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나님에 대한 다른 호칭들
1). 엘로힘(!yhil~a>)
이 명칭은 구약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말이다. 창세기 1:1부터 나오는데,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모든 히브리어 단어는 이 말을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지칭하는데 두 번째로 많이 쓰이는 단어로서 약 2,570회 사용되었다는 통계가 있다. 이 말은 히브리어에만 나타나고 다른 셈족 언어, 예를 들면 아람어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설이 있다. 이 점은 구약성경 중 몇 군데에서 이 말이 마치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인 “야웨”처럼 쓰이고 있는 이유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시76:1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 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에서 하나님이란 말은 “엘로힘”의 번역인데, 여기서 “엘로힘”이 단순히 신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었다면 어느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시77:13 “하나님과 같은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에서 “하나님”이란 말에는 “엘로힘”이 그리고 “신”이라는 말에는 “엘”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시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에서도 처음 “하나님”이란 말에는 “엘로힘”이, 두 번째 “하나님”에는 “엘”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경우에 “엘로힘”은 “야웨”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엘로힘”과 “야웨”가 같은 뜻으로 쓰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사한 예가 시68:24에도 나온다.
그러나 사46:9에 “나는 하나님이다. 다른 신은 없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엘”(lae)이란 말을 사용하시고 다른 신에 대해서는 “엘로힘”(!yhil~a>)이란 말을 사용하셨다. 이에 앞서 사45:22에서도 하나님께서 유사한 말씀을 하실 때 자신에 대해서 “엘”이란 단어를 사용하셨다. 뿐만 아니라 시50:1; 78:35; 83:1; 118:28; 잠20:29 등에서 보는 것처럼 같은 구절에서 “엘로힘”과 “엘”이 아무런 구별 없이 “야웨”하나님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의 초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지칭할 때는 “엘로힘”을, 그리고 이방 신을 지칭할 때는 “엘”을 사용하였으나 후에는 그런 구별없이 두 말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엘로힘”은 문법적으로는 남성복수형이다. 따라서 그 문자적인 뜻은 하나님들(gods)이 되겠지만 이 말이 구약의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는 그 분의 위대하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형식은 복수이나 그 의미는 단수이다. 이러한 용법을 문법적으로는 “장엄의 복수”(majestic plural)라고 부른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에 이 말이 주어로 쓰였을 때 술어동사나 그 수식어가 단수형이지만 드물기는 해도 복수형이 나타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 말이 항상 하나님의 장엄하심이나 존경의 염을 나타내기 위해서 쓰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바로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사46:9; 45:22에서 “나는 하나님이다. 다른 신은 없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엘”(laee)이란 말을 사용하시고 다른 신에 대해서는 “엘로힘”(!yhil|a>)이란 말을 사용하셨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사46:9 외에도 시86:8에서 “엘로힘”은 이방신들을 뜻한다. 그러니까 “엘로힘”이 이방신을 지칭할 경우에는 “엘”의 복수형인 “엘림”과 마찬가지로 문자 그대로 복수이고, 장엄의 복수는 아닌 것이다.
다만 “엘로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를 지칭할 때만 장엄의 복수라고 할 수 있고 이때는 단수로 취급되는 것이다.
엘로힘의 다른 뜻
이 말이 항상 하나님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출22:8-9에서 이 말은 지배자들 또는 재판장들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때로는 천사들을 지칭하기도 하고, 심지어 죽은 자들의 영혼을 뜻하는 말로도 사용된다(삼상 28:13; 사8:19). 그 외에 이 말은 최상급 형용사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창30:8에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에 대한 원문의 문자적인 번역은 “하나님의 싸움을 싸웠다(yTil]Tp]nI !yhil|a> yleWTp]n)”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싸움”이란 “가장 큰 싸움” 또는 “아주 큰 싸움”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창35:5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에서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에 해당하는 원문의 문자적인 번역은 “하나님의 두려움이 그들의 주위에 있는 도시들 위에 있어서”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두려움”은 큰 두려움이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할 수 있다.
삼상14:15에 “들에 있는 진과 모든 백성 중에 떨림이 일어났고 부대와 노략군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에서 “큰 떨림”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의 문자적인 번역은 “하나님의 두려움”(!yhil|a> tDr_j,)의 번역이다. 대하20:29에도 “하나님의 두려움”(!yhil|a> djP)이란 말이 나오는데 동일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 구절이 “이방 모든 나라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적군을 치셨다 함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한 고로”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보다 문자적인 해석은 “야웨가 이스라엘의 적들과 싸우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큰 두려움(하나님의 두려움)이 그 땅의 모든 나라들 위에 있었다(임하였다)”이다. 그런데 이에 앞서 대하17:10에는 “야웨의 두려움”(hw:hy_ djP)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이 나오는 문장의 형식이 20:29에서 “하나님의 두려움”(!yhil|a> djP)에 나오는 문장의 형식과 동일하다. 따라서 이 두 말이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드물기는 하지만 “야웨”도 “엘로힘”처럼 최상급의 형용사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야웨의 두려움”과 “하나님의 두려움”은 물론 “야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뜻하며, 이 말들이 “큰 두려움”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또 시68:15에서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에서 “하나님의 산”과 “높은 산”은 서로 같은 의미이다. 유사한 예를 욘3:3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왕상3:28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에서 “하나님의 지혜”(!yhil|a> tmk]j;)도 같은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50:2에 대한 우리말 번역은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라고 되어 있는데, 문자적인 번역은 “시온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아름다움이 빛을 발한다”인데 여기서 하나님으로 번역된 “엘로힘”(!yhil|a>)도 같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엘로힘의 단수형은 무엇인가?
그런데 엘로힘이 남성복수형이라면 그 단수형은 무엇인가? 신을 지칭하는 단수형의 명사는 엘(laeee)과 엘로아흐(Hl~a>)이다. 따라서 이 둘 중 하나가 그 단수형일 것이다. 그런데 “엘로아흐”보다는 “엘”의 복수형으로 보는 학자들이 더 많다. 그러나 시29:1에서 보듯이 “엘”(lae)의 복수형은 “엘림”(!yliae)이기 때문에 “엘로힘”이 엘의 복수형이라기보다는 “엘로아흐”의 복수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엘로아흐”는 욥기와 같이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책들에 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이 두 가지 주장 모두 문제가 있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적어도 형태론적인 측면에서는 “엘로힘”을 “엘로아흐”의 복수형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그리고 이 명칭이 주로 후기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편에는 “엘로힘”과 함께 “엘”이 자주 등장하지만 드물게는 “엘로아흐”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시18:32; 50:2에 “엘로아흐”가 등장하는데, 시18에서는 “엘” “엘로아흐” 그리고 “엘로힘”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시편은 동일한 시기에 쓰여진 책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전해오는 노래들을 편집한 책이기 때문에 시18, 50편이 언제 지어졌는지 알 수 없다. 적어도 시18에 대한 설명에는 그것이 다윗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엘로아흐”가 등장하는 시편이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