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세계로교회 임지석 목사
(Photo : 기독일보) 나성세계로교회 임지석 목사

오늘날 교회가 지나칠 정도로 세상의 가치관을 닮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교회가 그만큼 세속화되고 있다는 의미로서 출석하는 사람의 숫자나 신자들이 내는 헌금 액수에 따라서 평가를 받고 있다는 말이다. 교회가 물질 중심주의와 성공 우선주의로 치닫는 세상의 모습을 닮는 것은 물론이고 마치 이러한 것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다. 교회가 이처럼 숫자를 통해서 평가를 받는데 익숙하다 보니 숫자에서 뒤지는 교회는 그만큼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교회를 구분하는데 있어서 세상에서 즐기는 '크다' 또는 '작다'는 형용사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것 같다. 물론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인 현상에 대해 크거나 작다는 식의 표현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영적으로 이루어진 조직으로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요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하나님 나라와 이 땅의 가치 기준이 전혀 다른 점을 생각해볼 때 큰 것이 작을 수도 있고 작은 것이 오히려 더 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는 이 땅에 교회를 창조하시고 그 아들 예수가 친히 머리가 되어계신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한다. 아울러 그분이 원하시는 진정한 교회의 의미를 깨닫는 가운데 교회에 대한 분별력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세속화된 교회의 현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많은 때 이기적인 목적과 동기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성 친구를 비롯해서 사람을 만나거나 사업의 동반자를 찾고 자신을 PR하려는 목적에서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그만큼 자신의 구원과 영적 안위를 생각하는 순순한 동기를 가지고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이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교회는 누구에게나 그만한 매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이처럼 자신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거나 유리한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의 바탕 위에서 생각해볼 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교회가 그만큼 장점이 많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신이 예배를 드리는 동안 아이들을 책임지고 맡아줄 수 있는 시스템은 교회를 정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관심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가 각종 소그룹을 통해서 성경공부를 하거나 다양하게 봉사할 기회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교인들끼리 관계망도 잘 되어 있어서 개인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그만큼 유리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교회마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일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교회가 그 본질을 생각하기 이전에 몸집을 키우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생각은 물질 만능주의와 상업주의에 편승하여 교회의 외적 성장을 부채질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교회가 이같이 대형화의 추세를 이루면 이룰수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보다는 사람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예배를 드리고 교육을 받으며 선교하는 것까지도 프로그램을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는 말이다. 나아가 교회가 이러한 현상에 익숙하다 보면 만족할 결과를 얻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에 가서 수동적으로 이끌려 다니는 역기능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러한 연유로 시스템과 프로그램을 통한 일련의 사역과 신앙생활이 성령의 인도하심보다 세상의 경영철학을 따르는 상업주의로 흐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현실이 교회의 세속화를 부채질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성장을 위한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기독교가 세속화의 길을 걸으면서 외형적으로는 성장한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말이다. 교회가 영적 정체성을 잃어버린 가운데 오히려 세상의 비난과 우려를 사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기독교에 대한 불신자들의 신뢰는 이미 땅에 떨어진 지 오래되었고 그 결과 기독교 교세는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안타까운 사실은 대형화된 교회들이 교계를 주도하면서 마치 기독교가 가진 자들만을 위한 집단으로 비쳐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대형화된 교회가 있기까지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축복도 무시할 수 없지만 이러한 교회들이 다른 한편으로 물질만능주의와 상업주의의 주체로 지목받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숫자 놀음은 이제 그만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큰 교회'니 '작은 교회'니 하는 단어는 분명 잘못된 수식어이다. 단언하지만 이 땅에는 큰 교회도 작은 교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이는 자신이 섬기는 교회를 자랑하고 과시하려는 사람이나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하기 좋아하는 편 가름식의 말장난에 불과할 따름이다. 굳이 이 땅에 있는 교회를 구분한다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교회'와 '이러한 교회를 닮기 원하는 교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 아니면 이러한 교회를 따라가기 원하는 교회로 분리해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에 대부분의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의중은 이러한 숫자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분은 어느 교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가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주님은 온전히 교회를 이루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에 힘쓸 것을 주장하셨지만 단 한 번도 대형화된 교회를 이루라고 말씀하신 일이 없으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회 성장이라는 미명하에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사람들은 이에 편승해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모습들은 교회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기독교에 반대하는 세력인 anti-Christian을 양산하는 어처구니없는 폐단을 낳게 되었다. 교회마다 열심히 전투를 하는 것 같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초라하고 소모적인 영적 전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많은 교회들이 최고가 되고 최대가 되기를 원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도매금으로 기독교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점은 대형화된 교회와 더불어 이를 추종하는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소수의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들도 대형화된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기꺼이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많이 모이지 않는 교회일수록 십중팔구 성장이라는 목표에 집착한 나머지 숫자를 채우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는 말이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만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외적 성장에 목을 매는 교회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중에 주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 확장과 세계 복음화를 위한 소명으로 헌신하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그야말로 소수에 불과할 따름이다.

