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 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이사야 60:1-2)".
지난 주 광복 76주년을 맞았습니다. 광복절의 의미는 대한제국이 붕괴된 후 1910년 국권을 상실하고, 1939년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 1945년 미군의 원자탄 투하로 침략자인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서 36년간의 탄압과 고통이 끝남과 동시에 대한민국이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 광복절이 있다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유월절이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구약 성경 출애굽기에 나오듯 이집트로부터 유대 민족이 대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집트 나일 강 삼각주 유역 동부 지역, 이집트 동쪽 고센 지방에 히브리인이 정착하게 된 오랜 역사였습니다. 당시 이집트의 잔인한 왕 파라오에 의한 노예생활과 모세의 출생, 지도자 모세와 함께 애굽을 탈출한 유대인의 이야기이며, 조상들이 노예 생활을 하면서 당한 고난을 기리기 위해 유월절의 첫째 날과 둘째 날 밤에는 유월절 밤 축제 행사를 합니다.
이때 먹는 음식은 사과, 꿀, 견과류로 만든 과일 절임 반죽 하로셋은 애굽 정착 초기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 먹는 음식이며, 쓴 나물, 양 고추냉이는 자랑스러운 소유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하가다'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건국시기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며 이념 싸움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정작 광복의 참 의미는 희석되어, 후손들에게 뭐라 해야 좋을지 참으로 난감하며 안타까움만 남습니다.
광복 76주년째입니다. 광복(光復)을 한자로 풀어보면 '빛으로 오다', 즉 회복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제 곧 국권 회복을 경축하고 민주자주 독립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9일부터 15일까지 태극기를 게양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시대는 참으로 위험합니다. 국민들은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으로 정부의 눈치를 살피며 애를 태우고 있습니다.
제19대 대통령은 취임 연설문을 통해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새로운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게 하였습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로 만들겠다"면서, 30여 가지의 공약을 내세웠지만, 돌아오는 것은 허무함 뿐이었습니다. 국민들은 망연자실하여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노심초사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청사진으로 가득차 있다고 했지만, 나라를 공산화하면서 그들만의 노름판으로 만들려던 계획이 그들의 그림이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문 대통령은 연설문에서 "우리가 만들어가려는 새로운 대한민국은 숱한 좌절과 패배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배들이 일관되게 추구한 나라입니다. 또 많은 희생과 헌신을 감내하며 젊은이들이 그토록 이루고 싶어 한 나라입니다. 그런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저는 역사와 국민 앞에 두렵지만 겸허한 마음으로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으로서의 책임과 소명을 다할 것임을 천명합니다"라고 선서했지만, 허울 좋은 말잔치에 불과했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를 늘어놓았지만, 결국 그들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임이 온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스웨덴에서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 누군지 물어보면 그 대답은 한결같이 타게 엘란데르(Tage Erlander)라고 말합니다.
1946년부터 23년간 총리를 지낸 그는 재임 중 11번의 선거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고, 마지막 선거에서는 스웨덴 선거 사상 처음으로 과반을 넘는 득표율로 재집권한 후 후계자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떠났습니다.
정말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20여년의 장기 집권이 가능하도록 스웨덴 국민들이 그에게 신뢰를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청년 시절 급진주의 활동을 한 좌파 정치인입니다. 그래서 총리로 선출되었을 때 왕과 국민들은 많은 걱정을 했고, 노사분규로 힘들어 하던 경영자들의 거부감은 대단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취임 후 그의 행보는 전혀 달랐다고 합니다.
야당 인사를 내각에 참여시키고 경영자에게 손을 내밀어 대화 후 노조 대표와 3자회의로 노사문제를 해결 했습니다.
그의 대화 정치 상징이 바로 '목요 회의'였습니다. 매주 목요일 스톡홀름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총리 별장에서 정·재계와 노조 인사들을 초대해 저녁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국회의원, 지방의원, 경총, 노총 대표 등 안 가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모임이었다고 합니다.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든 복지제도도 대화 정치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최고 권력자였지만, 검소한 삶을 살았습니다. 총리 시절 20년 넘은 외투를 입고, 신발도 구두 밑창을 갈아가며 오래 신었습니다.
