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병익 장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 그의 아내 이홍은 권사와 함께 삶으로 증거한 이다. 그의 지난 80년 일생. 단 일초의 시간도 헛됨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귀하고 복되게 살고자 열심을 다 해 왔던 삶이었다. 이는 어린 시절 독실한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은 때문이다. 가난했던 농부의 육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나 살아온 그의 삶 전체는 한편의 드라마이다. 그가 대화의 마무리를 항상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십니다.”라고 할 만큼 그의 인생 가운데 “ 하나님께로 받은 은혜와 축복 ”은 모두 일일이 셀 수가 없을 만큼 풍성하다.
어머니의 기도로 말미암은 든든한 신앙의 뿌리
그는 1924년 한국 평북 선천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 사정과 일본식민 통치하의 착취와 억압으로 초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초등학교의 허드렛일을 하며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으며 집안 일을 도왔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의 어머니는 육남매를 키우며 가난한 살림을 돌보는 바쁜 일과 속에서도 틈 날 때 마다 성경말씀을 가까이 하며 늘 자녀들을 모아놓고 기도했다. 늘 자녀들에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는 말씀으로 신앙과 희망, 꿈과 용기를 심어주기 위해 애썼다. 어머니의 이 같은 노력과 기도는 모든 자녀에게 신앙의 든든한 뿌리를 내리게 하여 주었고, 특별히 이병익 장로는 더욱 하나님을 그의 삶의 중심에 두고 살게 되었다.
6.25 동란으로 생사를 넘나들다
그러면서 미국선교사가 설립한 신성중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공산화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핍박을 당하였다. 교회 생활과 전도에 열심이셨던 어머니는 더욱 심한 핍박을 받으셔야 했다. 이어 발발한 6.25 동란으로 모든 형제들은 강제징집되었고 사랑하는 가족과 모두 헤어져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병익은 전쟁터에서 무서운 사선을 간신히 넘길 수 있었지만, 포로로 잡혀 인민군 포로수용소에서 하루하루 생사갈림길의 공포속에서 보내야 했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20세를 갓 넘긴 여리고 순진한 어린 청년이었다. 3년이라는 수용소 생활 속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드는 두려움과 고통의 순간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 매달려 간절히 기도하며, 그의 삶의 미래에 대한 열정과 비젼을 키워나갔다.
어머니를 잃고, 맨주먹으로 일어서다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석방’이란 특단으로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전쟁으로 흩어진 가족을 찾기 위해 전쟁피난민이 모여있는 곳들을 수소문하며 다녔다. 마침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토록 찾았던 어머니를 전라도 목포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전쟁으로 깊은 병을 얻으신 어머니와 만난지 1개월만에 어머니를 하나님의 품속으로 보내드려야만 했다. 어머니와의 가슴 아픈 이별을 한 그는 낯선 땅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어린 동생과 조카 2명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고향이 아닌 낯선 남한 땅에서 그는 고아로, 빈털털이로, 아는 사람 하나없이 처음에는 거지와 같이 생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살기 위해, 그리고 동생과 조카를 위해 험한 일 힘든 일 가리지 않고, 막노동일과 하수도 청소일등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성실하게 해냈다.
