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 왔을 때, 한국인들이 이 신앙을 수용하는 형태가 크게 두 종류라고 지난 기고에서 말했다. 가장 먼저 이 신앙을 수용한 계층이 일반 서민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세상적 복 받기를 염원해 예수를 믿었다. 한 많은 삶을 살아온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비록 소수이긴 해도 사회 지도층도 이 신앙을 수용했다. 지식층의 입신 동기는 물론 무산대중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들이 선교사의 도움이나 물질적 이득 혹은 자신의 보호를 위해 입교한 것은 아니다. 이들의 입신 동기는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초기에 유학자들이 한문으로 된 기독교 서적을 학문적 입장에서 호기심으로 접하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경우다. 둘째, 기독교를 통해 국가의 자주 독립을 쟁취해 보고자 하는 애국적 동기이다. 셋째, 기독교 사상을 통해서 민도(民度)를 높이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모색하여 민주적 입헌 국가를 만들어 당시 사회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포부에서 비롯됐다 분석할 수 있다.
지식층 기독교 입교와 활동에 대해서는 독립협회(獨立協會)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독립협회는 1884년 갑신정변 주동 인물 중 하나였던 서재필과 주한 미국 공사관 통역관 윤치호, 그리고 초대 주미 한국 공사관 비서관 이상재 등이 중심되어 창립했다. 서재필과 윤치호는 갑신정변 실패 후 해외로 망명한 후 10여 년 만에 귀국해 독립협회를 창설했다. 서재필은 1896년 4월 최초로 순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11월에는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 옆 모화관(慕華館)을 개축하여 독립관으로 그 이름을 바뀠다. 이어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했다. 1896년 7월 독립협회가 창립될 때 이 협회는 국민교육과 민주창달, 자주독립, 자강혁신, 자유민권을 목표로 출발했다.
중심 인물 서재필, 윤치호는 외국에서 기독교인이 돼 입국했고, 나머지 인물도 아직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기독교를 접해 그 정신에 이미 익숙했던 인물들이었다. 평양에 독립협회 지부가 설치될 때 안창호, 길선주 같은 인물이 중심되어 발기한 것은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이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이 협회의 목표는 외세를 배격하고 자주독립국을 만든다, 부패한 정부 관리와 정치를 혁신한다, 민중의 참정권을 위해 일한다는 것 등이었다. 초기에는 온건한 방향으로 출발했으나 차차 과격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만민공동회를 열어 국정 개선안을 채택하고 차차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여 일반 백성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는 방향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일부의 모략과 조정의 의심으로 1898년 11월 조정은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고 주동 인물들을 체포해 투옥시켰다.
이 때 이승만, 이상재, 신흥우, 김정식 등이 투옥됐다. 이들이 감옥에 있을 때 언더우드, 게일, 헐버트 등 선교사가 감옥에 자주 면회 가 성경과 존 번연의 「텬로역정」(天路歷程), 무디(D. L. Moody)의 책 등 기독교 서적을 차입해 주었다. 이들은 이 서적들을 통해 신앙을 받아들이고, 후에 민족과 교회 지도자들이 된다.
이승만이 감옥에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후, 첫 기도를 드렸는데,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원해 주시고, 나의 영혼을 구원해 주시옵소서”였다. 여기서 이승만의 마음 속에 자기 영혼 구원보다 나라 구원이 먼저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이상재도 “걷잡을 수 없는 나라의 비운이 드디어 창상(滄桑)의 변까지 몰아왔음을 몸소 겪으면서, 우리도 낙심하지 않고 나라 구원의 길을 찾아보려는 일념으로 기독교 믿음을 갖게 됐다”고 술회했다. 독립협회 간부들이 1904년 3월 석방됐을 때 이상재, 김정식, 이원긍, 유성준, 김인 등이 게일(J. Gale)이 목회하던 연동교회에 모두 입교했다. 그 해 8월 6년간 옥살이하던 이승만은 1903년 늦은 봄에 석방된 신흥우(申興雨)와 함께 감리교회에 입교했다. 이것이 당시 지식층 인사들이 입신하는 동기가 된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자기 영혼 구원보다 국가 구원을 먼저 생각한 당시 지도자들의 애끓는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의 입신이 철저한 개인적 회개를 거친 후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국가 안위와 독립의 방편으로 교회를 이용하여 소기의 목적을 이루려 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다른 한 예를 들면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그의 「백범일지」에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진남포 엡웟청년회 회원 자격으로 경성대회에 참석했다. 서울 상동교회에서 모인 이 대회는 표면적으로는 교회 사업을 의논한다 했으나 실은 순전히 애국운동 회의였다고 고백했다.
이 때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1934년 당시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 중 하나였던 송창근 목사는 “나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조선 초대 기독교 운동이 순수한 신앙 운동만이 아니었던 것을 주저 없이 말합니다. 문명과 신앙을 혼동하야…… 민족 비운을 만회하는 것도 예수 믿는 데 있고…… 예수도 믿고 민족운동도 해 보고 교화(敎化)운동도 해 보고”라 술회하여 초기 지도층 인사의 기독교 입신 동기의 순수성에 의문을 던졌다.
여기서 초기 신자들의 입신 동기가 순수한 기독교 신앙에의 입문이라기보다 일반 대중들은 이기적 동기로, 양반 지식층은 애국애족의 동기로 이루어졌다는 추론을 내기 충분하다. 그러나 양반 지식층 모두가 다 그런 동기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진실로 기독교 신앙과 진리에 접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초기 한국 기독교인의 입신 동기가 다양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 민족에 복음을 허락하시고, 그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게 하셨고, 교회가 틀을 잡아 가며 성장하도록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 기독교 신앙은 이기적 동기나 차원 높은 어떤 동기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이시며, 그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영생에 이른다는 평범한 진리를 수용하는 것, 이것이 참된 기독교 신앙의 원천임을 재삼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