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얼마 전 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꽤나 인기 있는 뇌과학자의 강연입니다.

그분의 강의 내용이 대충 이러합니다. "이 세상은 누군가에 의해 시뮬레이션되어 있을 가능성은 통계적으로 매우 높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 세상이 시뮬레이션되어(미리 잘 짜여진) 있을 가능성이 크므로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여기까지는 크리스천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은 "그러므로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또 "그러므로 섹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시뮬레이션을 만든 존재가 봤을 때,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재미가 없는 시뮬레이션은 그냥 꺼버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재미있고 더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경탄을 하면서 듣습니다.

2. 보면서 과학도의 접근이 어떻게 이런 결론으로 진행되는지 충격을 받고, 이러한 이야기를 젊은이들은 듣고 왜 경탄할까 궁금했습니다.

살펴보니, 최근 인기를 끄는 강의가 이런 식입니다. 논리로 접근해 감성을 만지는 것. 결국 감정을 이끌어내서 던져주는 메시지는 "니가 중요해"입니다.

전제는 매우 과학적으로 접근하면서 결론은 매우 비이성적이고 추상적입니다.

여러분, 결국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삽니다. 과학적인 접근으로 먼저 세상을 과학의 틀에 가두고, 결국 감성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과감합니다.

그 중심에는 "네가 중요해"라는 메시지로 갑니다. 어쩌면 이렇게 변함이 없을까.

하나님이 에덴과 너, 그리고 이 선악과 설계했지? 결국 네가 못 먹게 된것도 하나님 때문이지? 그런데 먹어! 네가 하나님이 될거야! 인류가 탄생할 때부터 생겼던 사탄의 전략이 기가 막히게 똑같지 않습니까?

3. 삶은 선택과 비선택의 연속입니다.

모두 이 땅에 태어났지만 이것은 인간 누구의 선택도 아닙니다. 비선택적입니다. 비선택적으로 시작했지만, 살아가는 것은 선택입니다.

누군가는 암울한 환경에 태어났기 때문에 비관하는 선택을, 누군가는 그곳에서 의지를 갖고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부유한 환경이기 때문에 그것을 나누고 살기로 선택하지만, 누군가는 부유함을 자랑하며 삽니다.

말하는 것은 공기의 진동을 통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비선택적인 환경으로 재창조됩니다. 그렇게 비선택적 환경에 노출된 우리는 거기서 또 다른 선택을 합니다. 무조건적으로 들은 것을 선택해서 말하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세상은 '들음과 말함'이 이루어지는 연속성인데, 그것은 다시 말하면 선택과 비선택의 연속인 것입니다.

4. 그래서 신앙 생활은 들음의 훈련입니다.

얼마큼 듣느냐가 우리 믿음을 성장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면서 과연 듣느냐는 겁니다.

어린아이 때는 말을 잘 듣는데 어른들은 말을 안 듣습니다. 심지어 어른들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아이들이 성장할 때마다 달라집니다.

"너만 있으면 돼", "믿음이 중요해"에서 "그래도 공부는 해야지", "대학은 가야지", "취업은", "그래도 돈이".

말을 잘 들을 때 어른이 하던 소리와, 아이가 성장하며 스스로 생각할 때 듣게 되는 소리가 달라집니다.

성장하면서 지혜가 생기기 마련인데, 성장하면서 듣는 이야기가 달라지면 삶이 불일치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므로 들음의 삶이 불일치되면 다른 말을 듣게 됩니다.

적어도 일치된 목소리 말이지요. 세상의 목소리에 아이들이 장성하면서 귀 기울이는 이유입니다. 적어도 세상은 목소리가 일관되거든요.

"놀자", "네가 중요하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요일 4:5)".

5.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님이 오순절에 임하셨습니다.

이 성령님이 오신 것은 사람이 선택해서가 아닙니다. 비선택적으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임했습니다.

성령님은 바람처럼 임하시기도 하는데 그 표현이 이렇습니다. 2절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바람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노'에는 숨결, 혹은 바람입니다. 아주 강한 숨결이 바람처럼 불어왔습니다.

불처럼 임하시기도 합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3절)".

불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휘르'는 태우거나 뜨겁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의 특징이 있다면, 그 보편적인 것이 개별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편성과 개별성은 늘 함께 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성령님이 가진 보편적 특징과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형태는 모두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처럼 강력하게 성령을 받아서 뜨거움으로 성령님을 받아들입니다. 이런 경우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늘 뜨거워야 합니다. 예배도 뜨겁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바람과도 같은 성령님으로 온 몸에 받아들여, 그는 여기저기를 향해 바람처럼 멈춤이 없어야 합니다. 잠시라도 멈추면 우울해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반면 비둘기같습니다. 누가복음 3장 22절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우리가 특정한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듯이, 성령님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게 임재하실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각자 다르게 임하시지만 그 본질은 하나인 것입니다.

6. 저는 이 성령님이 임하신 오순절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너무너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 4절은 성령님이 임하시고, '다른 언어'라고 구태여 구별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님이 그 자리의 모두에게 임했는데(보편성), 각자에게 임하심은(개별성) 무엇일까요? 말씀을 자세히 보면 해답이 있습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이라고 기록된 '말하기'와 뒤에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먼저 나온 성령이 말하게 하심은 '아포프뎅고마이', 크게 분명하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주 강하게 주신 마음입니다. 이것은 마치 바람과 불처럼 강렬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령님이 충만해진 사람들의 언어가 입을 통해 전달될 때의 말하기는 '랄레오'라고 번역되었는데, 이 단어는 그저 평범한 일상의 언어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7. 여기에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온 사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네, 이 땅에 성령님도 그렇게 오셨습니다. 유일하신 성령님께서 각각의 사람들에게 임하시고 그 사람들에게 맞추어서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나아가 사람들 사이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언어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화려한 언어들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언어로 바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8. 누구를 향한 말인가?

