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환 목사.
(Photo : ) 김세환 목사.

내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뽑으라면 인천시 도화동 꼴창 시골에 살 때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소위 3차 5개년 경제개발을 부르짖으면서 “새마을 운동”을 시작했을 때, 우리 집은 정말 보잘 것없는 허름한 판잣집이었습니다. 조그만 붉은 흙마당에는 강아지가 젖은 흙발로 뛰어 놀고, 구석에는 잡풀 우거진 작은 꽃밭이 있었습니다. 담 밖의 손바닥만한 텃밭에는 어머니가 손수 일구신 옥수수, 배추, 무 같은 채소들이 심겨져 있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국민 스포츠는 프로 레슬링이었습니다.

김일의 박치기, 천규덕의 당수, 그리고 여건부의 발차기는 어리버리한 국민들의 혼을 빼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훗날 이 레슬링 경기가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레슬링은 가난에 찌든 국민들을 흥분하게 만드는 유일한 삶의 활력소였습니다. 굳이 마을 반상회를 조직하지 않더라도 경기가 있는 날이면 온 동네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 모여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쉽게 하나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했습니다. 가끔 도둑이 들었다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기껏해야 도난 당하는 품목들이 두꺼비집을 열어서 “전기계량기”를 떼어가거나 “수도검침기” 아니면 고추씨나 쌀 등을 훔쳐가는 좀도둑 수준이었습니다. 어떤 딱한 도둑님들은 무거운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둘이서 몇 시간 동안 낑낑거리며 운반하다가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도둑들입니다.

학교에서는 도시락을 못 싸와서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아이들도 많이 있었고, 소위 “육성회비”라고 불리는 수업료를 못 내서 쌩 고생을 하는 급우들도 꽤 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재미있는 추억 중의 하나는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정전”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동네 아이들과 노느라 정신이 팔려서 숙제를 못해도 다음날 담임선생님에게 “불이 나가서 못했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경우 면죄부를 받았습니다. 국가가 불을 끄는데 어떻게 공부를 하겠습니까? 아무리 향학열로 불타올라도 그냥 자야지요! 유난히 춥고, 덥고, 불편하고, 짜증나는 시절이었습니다.

저의 두 아들들에게 그 때 이야기를 가끔 하면 거짓말이라고 신경질을 냅니다. 자기들을 훈계하려고 꾸며낸 역사 왜곡이라고 난리를 떱니다. 하지만 그 때는 정말 그랬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제게 “너의 인생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주저없이 가난했던 인천 꼴창 시절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천국이 어떤 곳이기를 원하냐?”라고 물으신다면, 그것도 그 시절의 집이기를 원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 때는 사람 냄새 물씬 나는 훈훈함이 있었습니다.

평생을 교육에 헌신하신 사무치도록 그리운 아버지가 계셨고, 자애롭고 부지런한 어머니가 함께 하셨습니다. 늘 친구 같은 형, 그리고 언제나 골칫거리 문제들을 쉬지 않고 일으키는 그리운 벗들이 있었습니다.

때묻지 않은 자연 그리고 한 올 한 올 정겨운 추억들이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을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뿜어내는 따듯한 열기라는 것을! 아아, 그 사랑이 참말이지 그립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1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