진실, 신뢰, 노력, 성실, 신용으로 일구어낸 사업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는 말씀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그는 삶의 다섯 가지 목표를 세웠다. 하나님 중심된 삶, 기도의 삶 (이 두가지는 어머니로 부터 물려받은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실과 신뢰의 삶, 노력과 성실의 삶, 신용의 삶. 이 다섯가지를 바탕으로 한 미래에 대한 비젼을 꿈꾸었다. 그가 일하는 곳에서는 그는 늘 성실한 일꾼으로 인정을 받았다. 간장 배달일을 시작한 그는 거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점차 신용을 얻게되었고, 이로 인해 간장회사에서 인정받아 배달원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고, 도약의 기회가 되었다. 간장세일즈로 인하여 비지니스의 원리와 성공의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대전에 삶의 터전을 잡고, 노점장사, 보따리 봇짐장사, 포목상, 봉제공장을 바탕으로 개발사업, 신용금고, 엔지니어링 회사등 다수의 회사를 거느리는 대기업의 총수가 되었다. 그는 지역사회의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감당했을 뿐아니라 역대 대통령으로부터 수출증대 산업표창(1976), 공장새마을운동우수업체기(1977), 수출산업발전 유공표창(1978), 수출신장 유공석탑산업훈장(1979), 성실납세철탑산업훈장(1980), 국민훈장석류장(1987)등을 수상하였다. 대전시장으로부터 산업개발부분 시민의 상(1980)을 받았고, 이외에도 상공부장관, 내무부장관, 재무부장관들로부터 유공표창과 감사패등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기독실업인회부회장(1975), 대한적십자사 전국대의원(1980), 한국기독실업인회 중앙연합회 상임고문(1993)을 맡아 봉사하였고, 한국봉제협회이사(1975)및 부회장(1981) 과 한국어패럴봉제산업협회장(1990)등을 역임하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사회에 환원하다
교계에서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전국장로회 회장(1979), 재단법인 극동방송의 감사(1982) 및 이사(1989)등의 직분을 맡아 헌신하였다. 미국에서는 1985년 COLOMBIA 대학에서 명예인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빈 손으로 시작한 그의 이같은 놀라운 인생성공에 대해 그는 모든 것이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며 사랑하는 그의 삶이 곧 하나님으로 부터 축복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로 받은 성공과 물질의 축복을 각계 각층으로 나누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양육하는 데 힘쓰게 되었고, 이것은 그의 새로운 비젼이자 삶의 목표가 되었다. 가장 먼저 계획하고 실천한 것은 학원 선교였다. 어린 시절 성경을 읽기 위해 글을 열심히 배우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대전에 1979년 학교법인 ‘신성학원’을 처음 설립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기독교의 이념을 바탕 하여 1980년 동방중고등학교, 1985년 혜성유치원, 1987년 단일 학과였던 대전 간호대학을 인수하여 지금은 4개 계열의 28개학과의 종합대학인 혜천대학교로 성장발전시켰다. 그리고 매주 채플시간을 통하여 예배를 드리고 모든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하고 있다.
학교설립뿐만 아니라 1980년에는 재단법인 혜천장학회을 설립하여 혜천학원산하 혜천대학, 동방학원산하 동방여자중학교, 동방고등학교에서 지금까지 26년 동안 우수하고 신실한 1900명 이상의 장학생들을 후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믿음있고 우수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선정하여 교회나 다른 기관을 통하여 장학금을 주고 후원하였다. 그리고 교회들의 자체 성전건립을 위해 각 지방의 미자립 교회에게 건축헌금과 보조금을 지급하였고, 한국의 유성신성중앙교회를 개척하고 성전 건립을 주도하였고, 현재 크게 부흥, 성장하고 있다. 대학교회로는 1984년 혜천대학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기독교 기관에도 크게 헌신하여 1987년 부터 8년간 장로회 총회신학대학의 재단이사로서, 1989년에는 기독교방송국인 ‘대전극동방송’의 이사장으로서 방송국을 개국하였다. 군선교사업도 이바지하여 1991년 육군본부교회를 건립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 이후에도 피아노 기증과 선교헌금등으로 지원하였다. 대전육군통신학교에도 100여평 규모의 교회를 설립하는데 이바지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업적들은 높이 평가받아 2006년 10월에는 한국의 대전선교100주년 기념대회에서 공로패를 받았다.
1993년 도미하여 섬유봉제사업으로 2006년까지 자체공장으로 중남미의 과테말라의 3개 공장과 훈드라스 공장을 소유 운영하며, 현지 직원 수천명에게도 선교, 전도하는데 힘썼다. 1998년에는 뉴욕에 비영리 선교법인인 < East Gospel Mission, Inc > 를 설립하여 훈드라스, 우크라이나, 체코, 중국, 인도 등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선교사들에게 선교비를 보내 후원하고, 미국내의 각종 선교기관에는 그들의 특성에 따라 문서선교비, 방송선교비등으로 후원하고, 또한 우수하며 선교에 대한 비젼이 있는 학생과 공부하는 목회자들에게는 장학금으로 지원해 주었다. 또한 기독교 장애인 단체나 병원에도 선교비를 지원하여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며 주의 나라 확장에 힘쓰고 있다.
