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환
(Photo : 기독일보) 최윤환 목사.

빨간 먼지 이는 마을 길
충성스럽던 <데이비드>대왕의 장군 <우리아>의 戰線으로부터
안고 내려오는 암만의 긴 역사를 더듬어
시리아 북향을 향 한다

사각 시멘트 엉성한 2,3층 집들 지붕마다
네모기둥들, 녹 슨 오래된 듯 골 철들이 올라 있어
자식 네들의 훗날의 집으로 얹혀 지어주려는 父 情이
왜 그리 안쓰럽게 보이는지..

갈릴리 바다호수 자락이 저 멀리 비치면서
북녘 국경 언덕바지 구릉 저 멀리
지렁이처럼 돌아 올라가는
시리아 국경 너머로 다메섹 향한 길목 올려 다 보면서
오른편 길 따라
도시마을 몇 개를 넘나들자
산자락 넓은 마당 앞에, 빈 흙벽돌 집채 몇 개
검게 세월을 묻히고 섰 네

꼭대기 언덕 너머로
엠피디어터(원형극장) 돌 벽 곁을 돈 다
송송 이마에 식은땀이 돌 만큼 올라
돌바닥 과 기둥들이 설긴 광장 앞에 서다

돌 짝 언덕 가장 높은 돌 벽으로 둘린 亭子 자리
내려다 뵈는 저 멀리 멀리 바다호수 갈릴리 자락 파랗게,
귀청으로 시원한 바람 휘파람으로 스치고
로마식 기둥 작은 광장에는
성스러운 외침 소리 지금도 들려오는
<데카보리>의 異邦者들 구원의 희소식

성곽을 넘는 <제라쉬>
이천 마리 도야지가 달려 내려간
<거라사>지방의 정신 돌아 온
한 生命의 구원 자취 남겨 있어..

정돈된 원형극장 높다란 돌계단
이편짝에서 작은 목소리 터뜨려도
먼 건너편까지 울려 퍼져나가는
신기로운 광장, 돌계단에 앉아서, 잠시의 잠기는 순간의 思戀..

허깨비처럼 밀려, 밀려 살아 온 생애에는
초라한 미련들이 회오리쳐 휘 몰려, 몰아 와서는 다시
맑은 異域하늘 저 위 눈높이로 솟아오르는데
솟아 올라라! 더 많이 더 많이 솟아 오르거라

아직도, 이곳 요르단 全 지역이 그리 발전이 된 곳이 아님을, 여기 섭렵하면서 느껴오는 생각 속에, 이런 가난한 판잣집들 이야기가 어디 남의 이야기만이 겠느냐고... 스스로 지난 날의 일제 강점기의 2차 大戰 末, 일경(日警)들의 '요주의 인물'로 올라, 쫓기는 목사 가정에서 자라던 시절에 집 없어, 氣象臺(당시는 '관상대'라고 불렀음) 근처, 평동, 또 천연동의 이층집도 당시 일본형사들에 빼앗기고, 東小門(혜화동 고개를 당시는 이렇게 불렀고, 저 언덕바지에 서 있던 城門인데, 이 문 밖으로 나서면 당시는 '문밖이라고 불렸음) 밖으로 피해서, 한 해에 17번을 이사 다니면서, 그래도 가난한 사람들 밀려 터지게, 허름한 이층집들을 빌려, 작게라도 숨겨 예배당 간판 걸고 주일을 지켜냈던, 그 쫓겨 다녀야 했던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이 생생 합니다 만, 이곳 발 닿는 곳 디뎌 다녀 보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들이 의연히 왜 머리 안에 떠올라오는지 몰랐습니다.

