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 가운데에 있을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던 당시 바울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신약 시대 최대의 사도로 가는 곳마다 기적과 이사가 나타나며 많은 심령들을 주께로 인도했던 인물의 고백이라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고린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고 회당장과 그의 가족까지 예수님을 영접하는 대대적 복음의 승리가 있었음을 사도행전은 기록합니다.(행 18:8) 왜 바울은 고린도에서 두려워하며 약하며 심히 떨었을까요? 당시 고린도는 대단히 세속적이고 화려한 도시였고 세상적으로 부유하고 유식하며 힘있어 보이는 고린도 사람들 앞에서 바울은 자신이 가진 것이 없고 세상적인 배경이 없기에 그렇게하며 두려워하며 떨었을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실제적으로 사도행전이 기록하는 바울의 행적은 그가 신분과 지위의 고하에 상관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을 증거하였음을 봅니다. 저는 지난 약 일주일간의 한국 여행에서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각 방면에서 최상위의 위치를 가진 자들도 만나 교제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약해짐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저같이 평범한 목사가 그 정도였는데 바울이 세상적인 배경 때문에 위축되었을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 바울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약함을 느끼며 두려워하고 떨었을까요? 계속되는 고린도전서 말씀을 살펴보면 바울의 거룩한 두려움은 자신의 설교를 통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바울이라는 인간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수많은 모임에서 말씀을 전하며 바울의 이 고민이 너무나 이해가 됩니다. 오직 하나님 만나기를 사모하며 모이는 주님의 거룩한 양무리들에게 혹시라도 주께서 원하시는 메세지가 아닌 내가 임의대로 전하는 설교가 되면 어쩌나, 그야말로 노심초사, 안절부절하는 태도로 주님께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주님 무엇을 전해야 합니까? 제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타나셔서 직접 전하시는 메시지 되기를 원하옵나니 제게 알려주세요."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면 대부분 주님은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번 한국 방문의 경우, 6번 설교중, 두번인가는 설교하기 2시간 전에 전격적으로 말씀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한편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적인 말의 지혜나 아름다움으로 전할까 심히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은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를 소원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중심을 아시고 그의 사역 내내 시종 성령충만으로 붙잡아주셨습니다. 오늘 바울의 이 태도는 모든 설교자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인 말의 지혜나 유창한 언변의 화려함이 아닌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바울처럼 심히 떨며 기도하는 자세는 얼마나 귀감이 됩니까. 육체를 가진 인간은 누구나 사람의 인정을 갈망하며 인간적인 지혜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싶어하는 약점이 있기에 이렇게 거룩한 두려움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의 고백을 통하여 그가 참으로 겸손한 전도자였음을 깨닫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고린도에서 바울의 전도를 통한 대대적 복음의 승리가 기록되는데, 바로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밤에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며 내가 너와 함께 한다 하시며 바울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대부분 복음 전파의 획기적 승리가 있으면 마음이 높아지고 방심과 자만에 빠지게 되어 쉽게 실족하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기에 원수의 역공이 있을 것임을 알고 더 겸손히 마음을 낮추며 주를 의지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바울을 붙잡아 주셨던 것입니다. 이 또한 본받아야 할 전도자의 자세입니다. 지난 한국 방문시 하나님께서는 가는 곳마다 승리를 주셨습니다. 방심하지 않고 더욱 낮추며 주님만을 의지할 것을 결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