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기독일보에서 매주 몇몇 지역교회 목회자들의 최근 설교문을 요약 정리해서 소개하는 <주일강단>을 시작합니다. 척박한 이민사회에서 눈물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목회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말씀이 갈급한 심령으로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은혜와 소망을 전해줄 것을 믿습니다

늘푸른장로교회 담임 김기주 목사
본문: 히6:12~20 “영원한 축복이 되시는 하나님”


유대전승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직업이 우상을 만드는 직업이었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만든 우상을 가지고 시장에 나갔습니다. 아버지가 시장에 나간 사이 아브라함이 우상을 만드는 창고에 들어가서 우상을 부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큰 우상의 손에 몽둥이를 들려놓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와서 엉망이 된 우상 창고를 보고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대낮에 창고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가보니 큰 우상이 몽둥이로 작은 우상을 부서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저 우상은 나무일 뿐인데 어떻게 저 나무가 다른 우상들을 때려 부서뜨릴 수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우상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더 이상 우상을 만들어 팔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행동을 하나님이 기쁘게 보시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다는 것이 유대전승에 전해 오는 이야기 입니다.

이제 성경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하란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너희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간 아브라함의 행동을 귀하게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3가지 축복을 주셨습니다. 첫 번째가 자손의 대한 축복입니다. 두 번째 땅의 축복이고 세 번째 복에 대한 축복입니다. 땅의 대한 축복은 소유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부족함 없이 살아 가도록 소유에 대한 축복을 하십니다. 자손에 대한 약속은 자손이라는 것은 자손은 우리의 전부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름대로 전부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복의 대한 축복은 하나님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얻을 수 있는 명예와 권세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 3가지 약속은 만사형통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는 백성이 될 때 이런 은혜를 주십니다. 이 3가지 축복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동일하게 임하는 축복입니다. 내 삶이 하나님께 맞춰져 있는 사람이 누리는 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여러분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이 약속은 창12장과 창15장 17장 22장 반복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 약속의 중심에는 ‘복’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본문 14절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주고 복주며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두 번씩이나 ‘복’과 ‘번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반복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반복해서 그 내용을 말씀하시는 것은 강하게 강조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택함 받은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기에 우리가 믿어야 할까요? 축복을 하고 언약을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그 복이 나의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묵상해보고자 하는 말씀은 ‘하나님은 누구신가?’ 입니다.