'다른 언어들'이라고 기록된 말을 보면 이 '다른'이라는 단어는 '헤테토스' 라는 말입니다. 이 뜻은 대표적으로 죄인들의 짝! 그리고 한 마디로 '남'이라는 뜻입니다.

똑같은 표현으로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6장 12절에서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모양, 이때도 '헤테토스',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이웃, 별로 관심도 없는 이웃, 그가 예수님이었습니다.

이웃 사랑은 생판 나랑 상관없는 남을 예수님 대하듯 살 때 구현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짝이 되어줄 때 성령이 뜨겁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9.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모두가 똑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모두가 예배당에 와서 똑같이 아멘을 이야기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할수록 세상 깊숙히 들어가 그들에 동화되지 않는 충만함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다양한 사람들과 더불어 공생하고 있습니다.

10. 그러한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러므로 먼저 교회 안에서 서로의 언어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불처럼 이야기하고 누군가 바람같이 오가며 누군가는 늘 조용해도 그것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를 시기하지 않습니다.

이해(understand)는 어려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나와 다른 사람, 나와 전혀 다른 목소리가 있는 사람 곁에 서있어줄 수 있는 겁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내 코드랑 맞는 사람 옆에만 있으려고 합니다. 나랑 말이 안 통하면 그 자리를 떠나고 싶어 안달합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언어를, 완전히 다른 들음의 귀를 가진 세상 사람들에게 사용할수 있겠습니까?

비로소 우리 모두가 서로의 언어를 들을 귀를 갖고 있을 때, 사도행전 2장 5절에서 "그때..."라는 '불변 전치사'로 시작되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전 세계 각처에서 정말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몰려든 순간이었습니다.

11.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과학도가 말한 이야기를 경탄하며 듣는 젊은이들의 마음에는 뭐가 있을까요?

상처가 있는 겁니다. 부대끼며 살면서 받은 상처 말입니다. 누구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듯한, 누구도 내 편이 없는 듯한.... 그러나 그 상처는 "내가 중요해"라는 말로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다시 물어도 죄송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왜요? 내가 중요하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의 삶은, 어디 가든 내가 그곳에서 주인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나와 또 다른 '헤테토스'들이 만나 부딪칩니다. 그 '헤테토스'는 철저히 '남'입니다.

그들에게는 다 자기만의 '아포프뎅고마이', 강한 자기 말만 있습니다. 들음이 없습니다. 결국 또 부대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중요해!"라는 선택으로 만나는 사람들끼리 또 부딪칩니다. 그곳은 서로 다른 사람들의 말이 가득합니다.

결국 '나'라는 존재만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세상은 점점, '너'는 나를 위한 도구에 불과할 것입니다.

결국 내 주변에 아무도 없게 만드는 선택은 내가 중요하다고 가르침 받고 선택한 우리 각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12. 우리는 그 세상에 한복판에서, 오늘 보편적인 말씀을 잠시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참된 마주침이 없는 마주함만 가득한 시대에 여전히, 먹고 마시고 놀고 공부하는 모든 것에는 자유가 있지만, 예배에는 자유가 없는 것이 당연해지는 보편성을 갖춘 시대.

유일하게 마주칠 수 있는 집 안의 어른들은 가정의 달을 맞아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줬을까?

우리 아이들을 향해 말하는 선택을 살고 있는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어떤 비선택인 환경들을 만들고 있을까?

"코로나는 무섭다, 조심하라" 하지만 하나님은 두렵지 않은 삶을 살도록 인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2. 사랑하는 여러분, 코로나19 시대가 오면서 무섭게 개인주의 시대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접근해, 이제 사회적 거리두기로 거리두기가 당연해진 시대에 하나님 탓을 할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거리두기를 하라고 가르칠 것입니다. 생명을 위해 생명과 멀리 하라는 비과학적인 시대입니다.

그것은 철저히 '헤테토스', 남을 멀리 했던, 개인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거리두기가 답이라고 믿으며 가르침받은 세대입니다.

그 가운데 코로나19가 사라진 순간 다시 마주쳐야 하는 상황 속에서, 각자의 다른 삶을 묶어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각자의 개별성을 존중하시되 모두의 보편성을 갖추신 성령님의 언어임을 잊지 마십시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이러한 때를 위해 하나님은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습니다.

모두가 자기가 경험한 이야기를 진리처럼 말하는 시대에, 가장 강력한 메시지 '아포프뎅고마이'를 평범한 일상의 언어 '랄레오'로 공감해 주시는 성령님에 흠뻑 취해야 합니다.

이제 그분과 하나 되어, 우리 곁에 이미 존재하는 '헤테토스', 완전히 다른 남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이가?"

"남 주러 배웠습니다."

"남 주러 벌어왔습니다."

13. 혹시 여러분, 주변에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은 여러분을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입니다.

서로 같은 사람끼리 모여 자기만의 경험을 말하는 곳이 교회가 아니요, 나만을 위해 오신 그 하나님이 나와 전혀 다른 '헤페토스'를 위해 그를 이해하는 말로 살아갈 수 있을 때, 비로소 여러분 마음 가득 성령님께서 사용하실 것입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