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떼를 잃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
믿는 사람들이 세상만도 못하다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듣는데 그만큼 신앙과 양심을 팽개친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언젠가 목사들에게 위로와 휴식을 제공하기 위한 취지로 시작했다는 목사 수련회에 갔다가 경험했던 일이다. 같은 테이블에 자리했던 한 목사가 탄식하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행사를 진행하며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교회에 출석하던 교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아이러니한 현실을 경험하면서 자신은 수련회를 통해서 휴식을 얻고 위로를 받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이다.
또 다른 목사가 들려주는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다. 교인 한 사람이 몇 주째 무단으로 교회에 출석도 하지 않고 연락도 닿지 않아서 무조건 심방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못 볼 것을 보았는데 그 집에 들어서자 낯이 익은 어느 교회 목사가 심방을 왔었는지 자신을 보면서 황급히 떠나더라는 것이다. 이처럼 목사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성도들을 보면서 목양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번주에 같이 예배를 드리던 사람이 다음 주에는 다른 교회에 가서 새신자로 소개를 하는 가운데 그 교회는 이러한 사람을 환영하고 즐기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겠다는 충격적인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양떼를 잃는 일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해서 온전한 신앙생활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한번쯤 반문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목양의 절대적인 속성은 사랑
주님은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질문을 한번도 아니고 세번씩이나 하셨을까. 이는 그에게 목양을 맡기기 전 목양의 속성을 확실히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는 생각이다. 목양에 있어서 절대적인 속성은 주님을 사랑하는 일로서 그분에 대한 온전한 사랑이 없이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실 때 사용한 단어는 '아가파오'였는데 베드로는 '필레오'를 사용해서 대답하였다. 전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신적이고 숭고하며 이타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반면에 후자는 인간적이고 조건적이며 친근하고 우정에 가까운 사랑을 가리키고 있다.
두 번째 질문은 다른 것과 비교하지 않고 다만 사랑하는 여부를 물으셨던 것이다. 미루어 볼 때 첫째 질문은 다른 제자들보다 우월한 충성심을 보이려 했던 베드로의 호언장담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기 원하셨던 것 같다. 예수님은 자신과 베드로 사이의 관계를 묻고 있는데 다른 것과 비교하지 않고 그가 일대일의 관계에서 얼마나 진정으로 사랑하는가를 알고자 하셨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앞부분과 동일한데 그는 적어도 진지하고 솔직하며 과장 없이 대답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세 번째는 앞 두 번의 경우와 달리 '필레오'를 사용하시는데 이는 베드로가 계속해서 사용한 단어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진실성과 주님에 대한 사랑을 수용하겠다는 마음의 표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세 번째 질문을 받고는 근심에 빠지게 되는데 이유는 그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으며 '모든 것을 아시오매'는 기독론적인 고백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그의 세 번에 걸친 대답 가운데 세 번째 '아시나이다'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헬라어 '기노스코'의 번역으로서 어떤 경험을 매개로 하여 얻어지는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들은 도대체 누구의 양이냐?
주님은 당신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을 확인하신 후에 '내 양을 치라'는 사명을 주셨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베드로에게 목양을 위임하면서 단 한 번도 베드로의 양이라고 말씀하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은 오직 당신이 위임하는 양을 치라 하셨는데 이는 양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시는 말씀이다. 오늘날 목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양의 소유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인도하고 훈련하며 보호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을 뿐이다. 바로 여기에 목양의 진리가 있고 비밀도 담겨있는 것이다.
이에 목자는 목양을 생각함에 있어서 먼저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분에 대한 사랑이 확실치 않다면 결단코 목양이라는 고난의 행군을 통해서 받게되는 트라우마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무소유를 자랑할 줄 아는 것으로서 어떠한 환경에도 그분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목양의 기본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쏟으셨듯이 어떠한 유익이나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철저히 바치는데 있다. 이에 목양을 맡은 사람들마다 그분에 대한 '아가파오' 사랑은 아니라도 최소한 '필레오' 사랑이라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마치 양떼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간직하려 했던 목자들이 있다면 속히 이러한 정욕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밖으로 나타나는 숫자에 현혹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섬길 수 있으면 그만이다. 양 몇 마리를 잃었다고 의기소침하거나 몇 마리를 얻었다고 교만해질 필요나 이유도 없다는 말이다. 욥이 중심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주신자도 여호와시고 취하신 자도 그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은 오늘도 신적인 사랑을 원하지만 베드로처럼 연약한 인생은 이러한 사랑을 다하지 못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주님은 세 번째 질문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 사이에 이루는 '필레오'의 사랑이라도 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사랑은 아무리 열심을 다해도 '필레오'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목자는 주님이 맡겨주신 양떼를 그분의 뜻에 따라서 보살피고 양육하는 가운데 언제든지 아무런 미련없이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사명감으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결코 양떼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