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세계로교회 임지석 목사
(Photo : 기독일보) 나성세계로교회 임지석 목사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의 비유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잘 알려진 내용으로서 그 내용을 정리하면 이와 같다. 어떤 부자가 평생 잘 먹고 잘 입는 가운데 세상에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즐기고 있었다. 반면에 그의 집에는 나사로라 이름 하는 거지가 있었는데 그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면서 근근이 살아가야만 했다. 세월이 지난 후 두 사람이 죽어서 세상을 떠났는데 죽음 이후의 그들의 형편은 이 땅에서와 정반대가 되어 있었다.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안식을 누리는 반면에 부자는 지옥이라는 음부에 떨어져서 영원한 고통의 형벌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삶이 아무리 부럽고 그럴듯해 보인다 할지라도 죽음 이후가 온전하지 못하다면 결코 복된 것이라 할 수 없다. 반면에 이 땅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죽음 이후에 영생을 누릴 수 있다면 더없이 복된 삶이라 하겠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상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부를 아무리 마음껏 누린다 할지라도 죽음 이후가 비참한 것이라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한 일이다. 우리는 부자처럼 살 것인가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삶을 이룰 것인가 분명히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부자의 삶을 반면교사로 삼아 그가 경험했던 비극을 반복하지 않도록 영생의 길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웃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라

우선 누가복음 16:19-21에 있는 말씀을 보자.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부자는 어려운 형편에 있던 나사로를 위해 어떠한 배려도 하지 않았다. 상 밑에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받아먹으며 사는 그를 보면서도 도와주려는 생각을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부자는 개들이 종기를 핥을 만큼 악화된 나사로의 고통에 대해서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신은 부족함 없이 살면서 가까이 지내는 이웃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을 교훈하고 있는데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으면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처사가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은 결코 자신이나 가족 등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부자가 보여주는 이기적이고 자기만 아는 생각은 그분의 심판을 받기에 충분한 일이다.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다고 얘기할 수 있겠느냐 하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는 일로서 죄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에 야고보 사도는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말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부자가 나사로를 가까이 하면서 돌볼 수 있었더라면 어떠했을까? 그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됨은 물론이고 분명히 그분의 구원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신실한 사람 나사로를 통해서 일찍이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도 해본다. 모름지기 부자는 나사로와 깊이 교제하는 기회를 가짐으로서 주님의 품안으로 인도되는 복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일은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다. 그리하여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주안에 한 몸을 이룰 때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려면 먼저 그들의 어려움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물질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서로에게 관심을 가짐으로서 함께 나누는 삶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초대교회가 놀라울 정도로 부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나누는 삶을 실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일 때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가운데 물질도 나누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도 결코 자기 것으로 고집하며 움켜쥐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들이 오늘날 우리보다 훨씬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지만 주님의 사랑을 품고 이웃에 대해 항상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웃에 대한 관심은 영혼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 가지 계명을 주시는 가운데 그분에 대한 사랑과 이를 통한 이웃 사랑을 말씀하신 바 있다. 이러한 사랑은 무엇보다도 그분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사실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한 이유로 주님의 사랑이 임하는 곳에 우리의 관심이 머물러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처럼 세상을 사랑하신 이유를 기억함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다. 주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가진 돈 100만 달러도 아깝지 않게 전해주는 심정으로 간절히 예수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부자처럼 가까이 있는 사람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가 만나는 영혼들이 종말이 이르기 전에 예수를 통해서 영원한 복을 누리도록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자신의 영혼 구원을 확실히 하라

먼저 우리는 부자의 호화스런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그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살았다. 그는 당시 사정으로 볼 때 왕 또는 귀족들이나 누릴 수 있는 화려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러한 것들은 이 땅에서 잠시 즐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흙으로 돌아갈 육신의 쾌락만을 추구하면서 이러한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가운데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를 보면 삶의 자세가 전혀 달랐던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는 비록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어 먹는 처지였지만 영혼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살았다. 이러한 것은 그가 이 세상을 떠나자 영원하고 복된 삶을 누렸던 사실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나사로는 이 땅의 고통을 뒤로하고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와 안식을 받는 영혼의 쉼을 누릴 수 있었는데 누가복음 16:22-23에 두 사람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나사로가 이 땅에서는 참으로 어렵게 살았지만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말이다. 반면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가운데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부러워하는 처지가 되었다.

사람의 영혼은 이 땅을 떠날 때 온전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을 막론하고 주님 앞으로 가는 순간 진정한 평가를 받게 된다는 말이다. 이 땅에서 아무리 화려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영혼을 보전하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권력이나 물질이나 인기를 누리던 그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예외일 수 없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인생에 피할 수 없는 길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영혼을 돌보지 않을 때 지옥형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생이 잘 되기를 원하는 사람마다 자신의 영혼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 땅에서 성공하고 유명해지는 가운데 부귀영화를 누리기에 앞서서 영혼을 보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땅을 떠나는 순간 삶에 따라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는데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 이렇게 교훈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에 우리는 스스로의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가짐으로서 잘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거지 나사로처럼 아버지 품에서 영원한 복락을 이루며 살아갈 그날을 예비해야 한다는 말이다. 가슴 치면서 과거의 삶을 후회했던 부자 같은 신세가 되지 않도록 영혼을 잘 돌보고 아름답게 보존할 수 있기를 간구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무겁게 받아들이라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이 땅을 떠나게 되어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나사로나 부자에게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 땅에 죽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죽음은 한 사람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이 죽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말로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하나님은 물론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일이다. 이에 우리는 인생의 종말을 앞두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럼 없이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 땅을 떠날 때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후손들이 보기에도 한없이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에게 돈 한 푼 물려주지 못하는 현실보다는 인생에 심판 받는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자는 천년만년 살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너무나 무관심했다. 세상을 즐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결과 그는 지옥문으로 들어가서 심판을 받게 되었는데 26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형벌이 영원히 계속되는 장소이다.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통가운데 계속해서 몸부림치는 장소라는 말이다.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웅덩이 같은 곳으로서 유황불에 튀기는 것과 같은 구더기도 죽지 않는 참혹한 고통이 계속되는 장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어떠한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것일까? 원래는 사단과 그 졸개들이 가는 곳으로 되어 있지만 계시록 20:15에 보듯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불 못에 들어간다고 한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복음의 말씀이 널리 퍼져 있지만 부자와 같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들은 당장 눈으로 보는 것만을 생각하는 가운데 인생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이 자기 생각대로 길을 가다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빠져드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성경에 말씀하듯이 어떤 길을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일들은 하나님의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지금은 부자와 같이 잘 먹고 잘 살지 몰라도 죽음 이후에는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엄청난 고난을 받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처럼 어려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죽음 이후에는 주님 품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사람도 있다. 부자는 자신이 받는 고통이 얼마나 심했든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통사정 하면서 부탁을 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살아있는 형제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서 더 이상 그들이 자신이 당하는 것과 같은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터인데 그때 어떤 모습을 하게 될지 이제는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인생에 있어서 영혼을 위한 선택은 순간이지만 그 결과는 영원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구더기도 타 죽지 않는 유황불이 펄펄 끓는 그곳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사망이나 고통이나 아픔이 없는 주님 품안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강과 위로를 누리며 지낼 것인가? 모든 인생들에게 있어서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아직도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육신의 죽음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사람에게는 반드시 임하게 되어 있다. 부자와 같이 때 늦게 후회할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님의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준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