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세계로교회 임지석 목사
(Photo : 기독일보) 나성세계로교회 임지석 목사

선교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어떤 지식이나 기술을 생각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이에 사람들은 선교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잘 교육받고 훈련된 전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에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역이 다 마찬가지지만 선교의 본질을 생각할 때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 이전에 이를 주관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분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선교에 대한 주님의 심정은 그분의 성육신을 통해서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그분이 친히 이루신 성육신은 선교의 본질을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서 선교의 목적과 방법은 물론이고 그 이유까지도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는 것이다. 선교를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먼저 주님이 이루신 성육신을 온전히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에 필자는 주님의 성육신에 나타나 있는 선교에의 열정을 이해함으로서 이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1. 새로운 문화에 빠져들어라

선교를 생각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 중에 동질화라는 용어가 있다. 이는 자기 것만을 고집하는 배타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 철저히 동화하려는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처럼 먼저 주어진 문화에 빠져 들어가야 하는데 선교사 자신의 문화를 기준으로 선교현장을 생각한다면 온전한 선교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에서는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서로 손을 잡는 모습이 일상적인 일이다. 이에 대해 그들이 동성연애를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한다면 선교에 큰 장애물이 될 따름이다. 다른 예로 미국에서는 사람을 부를 때 집게손가락을 위쪽으로 둥글게 말아서 사용한다. 반대로 태국 사람들은 손바닥을 아래로 하고 손가락들을 손바닥에 닿을 정도로 움직여서 사람을 부른다. 이상의 예에서 보듯이 선교는 무엇보다 자신이 처할 선교지의 문화와 환경을 이해함으로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 찾아오신 것은 단순히 생활환경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정도의 일이 아니었다. 그분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완전히 다른 문화권으로 이주해 오셨다는 말이다. 주님이 선교를 목적으로 언어도 나라도 문화도 환경도 전혀 다른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분이 머물었던 하늘과 그분이 찾아오신 이 땅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전혀 다른 문화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오직 동질화를 이루기 위해서 영광스러운 하늘나라를 뒤로 하고 죄악이 관영한 지상의 나라로 오셨다. 하나님과만 관계하시던 환경을 떠나서 죄 가운데 있던 인생들을 상대하기 위해 찾아오셨다는 말이다. 세상이라는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찾아오셨던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선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주님이 선교의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객체로 오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선교와 사람이 하는 선교를 Mission과 missions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주님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의 방법으로 선교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이러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사람이 중심에 있는 세상 문화에 적응을 하셨다. 철저히 낮아지고 희생하고 섬기는 가운데 죄 많은 인생들을 섬기는 종의 모습을 이루셨다는 말이다. 주님은 죽도록 인생들을 사랑하셨기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이처럼 죄로 얼룩진 세상 문화에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성육신을 통해서 선교지의 문화에 철저히 적응하셨던 주님의 선교에의 자세를 배울 수 있게 된다.

2.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완성하라

주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 했던 이유는 성경 여러 곳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대표적으로 요한복음 3:16에 잘 나타나 있는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심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사건이 성육신인데 그러한 의미에서 성육신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사랑의 완성이다.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고 찾아오신 순교까지도 감당하기 원하는 숭고한 사랑의 여정이었다는 말이다. 주님은 인생들을 죽음에서 건지기 위해 선교지를 찾아주셨으며 죽음으로 사랑을 실천하신 사랑의 대하드라마를 보여주셨던 것이다.

이에 우리는 주님이 보여주신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인생들이 흉내도 낼 수 없는 사랑을 실천하셨는데 이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결단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도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사랑을 말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인류의 역사에 일찍이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이루는 그 어떤 사랑도 이와 같이 완전할 수는 없었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말하지만 그들이 이루는 사랑은 실패하고 좌절하는 가운데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사랑이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장담하던 베드로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랑에 실패를 반복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교훈을 남겨주셨던 것이다.

주님은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에게 목양을 맡기기 전 그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했다. 자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에 걸쳐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지만 그의 대답은 그분에게 만족한 것이 되지 못하였다. 이때 주님은 사랑을 뜻하는 단어로 각기 다른 헬라어를 사용하셨는데 처음 두 번은 신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파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 사이에 이루는 '필레오'를 사용하셨다. 이는 곧 베드로가 주님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서 사랑하는지 물으신 다음에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이라도 사랑해 달라는 뜻이다. 이는 주님이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구하는 말씀으로서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분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 완전한 사랑을 주셨건만 우리는 신적인 사랑은 고사하고 가족이나 친구 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만큼도 그분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선교를 생각할 때 무엇보다도 그분의 사랑을 본받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선교를 감당하는데 있어서 고난이 찾아오고 어려움이 따를 때 주님이 이루신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죄의 대가로 받는 죽음의 형벌이 십자가인데 죄도 없으신 그분이 십자가를 져야 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우리의 선교는 그분의 십자가의 사랑을 증거 하는데 그 목적을 삼아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제한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을 내려놓고 희생적이고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선교지마다 그분이 참혹한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하신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을 몸소 체험한 사람이라면 어떠한 위험이나 장애물이 있을지라도 세상에 이러한 사랑을 담대히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3. 선교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라

주님이 이루신 선교는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그분의 모든 사역은 아버지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함으로서 가능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분은 이 땅에 오시는 순간부터 마지막으로 아버지 곁으로 가시는 순간까지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있었다. 주님은 심지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난의 잔을 앞에 두고 괴로워하실 때에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이처럼 죽음을 앞에 둔 순간에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는데 이는 아버지가 선교의 주인이요 주권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선교에 있어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것이야말로 확실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말이다.

주님은 이와 같은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지상선교의 틀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은 실로 수많은 선교사들을 통해서도 이룰 수 없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역이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땅에는 많은 선교사들이 있지만 그들이 감당하는 사역은 주님이 이루신 사역을 마무리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분은 이를 위해서 제자들에게 사역을 위임하셨는데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또 한 번 그분의 담대함을 보게 된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배우지도 못하고 가난하며 유명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사역을 맡기고 홀연히 떠나셨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러한 담대함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모든 사역의 결과를 철저히 아버지에게 맡기는 데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사역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나름대로 선교에 대한 해박한 이론이나 지식을 갖추고 있으며 훈련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선교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말이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눈에 보이는 선교의 결과를 얻는데 너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선교의 열매를 누리고 싶은데 이러한 것이 잘 나타나지 않음으로서 실망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선교사나 선교사를 보내는 조직체에서 무리수를 두기도 하는데 기한도 되지 않은 나무에서 과실을 얻으려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은 주님의 성육신을 깊이 생각해보고 이에서 답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각 사람은 선교의 도구로 사용될 뿐이고 그 열매는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고전 3장에서 보는 것처럼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이 따로 있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선교를 감당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오직 도구로 사용될 뿐이며 선교의 궁극적인 결과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의 손으로 결과를 얻으려 할 때 그만큼 선교가 어려워지고 부작용이 나타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할 일은 사람이 하고 하나님이 하실 일은 그분이 하시도록 기다릴 때 가장 아름다운 선교의 열매를 누릴 수 있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