첫번째 하나님은 한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14절 말씀은 창세기 22장 17절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히브리 기자가 창세기 22장 17절 말씀을 그대로 인용해서 오늘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을까요? 창22장 사건은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에 대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13~18장에서 끊임없이 이삭에 대한 약속을 하고 계셨습니다. 22장에서 드디어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약속이 성취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창22장 17절에 성취된 약속을 인용해서 ‘번성하고 번성케 하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성취된 말씀을 선언하고 선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한번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성취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하란에서 불러내서 가나안 땅으로 나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세겜이라는 곳에서 제단을 드리게 합니다. 제단을 드리고 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3가지 언약을 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 나이는 75세였습니다. 이삭이 태어난 것은 100세입니다. 2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섰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인내하면서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지금 히브리 기자는 이 말씀을 누구에게 전하고 있습니까? 초대교회의 신앙을 붙들기 위해서 온갖 핍박을 받고 있는 유대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핍박 가운데 배교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때입니다. 그 때 주신 말씀이 바로 이 히브리서 말씀입니다. 히브리기자는 “하나님은 택함 받은 백성에게 복을 주시고 번성케 하실 것이다.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견디고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 기자가 그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여러가지 고통스런 일과 인간적인 배신과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회복하라 승리하라 는 것입니다. 히브리기자가 말씀하고 있는 복에 대해서 두 가지의 의미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어 원어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첫번째는 ‘아름답다’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외형적인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우리 가슴에 불어 넣어 주셨을 때 그것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아름다움을 불어 넣어 주시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얼굴이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삶을 주관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주관하시기 때문에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 모습은 아름답다라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의 의미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을 누릴 때 우리는 기쁨을 누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지만 기쁨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이는 가진 것 하나 없어도 그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 찬 사람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복’ 기쁨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쁨의 얼굴 꽃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우리 인생은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덜 가져도 덜 누려도 우리의 삶의 현장에는 언제나 변함없이 웃음 꽃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기자가 전하는 첫 번째 복의 대한 은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주고 복주며 반드시 번성하게 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변치 않는 축복의 그 약속임을 믿으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굳건히 일어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번째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17절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고가의 보석일수록 색깔이 변하지 않습니다. 형태가 변하지 않습니다. 금은 10년이 지나도 그대로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은이나 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색깔이 변합니다. 이것이 보석의 가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하는 신앙이 있고 변치 않는 신앙이 있습니다. 힘들다고 변하고 실패했다고 변하는 신앙이 있는 반면에 아무리 그의 인생에 폭풍우가 몰아쳐도 결코 변하지 않는 신앙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변치 않는 하나님이 그의 삶을 주관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신앙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일에도 쉽게 흔들리는 모습이 있습니다. 삶에서 외풍이 조금만 불어도 쉽게 요동치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성도의 삶의 기쁘게 받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믿을 수 있는 권위가 상실 되었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불확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 시대에 안심하고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 대상이 누구일까요?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약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라’ 입니다. 신약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18절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두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고 강조합니다. 두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맹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히브리 기자는 14절에서 지금 핍박 가운데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번성케 하신다’ 라는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말씀으로 약속하시고 직접 맹세하시며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축복, 만사 형통의 은혜를 가슴에 붙들고 약속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여정이 그 하나님의 은혜로 완벽하게 변화 되리라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의 닻이 되어 주십니다. 닻은 배가 정박하고 있으면 그 배가 요동하지 않도록 큰 갈고리에 줄을 메어 물 밑바닥으로 가라앉혀 흙바닥에 박히어 배가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닻이 바닥 뻘 속에 고정이 되어 있으면 아무리 파도가 쳐도 배가 요동치지 않게 됩니다. 배에서 닻은 생명 줄과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기자가 본문에서 말하는 영혼의 닻은 무엇일까요? 히브리 기자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예를 들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영혼의 닻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축복을 약속했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 창13장 16절, 창15장 4~5절입니다. 창세기 17장에서 거듭 말씀하시면서 할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 안에 공통적인 특징은 그의 아들을 향한 약속을 두고 끊임없이 달려 오고 있습니다. 이삭입니다. 이삭을 통해서 자손이 번창하게 될 것이고 이 땅을 구원하게 될 것이다 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으로 주신 아들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으로 아브라함을 닻으로 묶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고 이 약속을 향해서 즐거워하면서 그에게 은총이 임하기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전 생애에서 영혼의 닻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영혼의 닻은 무엇입니까? 본문 18절~20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영혼의 닻과 같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영혼의 닻입니다. 19절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휘장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천국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십자가에 우리 영혼의 닻을 고정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 기자가 주는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게 됩니다. 나아가서 세상의 어떤 시련과 유혹이 와도 소망의 닻으로 말미암아 우리 스스로가 무너짐이 없이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만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성약장로교회 담임 황일하 목사
본문 : 고후12:1~13 “온전케 하는 가시”