<암만(Amman)>, 작은 도시마을 호텔에서 짧은 밤잠을 보내고, 짬짬이 눈 안에 들어오는 누런 흙색 도시 마을 풍경을 곁, 곁으로, 북쪽 길을 향해 달려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옆으로 지나치는, 시멘트 벽 그대로, 일층, 간혹 이층집들에 그 헛 허스룸한 옥상 같은 지붕 위에는 철 골대들로만 삐죽 삐죽 올려서 있어, 이야기로는 언젠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저 위에 지어질, 자기 자라나는 자식들을 위하여, 미리 위층을 짓기 위한 골대만을 세워 놓았다는 요량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로 이런 이야기 속에서, 나의 한 쪽 마음에는 왠가 찡하게 느껴져 왔습니다.

이 지역이, <다윗>왕이 <밧세바>여인을 성벽 넘어로 엿보다가, 접근하여서, 戰場에 있던 그의 남편 장군 <우리아>를 다시 더 험준한 전쟁터로 보내어 戰死케 하였다는(그 옛날 시절에야 번번히 벌어졌을 사건이었겠지만..) 그 전쟁터가 바로 이곳 <Jazer>전쟁터 자리였음을 살펴보면서, 마음이 잠간 서늘해졌습니다.

산마루까지 오르니, 신선한 바람 세차게 날라드는 높다란 돌 벽 꼭대기, 당시에는 분명히 戰望臺 이었었을, 城郭에서, 멀리 서북 녘에 시야를 던져 보니, 요즘에야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전난(戰亂)의 도시 <시리야> <다마스커스>쪽으로 넘어가는 언덕 산길들이 지렁이처럼 둘리어 있고, 그 곁쪽 비탈언덕이 바로 예수께서, 한 초라한 인생의 생명을 건저 내시려, 그 정신 착란된 한 사나이를 살려내려는, 2,000마리의 돼지 떼를 갈릴리 바다 쪽으로 몰아내시던 바다 언덕이 멀리 눈 안에 들어왔습니다. 여기를 지금 <제라쉬>라고 부르고 있으니, 어쩌면 저 건너편 쪽의 <거라사>폐허 자리가 여기로까지 연결 지어져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해 보게 하였습니다.

사실, 가난한 人生의 한 生命을, 즉 그게 내 목숨으로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되기도 했지만, 얼마나 나에게 나름대로는 아껴야 할 목숨이겠습니까 마는 또 그리고 나처럼 한갓 보잘 것 없을 것이라는 나 닮은 인생을, 아무 관련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던 그 분이, 이런 나를 찾으시사,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아껴주셔서, 그 생명을 어려운 값을 치르시고, 새로운 인생, 새 生命으로 살려내시는, 그 心性을 지금 나는 뜨겁게 내 몸에 안에, 다가서 오시는 느낌으로 마음 흔들어 와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망가져진 인생이라도, 분명 거기 품 안에는 아픈 눈물이 있고, 절절한 서러움이 있고, 때로는 반짝거리는 반가움이나, 또 깊숙한 친절함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귀한 感情의 生命이 서려있는 인생, 거기 그분의 깊은 사랑을 통하여, 우리는 또 더 깊은 애정을 서로서로 나누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왜 거기에 미움이 서리고, 전쟁의 잿더미 아픔이 덮치고, 사람이 사람을 고문하고, 아픈 말을 던져서, 아물지 않을 상처를 입혀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참으로 세상은 어떤 개인, 어떤 家庭들, 어떤 사회, 어떤 국가들 간에 엉켜 부딪기는 아픔과 상처의 거미줄들로 설켜지는지, 참 알 수 없는, 또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의 세상인 것입니다. 한데 '예수님의 고침' 안에서는, 이런 곤욕의 의문들이 눈 녹듯이 다 풀려져 나가집니다. 우리는 우선 내 가깝게 내 곁에 만나지는 이웃 하나 하나에 대하여도 이 눈 녹듯이, 커다래진 마음 되어 드넓은 이해, 이해하는 마음, 이해하는 말_보냄, 이해하는 따스한 얼굴 표정을 보내 내는 연습, 연습이 정말, 정말로 세상 구석구석에 꼭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