'선교'에 대한 비전을 크게 품다
앞으로 이병익 장로의 가장 큰 꿈과 비젼은 현 세대에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복음을 전파할 선교사와 2세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사업이다. 그리하여 2003년 Virginia 주의 Warrenton 시에 'EZRA LEADERSHIP INSTITUTE' 라는 비영리 면세 법인설립하였으며 지난 3월에는 건축허가 감사예배를 드렸다. 설립 목적은 우수한 영적 리더가 될 신실한 믿음의 인재들을, 훌륭한 주의 제자로서 양성하고 훈련하여 세계 곳곳에 복음을 전파할 진실된 일꾼들로 키우기 위해서다.
또한, 중남미와 남미 지역에서도 기독교를 널리 전파하고, 현지인들로 믿음 있고 신실한 선교사와 우수한 지도자들을 양성, 배출하기 위한 목표를 두고 있다. 그리하여 과테말라 치말테낭고에 있는 하나의 공장부지와 건물을 개조 이용하여 유치원으로 부터 고등학교까지,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는 신학대학을 설립하고자 하는 계획을 하고 있다. 이는 과테말라에서 지금까지 봉제사업으로 많은 수익을 얻었고, 이에 학원설립으로 지역사회에 그 수익의 일부를 과테말라 사회에 환원하고,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기독교의 복음 전파를 위한 선교사업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현재 이 일은 한 선교사에게 일임하여 모든 것을 준비, 진행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은혜로서 이루질 것이라 그는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1989년에는 주한 GUATEMALA 명예영사로 임명을 받았고, 1990년 혜천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었던 Universidad Mariano Galvez de Guatemala 에서 2002년 11월에는 학원선교과 산업선교에 대한 공로에 대해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아 이곳에서도 그의 선교에 대한 영향력과 그의 업적들을 인정받았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여생을 선교에 헌신하고파
이병익 장로는 “지금까지 나의 모든 삶을 통하여 이룬 모든 것들은 사람의 단순한 열정과 노력, 세상적 조건이나 기회로는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람과 세상적인 힘으로 할 수 없었던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하심과 섭리, 은혜와 축복하심이 없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라고 힘주어 강조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에 대한 감사의 제목들은 하루 이틀로 말할 수 있는 분량이 아닙니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한가지, 남은 여생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하나님 선교사업에 더욱 더 열심히 전념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의 기도로 말미암은 든든한 신앙의 뿌리
그는 1924년 한국 평북 선천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 사정과 일본식민 통치하의 착취와 억압으로 초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초등학교의 허드렛일을 하며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으며 집안 일을 도왔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의 어머니는 육남매를 키우며 가난한 살림을 돌보는 바쁜 일과 속에서도 틈 날 때 마다 성경말씀을 가까이 하며 늘 자녀들을 모아놓고 기도했다. 늘 자녀들에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는 말씀으로 신앙과 희망, 꿈과 용기를 심어주기 위해 애썼다. 어머니의 이 같은 노력과 기도는 모든 자녀에게 신앙의 든든한 뿌리를 내리게 하여 주었고, 특별히 이병익 장로는 더욱 하나님을 그의 삶의 중심에 두고 살게 되었다.
6.25 동란으로 생사를 넘나들다
그러면서 미국선교사가 설립한 신성중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공산화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핍박을 당하였다. 교회 생활과 전도에 열심이셨던 어머니는 더욱 심한 핍박을 받으셔야 했다. 이어 발발한 6.25 동란으로 모든 형제들은 강제징집되었고 사랑하는 가족과 모두 헤어져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병익은 전쟁터에서 무서운 사선을 간신히 넘길 수 있었지만, 포로로 잡혀 인민군 포로수용소에서 하루하루 생사갈림길의 공포속에서 보내야 했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20세를 갓 넘긴 여리고 순진한 어린 청년이었다. 3년이라는 수용소 생활 속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드는 두려움과 고통의 순간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 매달려 간절히 기도하며, 그의 삶의 미래에 대한 열정과 비젼을 키워나갔다.
