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세계복음주의 지도자로 일각에선 개신교(Protestant) 교황으로 불렀던 존스토트(John Stott)는 신실한 지도자였다. 그는 86세, 2007년 케직사경회 설교를 마지막으로 모든 사역에서 은퇴했다. 그는 현역 30년, 원로목사 36년을 변치 않는 신실함으로 하나님, 교회, 그리고 세상을 섬겼다.

故 존 스토트 목사.
故 존 스토트 목사.

   존 스토트는 자기 평전 작가에게 건강한 목회자의 삶을 위해 세 가지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 세 가지는 결혼, 학자(위), 그리고 자리(직책)이다. 그는 젊은 날 여성과 교제도 했고 결혼을 고려한 적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는 교수나 목회자들이 독신을 선택하는 영국의 전통과 목회에 전념하려는 자기 결심이 반영된 결정이었다.

   둘째로 그는 케임브리지 재학 시절에 학자의 길을 포기했다. 지도 교수가 케임브리지 연구원으로 남아 학자가 되라고 권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는 목회자가 학문적 지식보다 실천적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평생 성실한 연구와 집필로 50여권의 저서를 남겼고 시카고의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등 몇몇 기관과 신학교가 수여한 명예박사로 만족했다.

   셋째로 존 스토트는 교계 고위직을 맡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그는 대주교가 될 수 있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는 세계 유명한 신학교 총장직도 여러 차례 요청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현장을 지키는 실천가와 목회자로 남았다. 그는 젊은 날의 결심을 평생 지켰다.

   존 스토트는 목회자의 목회자였고 탁월한 현장의 실천적 신학자였다. 그는 고집스럽게 전도하며 개인 영혼 구원에 집중했다. 그는 빌리 그레이엄과 더불어 1966년 베를린 대회, 1974년 로잔대회를 이끌며 WCC를 위시한 자유주의 신학 운동을 대항해 싸웠다. 탁월한 그가 2011년 7월 27일 90세에 작고하자 많은 기독 언론은 그의 별명을 빗대어 그의 삶을 조명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기도와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 9시 반이면 어김없이 귀가하는 성실한 학생”, “마틴 로이드 존스의 동역 제안을 거절하고 성공회에 남아 교회 연합을 꿈꾸던 복음주의자”, “큰 타이틀을 거절하고 현장을 섬겼던 신실하고 겸손한 목회자”,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청년의 영적 아버지로 일생을 헌신한 그리스도의 제자”...

   존 스토트는 평생을 영국 런던의 한복판에 자리한 올소울즈 교회(All Souls Church)를 섬겼다. 그는 어머니를 따라 올소울즈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5년 안수를 받고 올소울즈 교회 부목사로 5년, 담임목사로 25년 사역후 은퇴 목사로 36년 섬기다 소천했다. 신실한 삶이다.

   스토트에게서 현대 사역자들이 배울점이 많다. 그는 탁월한 설교가였다. 그는 매 설교 준비에 최선을 다했던 설교자다. 그는 스펄전의 뒤를 잇는 탁월한 설교가였고 전 세계에서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로 올소울즈 교회는 붐비었다. 그는 젊은이 선교와 양육에 헌신하여 많은 젊은이를 주님께로 인도했고 그들을 양육했던 차세대 선교사였다.

   스토트는 교회론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교회에 갇히지도 않았다. 그는 교회를 넘어 적극적으로 세상을 섬기는 복음주의적 행동가(Evangelical Activist)였다. 그는 또 후배를 위해 멘토링을 했고, 구체적 멘토링을 위해 랭햄 파트너십 인터내셔날을 세워 차세대 육성에 힘썼다. 자리매김과 직책 분배로 소란스러운 12월에 자리를 탐하지 않았던 존 스토트를 다시 생각한다.

강태광 목사(월드쉐어 USA).
강태광 목사(월드쉐어 U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