주기를 원했고, 조용기 목사는 이들에게 한국이 어떻게 절망을 딛고 성장했는가를 보여 줌으로서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조용기 목사는 세계에 한국을 알린 가장 대표적인 인사 가운데 하나이다.

조용기 목사는 처음에는 오순절 운동을 통해서 세계로 진출했지만, 점점 그의 영역은 넓어져 갔다. 사실 조용기 목사는 하나님의성회를 중심으로 하는 고전적인 오순절 운동에 매이지 않고, 은사 운동과도 활발한 접촉을 가졌다.

특별히 순복음실업인회와 관계 가운데서 많은 국제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은사 운동은 오순절 운동을 교파의 제한을 넘어서서, 기존 교파에도 확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조용기 목사는 은사 운동을 넘어서서 복음주의 운동에까지 그 영역을 확대하였다.

조용기 목사와 복음주의권의 만남은 빌리 그래함과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빌리 그래함은 1983년 암스테르담 대회에 조용기 목사를 주강사로 초청하였고, 조용기 목사는 화려하게 국제무대에 등장하였다.

당시 조용기 목사는 국내에서 주류교단과 논쟁 가운데 있었는데, 이와 같은 국제적인 인정을 그의 위치를 보다 확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조용기 목사는 2001년 세계 복음주의 운동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미국 NAE 대회의 주강사로 초청되었다. 이것은 조용기 목사가 오순절뿐만 아니라 복음주의 세계에서도 중심인물이 된 것을 의미한다.

조용기
▲조용기 목사가 지난 2012년 인도 하이데라바드 성회를 인도하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를 이렇게 세계적인 인물로 만든 요인 가운데 우리는 매스컴의 영향력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오순절 운동은 처음부터 매스컴을 정복하였다. 사실 매스컴은 기존 교회가 아직 장악하지 못한 영토였다. 그런데 오순절운동은 매스컴을 점령함으로서 기독교 세계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특별히 이것은 국제적인 상황 가운데서 더욱 그러했다. 조용기 목사는 한국에서 누구보다도 해외에 관심이 있는 인물이었고, 그의 설교는 초창기부터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로 통역하기 시작하였다.

1978년에는 PTL-TV를 통하여 금요철야기도회가 전 세계에 중계되었으며, 1982년 8월 29일에는 주일예배가 세계 25개국에 동시에 생중계되기도 하였다.

2008년 현재에는 조용기 목사의 설교는 미국과 캐나다의 6개 지역에서, TV는 미국 내 8개 지역과 기타 지역을 합하여 10개 지역에서 중계되고 있다.

이와 같은 조용기 목사의 국제적인 인지도는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국내적인 입지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국내에서는 기존 교단의 시기 속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던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세계적인 인지도를 갖고 한국에 재등장하게 될 때, 한국교회는 그 위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용기 목사의 국제적인 인지도는 국내에서 그의 위상을 공고하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박명수 박사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