지난 주 말씀에서는 바울은 자신 안에 약함이 있었지만 이 약함과 자기의 허물이 결코 하나님 나라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져 가고 있다 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반대로 이야기 하면 우리의 강함, 실력과 부함이 하나님 앞에 도움이 안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선상에서 바울은 약함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천국에 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많이 듣고 왔다고 전합니다. 무언가 안 맞습니다. 바울이 천국에 대한 계시와 환상을 본 것을 여기에 왜 기록했을까요? 자기를 대적하는 사람들에게 변호하기 위해서 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당시에 외적인 조건 만으로 신앙을 평가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바울을 볼 때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나도 천국을 본 사람이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라고 자기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날에도 현상, 상황만 따라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을 겉 모습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라는 것보다 표적, 기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 때문에 잘못되는 사례가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이 본 셋째 하늘, 우리 천국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표현을 셋째 하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이 3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이 있고 그 위에 다른 공간이 있고 둘째 하늘 위에 셋째 하늘이 있는데 그 곳이 천국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주의자 입장에서 천국을 이야기 하면서 셋째 하늘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3이라는 수는 완전한 수를 말합니다. 셋째 하늘은 완전하고 거룩한 곳이라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완전한 나라 이것을 셋째 하늘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셋째 하늘, 천국에 모두가 입성할 줄 믿습니다. 바울은 이런 환상과 계시를 이야기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고자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천국을 보았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오늘날 서점에 가면 천국에 관련된 책이 많습니다. 이 책을 읽을 때 문자 그대로 믿으면 큰일 납니다. 성경에 대한 천국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천국 갔다 온 이야기, 신비적인 체험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이 그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상과 계시를 받으면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역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복음이 있는가, 그 사역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모습이 있는가 봐야 합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라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어느 여 전도사님이 신앙 교육을 해주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돈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사 프로그램에 나왔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지 돈을 바쳐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몰아가면 올무를 묶으면 넘어갈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신비적인 것들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복음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 된 삶이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신비적인 체험, 하나님을 본 것에 대해서 자랑해도 문제가 없었지만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신비적인 체험을 자랑 하지 않았습니다.

5절에 ‘나를 위하여 자랑치 아니하리라’ 오히려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서 이 계시와 환상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고후12장 7절입니다. 여러분 환상과 계시를 이야기를 하다가 가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시를 주셨습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가시는 일회성의 가시가 아닙니다. 몸 깊숙이 박혀 있는 해결 할 수 없는 가시를 말합니다. 7절에 ‘사단의 사자’ 라고 표현을 합니다. 바울이 가졌던 가시를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신적인 가시였습니다. 가는 곳곳 마다 반대자들이 바울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정신적인 고통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문자 그대로 고통이 있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걸린 질병이 있습니다. 안질, 간질 이런 연약함의 육체의 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가시를 통해서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고 하십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세번이나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완전한 수 입니다. 평생을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삶에 가시가 무엇입니까? 그 가시를 두고 이렇게 말씀해 보세요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엄청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바울의 마음 속에는 세계 복음화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계 복음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중요했습니다. 그것이 12장 9절입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했습니다. 가시를 통해서 바울이 더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은 바라셨다는 라는 것입니다. 온전하여 진다는 의미는 내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낮아지고 겸손해 지는 것이 온전하여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한다는 차원에서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가시를 주어서만이라도 온전하여 질 수 있다면 우리는 찔림 받아 아프지만 하나님의 마음도 아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시’라는 것이 사람, 상황,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가시를 주신 것 감사합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했으면 이 가시를 주셔서 나를 변화시키니 감사합니다. 가시를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기 원합니다.

바울과 같은 사람은 이 가시를 나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알았습니다. 이 가시 때문에 내가 성장 할 수 없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헬렌켈러는 소경이었습니다. 듣지도 못합니다. 말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일을 해냈습니다. 영국에 방에만 누워있던 병자가 9천 편이라는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아이작 왓츠라는 사람입니다. ‘십자가 군병되어서’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라는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누워있지만 천성을 향하여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걸어다니는 병원이라는 별명을 가진 종교개혁자 칼빈이 있습니다. 실락원을 쓴 사람은 소경입니다. 천로역정을 만든 사람은 옥에 갇혔던 존 번연입니다. ‘가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가시는 자신을 온전케 한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자기 자신을 비추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12절입니다.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사도 바울은 참 사도입니다. 사도하면 표적, 기사 능력 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맨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음이 있습니다. 이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참음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을 기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참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죄를 저지르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참고 계십니다. 진노의 날까지 인내하고 참음으로 계십니다. (롬9:22/벧전3:20) 성숙한 지도자와 성숙한 성도는 하나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참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우리가 성숙해 갑니다. 그 때 얻어지는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 열매 가운데 오래 참음이 귀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12절 입니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자 되게 하려는 것이라’ 누가 결국 승리하고 하나님의 상급을 받습니까? 모든 참음으로 기다리고 인내하는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가시와도 연관 시킬 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가시든지 모든 참음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비전교회 담임 이요셉 목사
본문: 엡2:10~22 “건강한 교인의 3가지 증거”


