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복음이 가리워지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은 천국을 알게 해주고 그곳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 위한 일곱 가지 비유를 담고있습니다. 이 그 중에 첫 번째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씨 뿌리는 자가 논밭에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는 씨앗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은 사람들이 밟고 다녀 단단해진 길 위에 제대로 묻혀 싹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들이 즉시 먹어치웠다고 합니다.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돌 틈새에 흙이 조금씩 끼어있는 곳에 떨어진 씨앗은 곧 싹이 납니다. 그러나 흙이 너무 얕아서 태양의 뜨거운 열기에 뿌리를 더 내리지 못하고 말라 죽습니다.
또 세 번째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지만 가시가 씨앗이 자라지 못하도록 막고 영양분도 흡수 못하고, 태양도 가려서 자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했습니다.
길가에 떨어지는 씨앗이 의미하는 것은 마음이 강퍅해져서 시멘트 바닥처럼 완전히 굳어버린 인생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 것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억지로 누군가 무엇을 주면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가 마귀에게 즉시 빼앗겨 버리고 맙니다.
얇은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응어리진 심령으로 세상을 살면서 누군가를 원망하며 한을 품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감정이 너무 예민하며 모든 불행은 남의 탓으로 돌려서 시비하며 걸고 넘어집니다. 이런 사람도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로 구원 얻을 소망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다는 것은 상대방을 찔러 아프게하고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우거져있어서 다른 것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습니다. 도리어 자기가 상하고 찌들어 죽어가는 것입니다. 정말 어리석고 불행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의 싹은 틔울 수 있지만 믿음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결실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십니다.
아스팔트 같은 굳은 땅을 파서 일구었고 덩어리도 깨뜨리고 돌도 추려내고 가시나무와 엉겅퀴도 뿌리째 다 뽑아내 던져 버리고 좋은 땅을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땅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어나고 향기도 풍기며 열매도 영글었습니다. 그 중에 믿음이 온전하게 한 평생을 지극정성으로 잘 가꾼 사람은 백 배의 결실을 이루어 드렸을 것입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자기믿음이 너무나 지극정성이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백 배의 전도열매를 맺게 해주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믿음이 바로서야 하는 것입니다. 가시나무 엉겅퀴는 다 뽑아 내버려야 하는데 그냥 잘라내기만 하면 그 뿌리가 남아 있다가 또 가시가 돋고 뻗어나게 됩니다.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의 결실이 각각 다른 것은 모두가 회개한 마음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얼마만큼 말씀에 전적인 순종의 생활을 힘썼느냐에 따라 성과가 달라집니다.
10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해변에 둘러서 있는 많은 무리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시냐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이 제자들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 많은 무리들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1:36에 보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했습니다. 즉 누가 구원을 얻고 못 얻고의 모든 결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겁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비밀이 제자들에게만 허락되었지만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심을 받은 자들은 이 비유가 깨달아져서 영적인 성과를 목적으로 남은 생을 믿음으로 살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12절 성령으로 깨우침을 받은 사람은 구원을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영혼들까지 구원의 길로 이끌 수 있는 영적인 부요함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깨닫게 해주심을 받지 못한 사람은 지금의 생명과 하나님이 원래 태어날 때 주신 영까지 다 빼앗기고 맙니다.
이사야 6장을 보면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이사야가 하나님을 뵙고는 죄를 사함 받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는 말씀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며 담대히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하십니다. 정말 기가 막히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책망하고 야단쳐서 회개하고 구원 얻도록 하라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 백성들에게 가서 눈이 멀게 하고 귀머거리가 되게 하고 마음이 둔탁해지게 해서 다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옥 가도록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자기 백성들이 죄 값으로 비참하게 하나님의 형벌과 멸망을 당할 것이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이런 역할을 어느때까지 해야하는 것인지를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사6:11-12)”고 대답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의 다 죽음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고 이 예루살렘이 쑥대밭이 되고 저들이 살던 집은 빈집이 되며, 모든 것이 황폐해질 때까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애간장을 태우며 통곡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런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며 위로하십니다.
이스라엘이 300만이었다면 30만 명은 포로로 끌려갔던지 혹은 먼 나라로 도망을 갔던지간에 죽지 않도록 남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후에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반성하고 회개하게 될 때 그들을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해서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재건하게 하실 것이라고 위로하십니다. 나무를 잘라내더라도 그 그루터기가 남는 것과 같이 그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생명의 싹이 나서 다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도구들이 될 것이며 그 싹이 이스라엘을 번성케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사야를 통하여 전하라하신 말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거역했고 예배드리고 절기를 지키는 것도 귀찮아 했기에 하나님 앞에 아무런 소망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앗수르에게 가혹하게 짓밟힘 당하고 그 이후 바벨론에게 70년간 착취와 유린을 당하게 됩니다.
본문 16-17절에서는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다양한 체험들을 통해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실질적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심을 안 믿을 수 없도록 충분히 증거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거역하며 자기 인생을 제멋대로 설계하며 세상 허욕을 좇아 불의와 죄악에 앞장서기도 합니다. 섬기기보다는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어리석은 모습으로 교회를 망치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신앙의 깊이가 깊어져야 하는데 도리어 점점 타락하고 세속적으로 변질되어 외식적인 신앙생활과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의 참 목자들도 하나님 앞에 애타는 심정으로 부르짖는 이사야의 심정과 같을 것입니다. 이같은 신앙이 계속되는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가지를 잘라 그루터기만 남게 하셨듯 지금의 우리 한국교회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남은 그루터기가 생명의 싹으로 남아서 교회를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도구로 쓰임 받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