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이신득구, 以信得救)'는 것만 알면 되지, 왜 그런지에 대한 복잡한 과정은 몰라도 된다고 말한다. 비유컨대 스위치만 누르면 방 안에 불이 켜지는 것만 알고,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그렇게 되는지 자세히 몰라도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것을 아는 것과 '스위치만 켜면 방에 불이 들어옴'을 아는 것을 동일한 무게로 취급할 수 없다. 후자는 일상의 잡학(雜學)이지만 전자는 영원한 생명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불신자에게 전도할 때는 예수님처럼 '나(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만으로 족하다. 그들에겐 자세한 설명이 오히려 복음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고, 그들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믿고 구원받은 이들에게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깊게 해 준다.
전기 기사(electrical engineer)가 발전소에서 가정까지의 전원 유입과정들을 꿰뚫고 있듯, 설교자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들을 소상히 알고, 회중들에게 정확히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과정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그 전에 먼저 '구원' 개념부터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여타 종교에서 말하듯 단지 '신을 신뢰한다, 의지한다'는 개념이 아니다. 신앙의 목적도 단지 삶에서 맞딱뜨려지는 위기들을 극복하기 위한 지렛대로 삼기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성경에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나 질병, 죽음으로부터 하나님의 건짐과 도움을 받는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통해 성경이 말하려고 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심판에서 능히 구원하실 수 있음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것들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구원을 단지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대개 '기독교 신앙은 뜬구름 잡는 추상적인 것이 아닌 현실적인 대안이다'는 슬로건을 선호한다.
그러나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라는 '예수' 이름 그대로, 기독교는 죄에서 구원받는 종교이다. 기독교 신앙의 목적을 '죄와 심판에서의 구원'에 두지 않으면 참된 신앙도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도 가질 수 없다.
◈그리스도의 율법 성취 위에 세워진 '이신득구'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이신득구(以信得救)'는 그리스도의 대속과 대행의 율법 완성을 기반으로 한다. 만일 그의 율법 완성이 없었다면,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이신득구' 경륜은 세워질 수 없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는 성경 말씀 그대로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는 말씀 역시, 믿음의 경륜이 율법 '폐기'가 아닌 율법 '완성'을 지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은 '율법 시대'이고 신약은 '은혜 시대'라는 이분법적 토대 위에, 하나님은 '이행득구(以行得求, justification by law)'의 구약적 구원 경륜에서 '이신득구'의 신약적 구원 경륜으로 진전시켰다거나, 혹은 '이행득구'의 경륜을 폐하고 '이신득구'라는 새로운 구원 경륜을 도입했다 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구원의 경륜은 동일하다. 시대를 불문하고 죄인은 동일하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다만 구약에는 '이신득구'의 도리가 그림자인 '제사'와 '율법 규범들'을 통해(히 9:24; 10:1) 희미하게 나타났고, 신약에는 '그리스도'와 '믿음'을 통해 확실하게 나타났기에 사람들에게 착시현상을 일으킨 것뿐이다.
구약 성도가 짐승 제사를 드려 구원을 얻었던 것은 제사라는 율법 준수의 결과 때문이 아니고, 짐승 제사로 예표된 그리스도의 대속적 의로 된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신득구' 경륜은 어느날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것도, 율법을 폐기시킨 결과로 파생된 것도 아니다. 율법의 성취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성한 기조(基調, basis) 위에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이신득구' 경륜이 세워졌다(롬 10:4).
◈믿음을 통한 의의 전가
'이신득구'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율법적 의(義) 위에 기반했다면,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율법적 의는 믿음으로 죄인에게 전가된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는 말은 그리스도가 완성한 율법의 의(義)를 믿음으로 전가 받아 율법의 정죄와 의무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믿음으로 전가된 의 만이 완전하고도 유일한 하나님의 의이기에 그 의를 전가받은 죄인은 율법의 의무에서 벗어나게 된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
사도 바울이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롬 3:21)'를 말한 것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 무죄한 상태에서 지녔던 불완전한(타락 가능한) '율법적 의'와는 다른, 인간이 손상시킬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의'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완전한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취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 이행득구자(以行得求者)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믿음의 의'를 완전한 하나님의 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만한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의는 율법을 행함으로 완성하는 '율법적인 의' 뿐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믿음의 의'를 주장하는 예수쟁이들이 '율법의 의'를 무너뜨리려는 망령된 자들로, 또는 자신들의 의를 세울 기회를 뺏는 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바울은 '믿음의 의'를 부정하고 자기 의로 구원받으려는 그들을 하나님의 경륜을 무너뜨리는 자로 변박(辯駁)하며,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는 자(갈 3:10)"라고 독설했다.
그렇다고 바울이 '율법의 의(義)'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율법의 의를 충족시키지 않고는 율법의 요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오직 인간은 '율법의 의'로만 구원받으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완전한 율법의 의 없이는 구원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율법이 요구하는 의(義)의 수준이 너무 높아 죄인은 그것을 이룰 수 없기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 율법의 의를 대신 이루도록 하셨고, 죄인은 믿음으로 그의 의를 전가받게 하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것은 율법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율법을 높이신 하나님의 의도를 간파한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율법이다. 죄인 됨도 사망도 율법에서 왔다(고전 15:55- 56). 율법이 없으면 심판도 없다(롬 5:13).
구원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이룬 율법(마 5:17)의 의를 전가받아 율법의 성취자가 되니 더 이상 율법의 요구를 받지 않게 됐고, 그렇게 율법의 의무에서 벗어나니 정죄 받을 일이 없어 마침내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 역시 율법의 의무와 정죄에서 벗어났다는 확신에 다름 아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의 의무에서 벗어남 곧 구원을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더 이상 그(남편)에게 매이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롬 7:1-6)".
다시 '왜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가?' 하는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 대답은 한 마디로, 예수를 믿으므로 죄인이 이룰 수 없는 율법적 의를 그로부터 전가 받아 율법의 정죄와 의무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신득구'가 이루어지기까지 그 이면에는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대행(代行)의 율법 완성이 있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義)의 전가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하시려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의 사랑과 선택의 경륜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 이신득구는 율법도 규모도 무시된 채 아무렇게나 임기응변적으로 나온 '싸구려 구원'이 아닌, 하나님의 자기 희생에 기반한 것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