A.W. Tozer 목사는 그의 저서에서 "작은 교회이지만 큰 교회가 있는 것을 확신한다"고 얘기한 바 있다. 거듭 말하지만 교회는 절대로 외적으로 나타나는 숫자를 가지고 크고 작음을 말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니다. 교회의 크기를 논하는 일은 세상의 한 조직처럼 취급하려는 세속화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교회는 주님이 허락하시는 몸이기에 이러한 기능에 충실할 때 그분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굳이 큰 교회라는 수식어를 사용하기 원한다면 주님의 명을 받들어 보다 큰일을 행하는 교회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교회들처럼 세상은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주님을 위해서 큰일을 감당하는 교회를 일컫게 된다는 말이다.

이에 우리는 숫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은 숫자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관점과 정반대의 관점에서 교훈하고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주님은 마가복음 10장에서 섬김의 자세에 대해 증거 하신 바 있는데 43-44절 말씀을 주목해보았으면 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주님은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다른 아흔아홉 마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셨는가 하면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이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낫다고 말씀하셨다. 사무엘상 14:6에 보듯이 하나님은 요나단이 블레셋 진영으로 쳐들어가기 전에 무기를 든 소년에게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않았다"고 단언하셨던 사실을 기억했으면 하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하나님은 인류에게 두 가지의 조직을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가정과 교회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정을 구성원이 인위적으로 나눌 수 없듯이 교회도 그 지체들이 임의대로 더하거나 뺄 수 없는 것이다. 가정이나 교회나 그 머리는 오직 주님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교회의 설립은 예수님이 친히 예언하신 바 있고 이러한 예언은 그분의 대속의 성취와 함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말미암아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밖에서 불러내었다' (Calling out of)는 말로서 그리스도 밖에 있던 무리들이 그분 안으로 불러냄을 받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나는 거룩한 공회 (교회)를 믿습니다" 하는 엄숙한 사도신경의 고백에 대해 아멘으로 반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원래 우주적인 교회 (Cosmopolitan Church)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특별한 공동체이다. 이 말씀은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존재하지만 오직 하나의 교회만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곳 미국만 보더라도 수많은 교회가 있는데 이는 믿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주님이 허락하신 교회들일 따름이다. 한국에 사는 사람이 미국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기가 쉽지 않고 미국에 사는 사람이 아프리카에 있는 교회를 방문할 수 없는 관계로 지 교회 (Branch Church)를 허락해 주셨다는 말이다. 이에 믿는 사람들은 교회의 지체로서 주님이 허락해 주신 지 교회에 소속되어 머리 되신 그분만을 섬길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내 교회' '네 교회'가 있을 수 없고 어느 교회든지 주님이 머리 되어 계신 '주님의 교회'요 '우리 교회'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개교회주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개교회주의란 다른 교회는 어떻게 되든지 자신이 속해있는 교회만 잘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나 그렇지 않은 교회를 막론하고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매년 수천 곳의 소규모 교회들이 문을 닫고 교인들은 수평 이동을 거듭하는 가운데 대형화된 교회들은 계속해서 몸집을 불리고 있는 현실이다. 이에 수평 이동에 따른 피해를 당하는 교회의 입장에서는 피해를 입히는 교회의 모습이 이기적으로 비쳐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동네의 구멍가게가 대형 마트에 밀려서 문을 닫는 것처럼 소규모 교회들이 어쩔 수 없이 도태될 것임은 불을 보듯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제 큰 틀에서 냉정하게 교회의 존재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 대형화된 교회들만을 지목해서 교회의 문제를 들추어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러한 교회가 그에 걸맞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서 더없이 귀한 일이다. 문제는 교회들이 교회의 본질을 외면한 채 숫자 놀음에 매달리고 있는 현실에 있는 것이다. '큰 교회' '작은 교회' 운운하면서 도토리 키 재기 하듯이 몸집만 불리려 하는데 근본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이제는 이처럼 세속화된 용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관행까지도 사라졌으면 하는 생각이다. 어떠한 교회든지 그 본질을 회복하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교회의 본질에 충실하다 보면 이러한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마다 숫자 놀음 같은 것일랑 그만하고 오직 머리 되시는 주님이 기뻐하실 사역에 매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교회 본래의 사명에 헌신하는 교회야말로 세상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큰 교회'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