성경은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으며 정확하게 우리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가를 전달해 줍니다. 에베소서 말씀을 통해서 그 가치를 바로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말씀을 기록하고 전달했을 때 바울은 교인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어떤 진가를 발견할 수 있는지 찾아 보기 원합니다.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말씀 중심, 복음 중심, 예수 중심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건강한 교인이 어떤 사람인가 알아 보겠습니다. 10절입니다. 옛날에는 복음과는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들이 더 많았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고 선택 받지 못한 사람이 이방인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유대인은 이방인을 경멸했습니다. 이제는 한 교회에서 생활하게 된 것입니다. 12절 입니다. 전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볼 때는 가치가 없는 자였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피 값으로 존귀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가깝게 되고 유대인들과 가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16절까지 보겠습니다. 짧게 요약하면 19절이 결론입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의 삶은 이전과 이후가 확연하게 다릅니다.

가장 먼저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건강한 자아상을 갖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건강한 자아관을 가지고 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떠한 권력이 건강하지 않은 자아관을 강요할 때 설득 당하면 거기에 노예가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 환경 속에서 강요된 가치관 속에 살아가기 너무 쉬운 존재입니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처럼 한 나라가 짓누르는 것도 없고 피부색의 문제로 눌리는 것이 없으니 그 외에 강요하는 가치관이 없습니까? 우리는 신앙인으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가치관을 가지고 열등감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우쭐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모든 것을 모두 제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피를 흘려 주심으로 우리가 가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가치가 참된 가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박혀 달리시기까지 사랑하신 가치입니다. 창조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가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앙 생활 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여하신 가치를 반드시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신앙을 가졌을 때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믿는 대로 행동합니다. 세상이 나에게 매겨준 지위와 가치는 세상이 없어지면 모두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여하신 가치는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위대한 걸작품입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형제 자매를 배우자를 가치 있게 여깁니다. 19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진리 속에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스스로 얼마나 존귀한 자인가 라는 것을 알고 자녀답게 사는 자녀를 기뻐하십니다. 건강한 생각을 갖고 살기를 원합니다. 건강한 생각은 믿음으로 진리 안에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건강한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건강한 교회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20절~22절입니다. 우리는 혼자 서 있는 아무 힘이 없는 개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에 소속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최고의 가치는 창조자의 가치입니다. 창조자께서 우주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다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스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시 무시한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족보도 어디 소속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우리 안에 영 또한 분명히 소속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우리는 교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태어나서 살고 죽는 곳입니다. 교회는 내가 소속되어야 완성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이고 유기적이고 살아있는 곳이고 내가 소속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미국에 지미카터 대통령을 여러분 잘 아실 것입니다. 지미카터 대통령은 성인반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교사입니다. 이 분은 대통령 보다 더 중요한 정체성은 하나님의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소속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더 가치롭게 생각했습니다. 그 분의 생각 속에 교회를 무엇보다 가치 있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소속된 교회의 가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영광스런 예수님의 교회에 교인이 되었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치를 바로 아는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해서 교회를 세웠을 때는 가치 있는 교회 영광스런 교회가 됩니다. 교회는 우리의 영이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가는 곳입니다. 영원히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건강한 인생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체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생명을 다해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10절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를 믿고 우리가 존귀한 존재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안의 꿈과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선한 일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 값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삼일 만에 살아나셔서 모든 이 세상의 사람들을 하나님이 자녀가 되게 하신다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처럼 선한 일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비전과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모인 전 교인은 여기에 목적을 두고 살았습니다. 인생관이라는 것은 ‘나는 무엇을 위해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그 분의 복음을 위해서 살고 있다면 바른 인생관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신 이유는 선한 일을 위해서 그것을 행하게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귀한 일에 우리가 쓰임 받는 것이 영광스런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한 교인이 되기 위해서 3가지를 잊지 맙시다. ‘나의 자아상은 건강한가’ ‘건강한 교회관을 가지고 있는가’ ‘건강한 자아상을 갖고 있는가’ 를 늘 생각하고 점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