어머니를 잃고, 맨주먹으로 일어서다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석방’이란 특단으로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는 전쟁으로 흩어진 가족을 찾기 위해 전쟁피난민이 모여있는 곳들을 수소문하며 다녔다. 마침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토록 찾았던 어머니를 전라도 목포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전쟁으로 깊은 병을 얻으신 어머니와 만난지 1개월만에 어머니를 하나님의 품속으로 보내드려야만 했다. 어머니와의 가슴 아픈 이별을 한 그는 낯선 땅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어린 동생과 조카 2명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고향이 아닌 낯선 남한 땅에서 그는 고아로, 빈털털이로, 아는 사람 하나없이 처음에는 거지와 같이 생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살기 위해, 그리고 동생과 조카를 위해 험한 일 힘든 일 가리지 않고, 막노동일과 하수도 청소일등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성실하게 해냈다.
진실, 신뢰, 노력, 성실, 신용으로 일구어낸 사업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는 말씀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그는 삶의 다섯 가지 목표를 세웠다. 하나님 중심된 삶, 기도의 삶 (이 두가지는 어머니로 부터 물려받은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실과 신뢰의 삶, 노력과 성실의 삶, 신용의 삶. 이 다섯가지를 바탕으로 한 미래에 대한 비젼을 꿈꾸었다. 그가 일하는 곳에서는 그는 늘 성실한 일꾼으로 인정을 받았다. 간장 배달일을 시작한 그는 거래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점차 신용을 얻게되었고, 이로 인해 간장회사에서 인정받아 배달원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고, 도약의 기회가 되었다. 간장세일즈로 인하여 비지니스의 원리와 성공의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대전에 삶의 터전을 잡고, 노점장사, 보따리 봇짐장사, 포목상, 봉제공장을 바탕으로 개발사업, 신용금고, 엔지니어링 회사등 다수의 회사를 거느리는 대기업의 총수가 되었다. 그는 지역사회의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감당했을 뿐아니라 역대 대통령으로부터 수출증대 산업표창(1976), 공장새마을운동우수업체기(1977), 수출산업발전 유공표창(1978), 수출신장 유공석탑산업훈장(1979), 성실납세철탑산업훈장(1980), 국민훈장석류장(1987)등을 수상하였다. 대전시장으로부터 산업개발부분 시민의 상(1980)을 받았고, 이외에도 상공부장관, 내무부장관, 재무부장관들로부터 유공표창과 감사패등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기독실업인회부회장(1975), 대한적십자사 전국대의원(1980), 한국기독실업인회 중앙연합회 상임고문(1993)을 맡아 봉사하였고, 한국봉제협회이사(1975)및 부회장(1981) 과 한국어패럴봉제산업협회장(1990)등을 역임하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사회에 환원하다
교계에서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전국장로회 회장(1979), 재단법인 극동방송의 감사(1982) 및 이사(1989)등의 직분을 맡아 헌신하였다. 미국에서는 1985년 COLOMBIA 대학에서 명예인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빈 손으로 시작한 그의 이같은 놀라운 인생성공에 대해 그는 모든 것이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며 사랑하는 그의 삶이 곧 하나님으로 부터 축복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로 받은 성공과 물질의 축복을 각계 각층으로 나누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양육하는 데 힘쓰게 되었고, 이것은 그의 새로운 비젼이자 삶의 목표가 되었다. 가장 먼저 계획하고 실천한 것은 학원 선교였다. 어린 시절 성경을 읽기 위해 글을 열심히 배우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대전에 1979년 학교법인 ‘신성학원’을 처음 설립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기독교의 이념을 바탕 하여 1980년 동방중고등학교, 1985년 혜성유치원, 1987년 단일 학과였던 대전 간호대학을 인수하여 지금은 4개 계열의 28개학과의 종합대학인 혜천대학교로 성장발전시켰다. 그리고 매주 채플시간을 통하여 예배를 드리고 모든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하고 있다.
