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어린 시절 동화책 읽기를 무척 좋아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은 동화책을 읽는다. 동화책은 동심의 세계로 젖어 들게 하기 때문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쓴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뱃살과나무꾼 옮김, 시공주니어, 2017)라는 동화책 290페이지에 이런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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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뭘 할 건지는 모르지만, 난 빈둥거리며 놀지는 않을 거야.
난 발견가야. 너희도 발견가라면 1분도 빈둥거릴 틈이 없을걸.”
아니카가 물었다.
“네가 뭐라고?”
“발견가.”
토미가 물었다.
“그게 뭔데?”
“그야 물건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이지. 아니면 무슨 뜻인 줄 알았어?(중략)”
“세상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어. 그러니 누군가가 그것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그게 바로 발견가가 하는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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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상은 온통 보물 같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으니, 누군가는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그것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어른들의 눈에는 그저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쓸모없는 깡통에 불과한 것들이 주인공 삐삐의 손에 들어가면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로 탈바꿈한다.
어린 시절 우리가 동화책을 사랑했던 이유는 이처럼 온 세상이 경이로움과 발견의 대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3] 하지만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서서히 ‘발견가’의 능력을 잃어버리곤 한다. ‘익숙함’이라는 타성에 젖어 매일 마주하는 풍경을 당연하게 여기고, 삶의 신비로움을 망각한 채 고정관념의 틀에 갇혀 살아가게 된다.
진정한 성장은 육체의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삐삐처럼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생각하고 깨우치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발견가’로 살아가는 데 있다.
[4] 특히 남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사물에서 깊은 삶의 의미를 길어 올리고, 성경이라는 진리의 보고(寶庫) 속에서 숨겨진 하나님의 비밀을 깨우치는 발견가의 삶은 우리 인생을 말할 수 없이 풍요롭게 만든다.
그 때문에 나는 늘 아내와 다툼을 벌이고 있다. “제발 잠 좀 자야지! 그러다 치매 걸리면 누가 책임져!”
이 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있다.
[5] 내 건강을 위해서라도 일찍 잠자리에 누우려 애써보지만 쉽게 되질 않는다. 잠잘 틈이 없기 때문이다. 온갖 새롭고 신선하고 번뜩이는 생각들이 계속 떠오르기 때문이다. 남들이 고이 잠든 깊은 밤이나 새벽녘에 더 소중한 아이디어들이 더 많이 굴러가기 때문이다.
현실의 위대한 성취는 대부분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이 생각하지 못한 의미를 질문했던 발견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6]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이작 뉴턴이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은 당시 누구나 흔하게 보던 일상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것을 ‘당연한 일’로 치부할 때, 뉴턴은 “왜 사과는 옆이나 위가 아니라 곧장 땅으로만 떨어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평범한 낙하 운동 속에서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엄청난 진리를 발견해 낸 것이다.
매년 그가 공부했던 케임브리지 대학을 방문한다.
[7] 그때마다 그가 살았던 기숙사 3층 창문 밑에 계속 자라고 있는 사과나무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를 즐긴다. 남다른 뉴턴의 관찰력에 도전받기 위해서이다.
사물을 보며 남들이 떠올리지 못한 의미를 깨우치는 것은 천재 과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든 익숙한 사물을 조금만 차별화된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한다면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진리를 볼 수 있다.
[8]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그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보라 /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 찰나의 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으라.”
작고한 스티브 잡스로 하여금 스마트폰을 발명하게 한 원동력이 바로 이 시에서 나왔음을 아는가?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9] 지금 전 세계 70억 인구 중 많은 사람이 손바닥 안에 있는 스마트폰으로 무한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시 한 구절에 필이 꽂혀 인류 전체를 편리하게 하는 걸작품을 개발하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발견가의 시선이 필요하다. 그런 독창적인 시선이 쌓여 근육이 된다면 자주자주 누구도 생각지 못한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다.
[10] 아파트 주변에 피어난 작은 민들레 한 송이와 울릉도 촛대바위 틈새를 뚫고 솟아오른 푸른 풀 한 포기를 보고 강인한 생명력과 우주의 신비를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삶을 예술로 만들고 사물을 생명체로 승화시키는 발견가의 태도이다.
“너희가 뭘 할 건지는 모르지만, 난 빈둥거리며 놀지는 않을 거야. 난 발견가야”라는 삐삐의 외침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11] 세상은 여전히 깨달아야 할 진리와 감동적인 의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물을 통한 일상의 발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남들이 깨닫지 못하는 영원한 진리를 깨우치는 영적 발견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여전히 신적 도움이 필요함을 절감한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12] 세상은 여전히 깨달아야 할 진리와 감동적인 의미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눈을 들어 세상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마음을 열어 성경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의 삶에는 ‘빈둥거릴 틈’, 즉 지루함이나 무기력함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매 순간이 배움의 장이자 깨달음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난 그 묘미에 사로잡혀 아직도 잠 못 이루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