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지영 교수(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실천신학)
(Photo : 기독일보) 안지영 교수(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그런데 여기에서 몇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다고 되어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브람은 아내 사래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을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내 사래가 자기의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주기로 결심한 이유가 매우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자식을 주시지 않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자식을 주시겠다고 한 여자가 자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첩을 얻어서라도 남편의 아이가 생길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지요. 그런 선택이 그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물론 속이 상하기는 하겠지만. 

아내의 제안이 아브람에게는 매우 설득력이 있는 제안이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얼마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고 끄덕였는데, 그 믿음이 아브람 속에 있기는 한 것일까요?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사래의 제안으로 더 구체화된 것처럼 아브람에게 다가옵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은 막연한 기다림을 포기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쉽게 무너져 내리게 될 믿음의 소유자를 의롭다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믿는다고 하고서는 그 믿음을 저버린 아브람을 두고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나님께 인정받은 인물로 규정합니다. (롬 4:3) 바울이 로마 교회로 보낸 편지에서 묘사한 아브람의 믿음을 보면, 그의 믿음을 완벽한 믿음으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나온 아브람의 실상을 보면 의롭다고 여길 아무런 여지가 보이질 않습니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아브람의 믿음의 실상과 로마서에서 말하는 아브람의 믿음의 실체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내가 만약에 하나님이었다면, 아브람의 믿음이 아직 여물지 않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믿음을 두고 의롭다고 칭찬해 주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너의 믿음은 아직 온전치 않기 때문에 너를 의롭다고 할 수가 없다. 더 분발해야 한다'라고 채근했을 겁니다. 지금의 믿음으로는 부족하다고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거기에다 앞으로 일어날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고했을 지도 모릅니다. 얼마되지 않아서 후사를 얻으려는 욕심에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넘어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와 함께 말입니다. 아브람이 하갈을 취하는 일이 생길텐데 그것을 아는 내가 어찌 그의 믿음을 칭찬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림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그런 부족한 믿음을 가진 아브람을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의 로마서를 보면, 그 믿음을 마치 완벽한 믿음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런 수수께끼 같은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의외로 그 단서를 우리 주변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장면에서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이 가까운 아이가 가까스로 일어서서 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을 포착한 엄마의 표정을 상상해보지요. 어린 아이가 한 발을 내딛으려 할 때, 엄마가 아기에게 "그래, 그래, 조그만 더, 더, 옳지!"라며 가슴 졸이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아기가 한 발을 내딛으면, 너무 좋아서 "아이가 걸어요!"라며 환성을 지르지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을 합니다. 한 걸음 밖에 걷지 못했는데도 말입니다. 또한 아이가 입을 떼어 "마~" 하고 소리를 내면, "얘가 엄마라고 해요!"라며 좋아하는 장면도 흔합니다. 이렇게 엄마는 어린 아이가 금방 넘어질지라도 한 걸음을 뗀 것을 두고, 마치 완벽히 걸은 것처럼 봐주며 기뻐합니다. 그리고 아기의 불완전한 엄마 소리에도 완전한 엄마 소리로 여기며 기뻐합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것을 완전한 것으로 봐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아브람이 '예, 믿습니다'라는 고백 후에 금방 딴 짓을 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그가 시도한 믿음의 첫 걸음을 완전한 걸음으로 받아주셨던 겁니다. 그의 부족한 믿음을 온전한 것으로 받아주시며 기뻐하시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이유 외에 그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요! 하나님의 그 사랑은 '은혜'입니다. 부족한 우리를 온전한 존재로 받아주시는 자비하심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겁니다.

내가 아브람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이 장면을 통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나는 내가 가진 허약한 믿음 때문에 힘들어 했었지요. 쉽게 무너지는 나의 연약한 믿음 때문에 자책하는 내 자신이 싫었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니, 나의 신앙 생활은 언제나 롤로코스터를 타는 식으로 부침이 매우 심했었지요. 언제는 천상에 있는 것 같았다가, 다른 때는 저 깊은 어두운 심연에 갇혀있는 것 같았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했던 것도, 선교 사역을 할 때도 그 족쇄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했지만, 그 은혜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를 못했던 겁니다. 그런 내가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수수께끼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여기에서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가진 믿음의 허약성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라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나의 시선을 집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가 없이는 나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압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어떠한 충성도 너무나 허약한 충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연약한 충성을 하나님은 마치 온전한 것을 받으시는 것처럼 기뻐하십니다. 이러니 내가 그 어떤 것으로 나의 괜찮음을 드러낼 수가 있겠습니까! 나의 괜찮음이란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그것 자체가 온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얘기하다 보면, 은근히 불안해하는 입장의 목소리도 들립니다. "하나님의 은혜, 은혜 하면서, 자기들 생긴대로 그냥 살아버리는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는 것은 아닌가?" 일리 있는 말입니다. 한 사람의 호의를 악용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오남용 때문에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흘러내리는 은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지를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가르치느냐가 중요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그 은혜를 남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도 은혜를 베푸시지만, 그 은혜를 남용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람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암송아지, 숫염소, 숫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를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첫 세 짐승은 머리부터 해서 몸통을 위에서 아래로 쪼개어 양 옆으로 나란히 놓게 하셨습니다. 두 비둘기는 몸체가 작기 때문에 쪼개지 않고 그대로 양 옆으로 놓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밤이 되기를 기다리셨다가, 주위가 캄캄해지자 연기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서 갈라놓은 짐승 사이를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람의 자손이 이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의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러한 의식에 대해 언급을 했습니다. (렘 34:18-19)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둘 사이에 아주 중요한 약속을 할 때, 이렇게 동물을 쪼개서 나란히 배열을 하고는 약속의 당사자 두 사람이 그 사이를 함께 걸어갔다고 합니다. 둘 중에 어느 누가 이 약속을 어길 시에는 그 사람이 이렇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의미였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여기 두 사람이 걸어가야 할 의식에 하나님을 상징하는 불만 지나가고 아브람은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는 겁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과 함께 쪼개 놓은 동물 사이를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통과하는 장면을 목도하기만 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런 뜻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람, 내가 너에게 약속하는 것은 내 생명을 걸고, 나의 이름을 걸고 하는 약속이야. 그러니 이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그러니 너는 나의 이 약속을 잊지 말았으면 해."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 희생제물 가운데를 지나가도록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인 것을 하셨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약속 의식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잊지 말기를 바라셨던 겁니다. 그의 믿음이 금방 사그러질 믿음이 아니라, 굳게 세워질 믿음으로 전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셨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아브람이 사래의 제안을 거절하기를 바라셨던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는 사랑이입니다. 흔들리고 넘어지는 우리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은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의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믿음이 계속 자라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다는 사실에 안식을 누리면서, 계속 전진하기를 바라시는 사랑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강한 믿음의 소유자라도 다 불완전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온전한 믿음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현재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부족한 믿음일지라도 온전하게 받아 주시고 의롭다고 여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을 다하여 더 나은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비록 실패한다 할지라도. 그 실패한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