학교설립뿐만 아니라 1980년에는 재단법인 혜천장학회을 설립하여 혜천학원산하 혜천대학, 동방학원산하 동방여자중학교, 동방고등학교에서 지금까지 26년 동안 우수하고 신실한 1900명 이상의 장학생들을 후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믿음있고 우수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선정하여 교회나 다른 기관을 통하여 장학금을 주고 후원하였다. 그리고 교회들의 자체 성전건립을 위해 각 지방의 미자립 교회에게 건축헌금과 보조금을 지급하였고, 한국의 유성신성중앙교회를 개척하고 성전 건립을 주도하였고, 현재 크게 부흥, 성장하고 있다. 대학교회로는 1984년 혜천대학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기독교 기관에도 크게 헌신하여 1987년 부터 8년간 장로회 총회신학대학의 재단이사로서, 1989년에는 기독교방송국인 ‘대전극동방송’의 이사장으로서 방송국을 개국하였다. 군선교사업도 이바지하여 1991년 육군본부교회를 건립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 이후에도 피아노 기증과 선교헌금등으로 지원하였다. 대전육군통신학교에도 100여평 규모의 교회를 설립하는데 이바지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업적들은 높이 평가받아 2006년 10월에는 한국의 대전선교100주년 기념대회에서 공로패를 받았다.
1993년 도미하여 섬유봉제사업으로 2006년까지 자체공장으로 중남미의 과테말라의 3개 공장과 훈드라스 공장을 소유 운영하며, 현지 직원 수천명에게도 선교, 전도하는데 힘썼다. 1998년에는 뉴욕에 비영리 선교법인인 < East Gospel Mission, Inc > 를 설립하여 훈드라스, 우크라이나, 체코, 중국, 인도 등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선교사들에게 선교비를 보내 후원하고, 미국내의 각종 선교기관에는 그들의 특성에 따라 문서선교비, 방송선교비등으로 후원하고, 또한 우수하며 선교에 대한 비젼이 있는 학생과 공부하는 목회자들에게는 장학금으로 지원해 주었다. 또한 기독교 장애인 단체나 병원에도 선교비를 지원하여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며 주의 나라 확장에 힘쓰고 있다.
'선교'에 대한 비전을 크게 품다
앞으로 이병익 장로의 가장 큰 꿈과 비젼은 현 세대에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복음을 전파할 선교사와 2세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사업이다. 그리하여 2003년 Virginia 주의 Warrenton 시에 'EZRA LEADERSHIP INSTITUTE' 라는 비영리 면세 법인설립하였으며 지난 3월에는 건축허가 감사예배를 드렸다. 설립 목적은 우수한 영적 리더가 될 신실한 믿음의 인재들을, 훌륭한 주의 제자로서 양성하고 훈련하여 세계 곳곳에 복음을 전파할 진실된 일꾼들로 키우기 위해서다.
또한, 중남미와 남미 지역에서도 기독교를 널리 전파하고, 현지인들로 믿음 있고 신실한 선교사와 우수한 지도자들을 양성, 배출하기 위한 목표를 두고 있다. 그리하여 과테말라 치말테낭고에 있는 하나의 공장부지와 건물을 개조 이용하여 유치원으로 부터 고등학교까지,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는 신학대학을 설립하고자 하는 계획을 하고 있다. 이는 과테말라에서 지금까지 봉제사업으로 많은 수익을 얻었고, 이에 학원설립으로 지역사회에 그 수익의 일부를 과테말라 사회에 환원하고,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기독교의 복음 전파를 위한 선교사업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현재 이 일은 한 선교사에게 일임하여 모든 것을 준비, 진행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은혜로서 이루질 것이라 그는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1989년에는 주한 GUATEMALA 명예영사로 임명을 받았고, 1990년 혜천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었던 Universidad Mariano Galvez de Guatemala 에서 2002년 11월에는 학원선교과 산업선교에 대한 공로에 대해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아 이곳에서도 그의 선교에 대한 영향력과 그의 업적들을 인정받았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여생을 선교에 헌신하고파
이병익 장로는 “지금까지 나의 모든 삶을 통하여 이룬 모든 것들은 사람의 단순한 열정과 노력, 세상적 조건이나 기회로는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람과 세상적인 힘으로 할 수 없었던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하심과 섭리, 은혜와 축복하심이 없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라고 힘주어 강조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에 대한 감사의 제목들은 하루 이틀로 말할 수 있는 분량이 아닙니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한가지, 남은 여생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하나님 선교사업에 더욱 더 열심히 전념하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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