부인 역시 검소했습니다. 집권 23년 동안 국회 개원식에 참석하기 위해 입던 옷은 단 한 벌이었습니다. 아들 부부는 "부모님은 국민을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며 "검소함은 두 분의 삶의 전부"라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특히 총리 시절 관저 대신 임대주택에서 월세를 내고 살았습니다. 출퇴근도 관용차 대신 어머니가 직접 운전하는 차를 이용했습니다. 임대주택은 재임 시절 서민을 위해 지은 아파트인데 특권을 버리고 국민의 삶 속으로 들어와 친구처럼, 다정한 이웃처럼 지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68년 국민들이 다시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총리를 그만둔 후 거처할 집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당원들이 급히 돈을 모아 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집은 스톡홀름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봄메쉬빅,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있었습니다.
부부는 마을 호수가 옆 작은 주택에서 16년을 살았으며, 그곳에는 총리 시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심지어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는 정직한 삶으로 경청하며, 겸손과 공감, 봉사의 삶이야말로 원칙과 상식의 사회를 만드는 비결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말없이 하나하나 자신의 계획을 실천하며 행동으로 보여준, 스웨덴이 존경하는 총리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 총리와 우리나라 대통령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리나라 대통령은 취임식 때 많은 말들과 약속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빈 수레가 되었고, 국민들은 존경은커녕 다음 대통령 선거만을 기다리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모든 공직자들은 국민의 안전과 질 높은 행복한 생활을 위해 헌신 봉사해야 하지만, 작금의 정부는 자신들의 부귀와 영화와 이념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세계에서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역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한탄하는 국민들의 울부짖음을 지금도 외면하고 있습니다.
사상과 이념은 다르더라도 정치는 오직 나라의 안보와 국민들의 안전과 행복을 위한 여건과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인데, 우리 정부는 그렇지 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잔치만 하고 있으니, 울분만 쌓여 가슴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특히 코로나19라는 질병 이후를 보십시오. 자신들의 잘못을 신천지나 교회에다 떠넘기면서 국민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증오심만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네로 황제가 불을 질러놓고 "기독교인들이 불을 내었다"고 광고하던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렇잖아도 요즘 기독교가 몰매를 맞고 있는 차에, 더욱 비신자들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참으로 난감합니다.
게다가 오늘날 대형교회들은 어떻습니까? 코로나 사태로 기독교를 탄압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의 놀음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군병들이 맞는지 통 구별이 되질 않습니다.
빌립보서 3장 2절에는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적인 행위와 외적 종교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에 대한 경계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강조하십니다.
신실한 예배와 하나님과의 교제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세상의 낙에 심취해 안일과 무사주의로 많은 양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대형교회 오늘날 모습은 참으로 기가 막히며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가 왔습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때, 주님을 위해 성도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면서 믿음을 지켜낸 순교자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이제 외치며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촛불을 들던 분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이제 촛불 대신 횃불을 들 때가 왔습니다. 숭고했던 우리 조상들의 믿음의 헌신을 따라, 이제 외치며 나아가야 합니다. 호의호식하며 잠잘 때가 아닙니다. 원로목사, 담임목사로 대접받으며 갖은 혜택 다 누리며 살아갈 때가 아닙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성령의 뜨거운 횃불이 다시 이 땅에 타올라야 하겠습니다. 나라가 이 모양까지 된 이유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책임도 있음을 회피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이 땅 초기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오순절 다락방 같은 성령의 역사가 임하여 뜨겁게 복음 전파를 했습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던 신실했던 헌신의 결과로 기독교는 부흥이라는 놀라운 역사를 창조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개독교'라는 말까지 나오는 슬픈 시대입니다. 이제 잠에서 깨어나, 안주하던 방향에서 전환하여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으로 이 나라 이 땅을 살려내야 하겠습니다.
이 나라가 자칫 공산화로 굳어버리면, 때는 이미 늦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저 무지몽매한 자들의 꾐과 술수에 넘어가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든 국민들에게 알리며, 저들의 잘못을 용납해선 안 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깨어 기도하며 찬송하며 하나님을 붙잡고 눈물의 기도로 부르짖어야 하겠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담대하게 나아간 에스더처럼, 이 시대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임을 깨닫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대형교회에서 먼저 성령의 횃불이 타올라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순교의 정신으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소임을 다하는 크리스천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 |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