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헬레니즘은 개인주의적인가?
(3). 소피스트들의 경우
이와 같이 사회 또는 공동체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중요시하는 사상은 심지어 개인주의적인 특색이 강한 소피스트들에게서도 예외가 아니다.
소피스트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프로타고라스인데, 그 역시 폴리스를 떠나서 인간적인 삶은 가능하지 않으며, 따라서 국가의 이해가 개인의 이해보다 중요하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플라톤의 대화록 프로타고라스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폴리스의 안정을 해칠 수 있는 급진적인 사상 때문에 소피스트들은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냉대를 받았는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이들의 부정적인 영향을 제거하는 데 진력하였다. 소피스트들에게 적대적이었던 플라톤이 프로타고라스를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고 있다면 그의 묘사를 믿어도 좋을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비전
샌더스 교수는 알렉산더가 아테네에서 배운 바를 전파하기 위해서 그가 정복한 지역에 희랍식 폴리스를 세우고 그 곳에 학교들을 세웠고, 이들 학교에서 가르칠 교사들을 충당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친 바를 세계에 가르치기 위해 아테네에 평화봉사단(Peace Corps)를 세웠다고 그의 강연 원고에 적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알렉산더는 아테네에서 공부한 적이 없고, 적어도 인간관 및 정치관에 있어서는 그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의 가르침과 반대로 행동하였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정치학 1권에서 인간을 천성적인 노예와 자유인으로 구별할 뿐만 아니라 노예를 소유의 일부 즉 동산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원정 중인 알렉산더에게 희랍인들은 동등하게 대우하되 페르시아 인들은 노예처럼 취급하라는 권고를 담은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하장군들 중에서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적지 않았지만 알렉산더는 이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았다. 희랍인들과 피정복자들에 대한 구별을 철폐하고, 현지인들을 두루 기용하여 요직에 앉혔을 뿐만 아니라 부하들에게 현지 여인들을 아내로 맞게 했고 자신도 현지에서 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그는 말하자면 만인평등주의(egalitariannism)와 더불어 사해동포주의(cosmopolitanism)를 주창하고 또 몸소 실천한 셈인데, 장군으로서 불세출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그 정신과 사상에 있어서도 알렉산더 대왕은 시대를 크게 앞선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대한 기록을 읽어보면 그에게는 범인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점들이 많이 있는데, 실로 그는 희랍이 배출한 불멸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후에도 도처에서 그를 신격화했는데, 그가 죽은 후에는 그의 부하들이 그의 시신을 모시려고 치열한 경쟁을 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그에 대한 감회는 실로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남녀의 구별이나 자유인과 노예의 구별이 없다고 한 성경의 가르침과 유사한 사해동포주의와 더불어 거대한 지역에 걸쳐 언어와 문화를 통일함으로써 지중해연안뿐만 아니라 오지에 이르기까지 복음이 전파되는데 결정적인 준비 작업을 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남은 한 가지 문제는 정치적인 안정과 치안 즉 법질서의 유지인데, 이것은 마침내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이 두 사람은 이사야서(45:1)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라고 한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Cyrus the Great)처럼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섭리하시는 역사를 이루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들이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 헬레니즘의 특징을 개인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 희랍에 개인주의자들이 없었다거나 헬레니즘에 개인주의적인 요소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마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항상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유익이 우선하였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당화될 수 없는 생각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치고 알렉산더가 실천한 것과는 반대로 개인의 이익을 공동체의 이익보다 앞세우는 자들 다시 말해 국가나 사회의 이익보다는 사사로운 명예나 부를 탐하는 자가 적었으리라고 보긴 어렵다. 이스라엘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성경적 사상이 공동체적 가치를 우선으로 하고 있다고 해서 고대 이스라엘에서 개인주의가 없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선지서들을 읽어보면 당시의 지배층과 부유층 사람들이 힘이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학대한 사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개인주의의 극단적인 사례 또는 최악의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개인주의는 아니라 할지라도 성경의 가르침이나 선지자들의 비판과는 달리 개인주의가 시대를 불문하고 존재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했는데도 이방 신들을 섬긴 자들이 끊이지 않았던 사실과 유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이나 철인들의 사상을 별도로 하고 ‘실제 생활에서 이스라엘사람들과 희랍인들 중에서 어느 민족이 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개인의 그것보다 중요시했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희랍의 경우에는 적지 않은 수의 부자들이 그들의 재산을 국가를 위해서 그리고 가난한 동료 시민들을 위해서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부자들이 많은 비용을 대는 것은 물론 평화시에는 공공건물들을 짓는 데에 그들의 재산을 증여한 것을 비롯하여 공공행사가 있을 경우 그 비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부담하였다.
예를 들면 아테네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비극과 희극을 공연하는데, 그 연습과 공연에 드는 비용을 부유한 시민들이 부담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 덕으로 일반 시민들은 연극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었다. 아테네에 가보면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2세기에 세워진 헤로도스 아티쿠스라는 이름의 야외극장이 있는데, 이것은 이 극장을 세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사람은 자기 아내가 죽었을 때 그 아내를 기념하여 이 극장을 지어 국가에 바쳤다. 그는 이외에도 많은 공공건물을 세워서 국가에 바쳤다.
그에 반하여 성경에서는 그런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대 이스라엘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