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미션대학교 윤임상 교수
(Photo : 기독일보) 월드미션대학교 윤임상 교수

독일의 모라비안 공동체를 기억하십니까? 이들은14세기 종교 개혁자 얀 후스(Jan Hus, 1372?-1415)의 후예들로 현재 체코의 보혜미아, 모라비안 지역을 중심으로 결성된 기독교 공동체입니다. 이들이 18세기 합스부르크의 카를 6세(Karl VI, 1685-1740) 가 내린 개신교 말살 정책 칙령에 의해 개신교가 혹심한 박해를 받자,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갈 곳 없어 방황하다 독일의 진젠도르프 (NicholasLuding von Zinzendorf, 1700-1760) 영지인 독일작센의 베르텔스도르프 (Berthelsdorf) 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진젠도르프는 이들을 자기 영토 안에 머물게 하였고 이들을 자유스럽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원래 루터란 이었던 진젠도르프는 나중에 결국 모라비안 비숍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독일 작센 지역에 형성된 이 모라비안 공동체는 어두워지는 유럽 교회에 바른 복음의 깃발을 세우며 새로운 생명과 빛을 불어넣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을 특징지을 수 있는 영성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였습니다. 이것은 진젠도르프가 마음에 품고 있던 모토 “I have only one passion, and that is Christ”를 통해서도 익히 발견할 수 있는 그들의 중심 사상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뜨거운 영감의 찬양으로 그 중심사상을 표현하며 살아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대서양을 횡단하던 가운데 존 웨슬리(John Wesley,1703-1791)와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1788) 형제의 고백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736년 1월, 이 모라비안 공동체는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품고 복음의 순례를 시작하려 대서양을 횡단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존, 챨스 웨슬리 형제도 아틀란타 지역에 선교를 위해 같은 배를 타고 가던 중 생명을 위협하는 폭풍우 속에서 모라비안 들을 관찰합니다. 웨슬리 두 형제는 그 환경속에서 무섭고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 한편에서 들리는 찬양 소리에 가까이 가 보니 그 환경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평안한 가운데 뜨거운 영감의 찬양을 부르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독일의 모라비안 공동체 였습니다. 그런 생명의 위협 속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행동을 했던 그 원동력은 “십자가. 복음” 그것 이외에 다른 어느 것으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약 680년경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을 이사야 53장 5-6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결국 하나님 앞에 지속적으로 죄를 범하고 길잃은 양처럼 헤메며 고통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끊임없이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십자가 형벌을 통한 구원 방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가사로 만들어 한국의 장민호 작곡가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라는 제목으로 수난절 찬양을 작곡했습니다. 같은 멜로디에 6절 말씀과 5절 말씀을 가지고 각각 두절의 음악을 전개해 갔습니다. 이 작품의 특이함은 멜로디를 진행하는 데 있어 흔하지 않은 도약(6도, 7도) 들을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해 작곡가는 예언의 신비를 보여 주는 듯합니다. 그 불안한 현상을 표현하는 가운데 안전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주 멜로디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 입니다.

우리에게 십자가 복음이 때로는 허공을 치는 듯하고 있는 외침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전부입니다. 그것이 이사야가 선지자로 활동하며 예언했던 핵심이었고, 모라비안들이 품고 있던 영성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라비안들의 뜨거운 영감의 찬양이 회심의 결정적 동기가 되었던 존, 챨스 웨슬리 형제의 핵심이었습니다.

C.S. 루이스가 그의 책 “영광의 무게(The weight of Glory)”에서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베토벤 같은 작곡가의 일도 파출부의 일도 정확히 똑같은 조건에서만 영적이다. 즉 주께 하듯 겸손히 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두더지는 땅을 파고 수탁은 울어야 한다.” 우리에게 펼쳐지는 무슨 일이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일할 때 그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영적인 것입니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가 십자가 사랑을 계속해서 찬양하며 영적인 고백을 드리고 있는 가운데 깊이 상고해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만약 그 십자가 복음에 나타난 사랑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리 중요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엄청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그냥 적당히 중요하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모라비안 공동체처럼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의 명확성과 그것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온 힘을 다해 뜨거운 영감의 찬양으로 표현하고 삶으로 증명하며 살아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