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미션대학교 윤임상 교수
(Photo : 기독일보) 월드미션대학교 윤임상 교수

본지는 월드미션대학교 윤임상 교수의 소논문 "포스트 코비드 시대, 사역의 변화에 따른 교회 예배와 음악"을 연재합니다. 오늘의 예배 음악을 진단하고 포스트 코비드 시대에 교회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III. 종교개혁 시대 에배를 통해서 본 예배와 음악 

1. 역사적 고찰  

중세교회의 타락은 새로운 개신교를 낳게 되었다.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인물을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라고 하면 그 개혁을 완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헀던 인물은 죤 칼빈(John Calvin1509-1564)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에 카톨릭 교황청의 타락을 고발하는 95개 조항을 가지고 등장하게 된 것이다. 당시 루터가 이 질의서를 만든것은 종교 개혁을 일으키려 하거나 교황에 대해 공격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 시대 교회에서 크게 문제가 대두되었던 면죄부를 옹호하고 가르치고 있는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질의서 였던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여러학자들과 이름있는  관계자들을 초대하여 토론을 벌이고 그 의미를 명확히 밝혀내려는 의도였다.

결국 그것은 당시 발달한 인쇄술 덕택에 두 주일도 채 안 되어 삽시간에 유럽 전역에 퍼질 수 있었다. 그것은 마틴 루터가 한 일이 아니라 그가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결국 이 일 후로 마틴 루터는 자신의 근본적 의도와는 다른 길로 가게 되었고 자신이 상상하지 못했던 종교개혁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루터와 칼빈, 그들은 비록 성격만큼이나 서로 다른 예배관과 찬양관을 가졌지만 본질적인 예배와 음악의 개혁정신은 같은 맥락이었다. 정장복 교수는 종교개혁의 당위성 가운데 예배에 대해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아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가 부재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무리들이 시들어져 갈 때 교회는 병들고 인간의 심성은 부패해질 수 밖에 없다는 진리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각자의 모습으로 예전(Liturgy)을 세우고 초대교회 복음을 기초로 한 예배의 모형으로 되돌리려 했던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한다.  

루터는 예배에 관해 개혁자들 중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여 카톨릭의 미사에 여러 부분을 도입, 예전(Liturgy)을 구성하게 되었다. 1523년에 라틴어 미사(Formula Missae of 1523)를 만들게 되었고 1526년에 독일어 미사(Deutsche Messe of 1526)를 만들어 독일어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독일 모든 예배자들이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게 확대하게 된 것이다. 한편 칼빈은 루터와 다르게 중세 카톨릭 교회의 모든 예전을 버리고 초대교회 예배를 그대로 도입하여 1538년 예전(Calvin Liturgy of 1538)을 만들게 되었다.

두 개혁자의 예전이 서로 다르지만  말씀을 전하는 설교 시간이 중요한 핵심으로 대두되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원래 옛적의 고유한 위치로  회복시킬것을 그들은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예배서의 찬양은 공히 중요함을 인식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데 있어서는 루터와 칼빈은 가사적인면과 음악적인 면에서 서로 큰차이를 보게 되는데 특히 루터는 음악을 전면적으로 교회에 받아들이게 되었다.

루터는 기악, 다성음악 등 다른 개혁자들이 기피했던 것까지도 수용했던 것이다. 그는 카톨릭 음악까지도, 카톨릭 작곡가 까지도 자신의 예전(Liturgy) 에 맞는다면 모두 수용하는 입장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루터는 그 당시까지 발전되어온 모든 음악적 요소를 다 수용한 반면 칼빈은 오직 단선율만을 사용했고 악기의 사용은 거부 하였다. 가사를 사용하는 면에서도 두 개혁자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였는데, 칼빈은 오직 시편가를 변형시키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던것에 반해 루터는 시편가를 현대 언어로 바꾸어 가사를 적용하였다. 루터는 뿐만 아니라 시편가 이외에 신약의 복음서, 서신서 등의 칸티클이나 또 새롭게 복음의 가사를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

1523년 본격적으로 종교 개혁의 불길을 지피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그 해 7월 1 일 마틴 루터를 따르던 두 젊은이 하인리히 뵈즈(Heinrich Voes) 와 요한 에쉬(Johann Esch) 가 화형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루터란 최초의 순교자들로 기록되었는데 1522년, 이들이 속해있던 벨기에 에 있는 앤트워프 수도원(Monastery Antwerp in Belgium)전체가 공식적으로 종교개혁 교리를 선택하고 가르치자 카톨릭 교황청은 그 안에  있는 뵈즈와 에쉬 두 수도승(Monk)들을 화형에 처하게 한 것이다.

이것을 접하게 된 루터는 이 부당한 사실을 모든 민중에게 알리기 위해 음악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이 때 만들어진 곡이 그의 처음 찬송가가 된  "A  New Song Now Shall Be Begun" 이란 곡이었다. 이 곡은 마틴 루터로 하여금 음악 개혁자로서 첫 걸음을 내 딛도록 한 곡이고, 또한 로마교황청의 타락을 음악을 통해 저항한 곡으로 당시 종교 개혁이 앞으로 진행 될 모든 개혁 활동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곡이었다.  이 곡이 주는 또 하나의 큰 의미는 마틴 루터가 음악을  사용해 민중을 동요시키고 개혁의 정당성을 알려 개혁의 피치를 빠른 시간에 세상에 널리 퍼트려  종교개혁의 불을 크게 지피는 계기가 된 것이다.

마틴 루터의 개혁에서 음악을 통한 사역은 실로 그 영향력이 대단했다. 한마디로 무서웠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 였다. 교회 역사가 토마스 패티슨(Thomas H. Pattison 1838-1904)은  실제로 루터의 음악은 그의  설교보다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이야기 한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문헌은 교회음악가 스티브 밀러(Steve Miller) 가 당시 마틴 루터를 공격했던 사람들의 평가를 직접 인용해 그 당시의 음악이 가지고 있었던 무서운 영향력에 대해 김철웅 목사가 인용한 글이다. "당시 예수회 소속이었던 콘제니우스(Conzenius)는 '루터의 찬양은 그의 글이나 설교보다 더 강하고 힘이 있다.' 스페인 카톨릭 수도사인 토마스 예수(Tomas a Jesu) 조차도 마틴 루터의 음악이 유럽에 루터란 교단을 팽창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 당시 마틴 루터의 음악은 일터에서, 장터에서, 길거리에서 또는 벌판에서도 불리고 있었다고 서술한다.

종교개혁은 교회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특히 예배와 음악의 본질을 원래의 자리로 회복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바른 찬양으로 회중들을 일깨워 개혁정신의 불을 지피고 그 안에 바른 말씀으로 회복시켜 개혁을 완성시키게 된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것은 결국 나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말하려고 하던 것에서  하나님의 의를 통해 하나님을 말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 예배와 음악이 많이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우려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에, 종교개혁자들이 바꾸어 놓은 예배와 음악의 현미경속으로 현대  예배와 음악을 비추어 바르게 진단하고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져 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