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민 목사
엄영민 목사

목회자를 다른 표현으로 설교자라고도 한다. 목회자가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설교라는 뜻이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언뜻 생각하면 목회자는 입만 열면 설교가 줄줄 나오리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지 모르지만 그것은 정말 현실을 모르는 말씀이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아무리 경험이 많고 오래해도 언제나 두렵고 부담되는 것이 설교하는 일이다.

예전 신학교 시절 설교학을 배울 때는 한 번의 설교를 위해 평균 스무 시간을 준비하라고 배웠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준비해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이 또 설교이기도 하다. 나도 이제는 중견 목회자가 되어 우리 교회에서 설교하기 시작한 것도 이십 여년이 넘었고 가끔씩 외부에 나가 설교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래도 또 설교를 하려고 하면 부담이 된다.

이것이 분명 나만의 일은 아닌 듯 싶다. 예전의 우리 교회에서 임시당회장을 지내셨던 김재창 목사님을 가까이서 모신 적이 있었는데 당시 목사님은 칠순 가까운 연세에 오랜 목회 후 은퇴하신 분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하시기 전 목사님은 성경 속에 피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담긴 그림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기도하시곤 하는 모습을 뵌 적이 있었다. 그만큼 설교에 대해서 만큼은 늘 겸손하고 늘 진지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가끔씩 전혀 무방비 상태에서 설교를 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지난주 중에도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 새벽기도를 나와 앉아있는데 시간이 돼도 설교하실 목사님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았다. 그럴 경우 목회자 간에는 누군든지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우선 올라간다는 무언의 약조가 되어있다.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다 조금 늦게라도 설교자가 오면 다행이고 아니면 그야말로 즉석 설교를 해야 하는 것이다. 내 모습을 보니 새벽이라 거무틱틱한 잠바를 걸치고 얼굴도 제대로 안씻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올라갔다. 시간이 되어 찬송을 한 곡 부르고 또 두 곡까지 불렀는데도 설교하실 목사님이 보이지 않았다. 설교는 해야 하는데 설교할 본문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몰라서 앉아계신 성도들에게 어느 곳이냐고 물어보아야 하는 굴욕도 당했다. 그리곤 본문을 읽었다.

스무 시간 걸려 준비해도 모자란 설교를 본문을 읽으면서 바로 설교를 준비가 되어야 하는 황당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고맙게도 마침 말씀이 동굴에 숨어있던 다윗이 그 사실을 모른채로 발을 가리우기 위해 거기에 들어온 사울을 단숨에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살그머니 옷자락만 베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느낀 감동을 그대로 나누는 것으로 설교를 대신 했다. 설교자로서는 전혀 준비 안된 빵점 설교였다. 그래도 듣는 성도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사실은 읽기만 해도 은혜로운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가끔 일주일내내 땀흘려 준비한 설교도 죽을 쑤는 것에 비하면 약간은 놀랍다. 그런데 가만 생각하니 그게 바로 말씀의 능력이다. 준비를 많이 했든 그렇지 않든 말씀 본래의 능력이 전해지면 설교는 그것으로 족한 것임을 새삼 느꼈다. 또 설교자가 좀 준비가 부족해도 듣는 분들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으면 얼마든지 은혜로울 수가 있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렇다 해도 즉석 설교는 앞으로도 가급적 사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