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제자는 무엇보다도 스승이 하신 일을 수행하고 그분이 가신 길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들 모두가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있어서 무한한 영광이기도 하지만 도전이 되기도 한다. 신약성경에 보면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세 번 밖에 나오지 않는데 비해서 '제자'라는 단어는 무려 269회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의 목표는 그만큼 주님을 닮아서 그분의 제자가 되는데 있음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님의 제자가 되는데 있어서 우리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예수를 믿는 사람마다 그분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볼 일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데 있어서 세상에서 말하는 특별한 조건이나 자격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사실에 불편을 느낌으로서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말이다. 주님은 분명 제자로 부르셨건만 편안한 신앙생활에 안주하는 가운데 제자의 길을 외면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제자로 부르시는 주님의 절박한 심정을 깨닫고 그분의 제자로 거듭나는 변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제자의 길
주님의 제자에 대한 가르침을 생각할 때마다 쉽게 떠오르는 구절이 있는데 벧전 2:21에 나오는 말씀이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핵심적인 두 개의 동사를 발견하는데 하나는 '본을 끼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따라 오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일방적으로 명령을 한 것이 아니라 먼저 본을 보이시고 이를 따라오도록 하셨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란 그분이 말씀과 행함을 통해서 가르치셨던 일들을 이유나 변명하지 않고 그대로 따르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도를 따른다는 것이 이처럼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 그 이유는 많이 있겠지만 사람들의 생각이 복잡하고 이기적인 관계로 우선 누군가를 따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많은 때 보지만 신앙생활 가운데에도 하나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따로 국밥처럼 따로따로인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고집불통이 되어 이를 끝까지 관철하려는 경우도 보게 된다. 그러한 이유로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가르치신 제자도에 부응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사역하시던 주님의 공생애 초기의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그분이 갈릴리 어촌에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의 일화를 상기해보면 좋을 것 같다. 주님이 언젠가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다가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를 만나서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당시 이 말을 들은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리고 이어서 등장하는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반응은 또 어떠했는가? 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배와 그물과 육신의 아버지까지 버려두고 즉시 예수를 좇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배나 그물은 그렇다 치더라도 육신의 부모를 버려두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련만 그들은 그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것도 이것저것 재고 따질 시간적인 여유도 없이 즉시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보듯이 당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제자들은 그분이 가르치신 제자도를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당장 불이익과 손해가 생기고 삶이 불편해지는 상황에도 그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이곳저곳에서 그들을 가르치실 때 가족과 생업도 포기하고 그분을 따랐다는 것이다. 주님이 친히 가르치신 제자도는 이와 같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을 따르는 일에서 시작된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제자도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이루는데 있지 않고 그냥 주님을 따름으로서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때 내 생각이 맞을 것 같아도 주님의 생각보다 더 확실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선지자는 이사야 55:8-9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제자가 되지 않는 사람들
예수님은 이 땅의 사역을 마감하시면서 믿는 사람들에게 사명을 허락하셨다. 이는 마태복음 28장에 기록되어 있는 대 사명 (The Great Commission)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내용이다. 그분은 전 사역을 통해서 오매불망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심정으로 영혼구원에 올인 하셨다. 주님의 사역은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집중되었고 이 땅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제자들에게 이 일을 위탁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리하여 주님의 제자는 무엇보다 그분의 심정을 헤아려서 그분이 분부하신 일들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사람이라면 무슨 일이 있든지 주어진 복음전파의 사명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제자로 부름 받은 사람은 많지만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심지어 자신이 제자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말이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오랫동안 직분을 가지고 있다 해서 자동적으로 제자가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제자 학교를 졸업하고 제자 세미나에 열심히 참석한다고 제자가 되어지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답답하고 두려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제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전혀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주님이 무어라고 하실 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자신은 주님의 제자로서 대단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볼 때 충격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성의 전도자 제스 무디 (Jess Moody) 목사는 오늘날 교회마다 '제자화 되지 못한 제자들'로 가득하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교회마다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잉태할 줄 모르는 무정란과 같은 존재들이 즐비하다는 말이다. 무늬는 예수를 닮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그분과 전혀 관계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따름으로서 새로운 생명을 낳지 못한다면 그분의 제자로 인정을 받을 수 없다. 예수의 제자라면 성령의 군사로서 삶 가운데 사탄의 세력을 제어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떠한 고난이 찾아올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주님의 빛을 비추는 증인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화려하게 예배를 드린다 한들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은 그리스도의 제자된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을 들어 사용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제자로 다시 태어날 때
제자의 길을 가기 원하는 사람은 때로 값비싼 대가도 치를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이 죄와 사망에 빠져있던 인류를 구하기 위해 몸소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사실을 생각해 보자. 그분이 겪으신 고난은 제자로 살아가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 이 땅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 어떠한 희생도 각오할 수 있어야 한다. 제자가 되기 원한다면 그분이 받으신 것과 같은 고난은 아닐지라도 마땅히 그분을 따르는 희생과 어려움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주님의 열두 제자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그분의 제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주님을 만나면서 예수의 제자가 되었는데 세상을 따르던 사울이 주님을 따르는 바울로 거듭날 수 있었다. 초대교회를 보더라도 폴리갑을 비롯해서 예수를 따르다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이 땅에서는 이름도 없는 사람들이었을지 몰라도 주님의 나라에서는 유명한 사람들로 기억되리라 믿는다. 이와 같이 주님의 제자로 한번 선택을 받으면 영원한 제자로 기억된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로 거듭나야할 당위성을 깨닫게 된다. 제자가 되기 원한다면 습관적으로 예수를 믿는 종교생활을 이루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일찍이 독일의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가 그의 저서 '제자도의 대가' (The Cost of Discipleship)에서 말했던 것처럼 '값싼 은혜'를 누리는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는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들 가운데 알곡과 쭉정이가 구분될 것이며 이에 대한 심판이 있음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도 예수를 믿는 사람마다 그분의 말씀은 물론 성령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세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하루하루 변화무쌍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제자의 사명을 깨달아야 하는데 누가복음 9:23은 이렇게 교훈하고 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우리가 제자로서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질 때만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자신의 의를 부인하고 안에 숨겨져 있는 죄와 허물의 더러운 찌꺼기를 드러내고 고백함으로서 주님과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라는 이름을 통해서 세상을 따르던 자아가 사라지는 그 때가 바로 제자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