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화 목사(좌)와 유빠울로 선교사(우)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을 날아 아마존 밀림 속 마나우스에 살고 있는 유빠울로 선교사. '선교사'라는 호칭 보다는 다른 아마존 사람들처럼 그냥 그곳에 살면서 삶 가운데 예수님을 보여주는 '친구'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은 유 선교사는 애틀랜타에 거주하는 유지화 목사의 둘째 아들이기도 하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선교 물품을 마련하고자 애틀랜타를 찾은 유빠울로 선교사를 만나 아마존 이야기, 1세대 선교사인 아버지와 이를 이어가는 2세대 선교사인 아들의 이야기 그리고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나눴다.

"열 아홉 살 때였어요. 신학교를 입학하고 얼마 안돼서 아버지께서 다른 목사님들과 합동으로 아마존을 개척하셨는데, 다른 두 분은 중도에 그만 두시고 상파울로에서 목회하시던 한인교회 건축이 중요한 시점이어서 아마존에서 나오실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어요. 아버지는 저보고 다른 선교사가 올 때까지 잠시만 가서 지키고 있으라고 하셔서 한달 정도 있을 계획으로 돈 300불이랑 옷가지 몇 개만 들고 들어갔죠. 아버지가 기도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군말 없이 갔어요. 그렇게 3년을 머물게 됐습니다."

아버지가 마련해 놓은 선교센터에 가보니 다 쓰러져가는 오래된 집이었다. 지붕은 있었지만 시시때때로 내리는 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제대로 된 시설이라고는 변기 하나 뿐. 그나마 수동이었다고. 삐죽 튀어 나온 수도꼭지는 막아 놓은 막대기를 빼면 시커먼 강물이 그대로 솟구쳐 올라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밤이 되어 옷가지 몇 개를 깔고 잠을 청하려고 하면 날아와서 물고, 기어와서 무는 벌레가 말도 못할 정도였다고. 벌레에 물려 걷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버티고 버티다 3개월이 지나고 상파울로의 아버지에게 수신자부담으로 전화를 걸었던 유빠울로 선교사는 울먹이는 듯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다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 침대 하나만 사서 보내주세요...'

유 선교사는 아버지가 선교센터를 사 놓기만 하고 직접 보지는 못하셔서 이런데 보냈겠지 생각하며 위로를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런 환경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더 놀라운 것은 3개월 뒤에 찾아와 자기를 데려갈 줄 알았던 아버지가 계속 있으라고 하고 다시 떠났다는 사실이다!

유지화 목사는 "빠울로가 심성이 착한 아이인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전화를 다 했을까 싶었어요. 교회 건축도 중요하지만 이러다 아들을 잃어버리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건축이 대략 끝나자 마자 달려 갔죠. 잘 먹지도 못하고 씻지도 못하고 거지꼴이었어요. 아마존에서 사업을 하던 한 집사님과 함께 갔는데 그 집사님이 '아들을 낳았으면 잘 키우셔야지, 동물도 못살만한 곳에 아들을 놔뒀다'면서 화를 낼 정도였어요. 그 분의 도움으로 집도 싹 고치고 냉장고, 에어컨, 침대도 사서 놔주고 싱크대도 설치해주고 다시 돌아왔어요. 마음은 아팠지만 선교지를 누군가는 돌봐야 하니 남겨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어쨌거나 열 아홉 나이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선교를 시작한 빠울로 선교사는 '선교사'라는 타이틀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아마존 사람들과 이웃으로 친구로 시작할 수 있었다. 어차피 온 것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찬양을 통한 전도였다. 노방 전도에 은사가 있는 현지 목사와 함께 매주 금요일 마나우스 시내 공원에서 찬양 집회를 하자 한달 만에 4-500명의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그렇게 텔레비전 방송까지 나오게 됐다.

3년이 지나 다른 선교사 부부에게 사역을 맡기고 미국으로 오게 된 빠울로 선교사는 10년간 다른 일을 하면서 지냈지만 아마존에서의 시간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그저 그립고 보고 싶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유지화 목사는 "한번은 브라질 사람한테 전화가 와서 빠울로를 바꿔달라고 해요. 한 십 분을 통화하고 끊길래 여기 브라질 사람이냐고 물어보니 아마존에서 온 전화라고 해요. 무슨 급한 일 때문인 줄 알았더니 아들 생일이라고 축하한다고 보고 싶다고 한 거였어요. 그 정도면 아마존 사람 월급 반이 들 정도로 통화비가 비싼데도 말이에요. 아들이 그들과 가진 관계를 보고 많이 느꼈죠. 선교사와 선교대상이 아니라 그저 그들의 친구로 받아들여진 거죠. 미국에 올 때도 친구들이 공항에 몰려 가서 표를 이틀 뒤로 미루고, 밤새 찬양집회를 하고 환송을 하고 보내줄 정도였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정글마을 찌우교회에서 첫번째로 가진 마을잔치겸 부흥회

2005년,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부르심에 응답해 아마존으로 다시 들어간 유빠울로 선교사는 9개의 교회를 돌보는 사역과 교육 선교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아버지 유지화 목사는 교회 건축에 은사가 있어 많은 교회를 세우는 데 헌신했다면, 아들 유빠울로 선교사는 그 교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양성하고 아마존 현지인들의 자녀들을 교육하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다.

17년 전, 막 아마존 선교를 시작했을 때 배를 타고 이틀을 가야 하는 밀림 속 부족들이 대표 한 명을 뽑아 유지화 목사에게 보낸 적이 있다고 한다. 우리 마을에 영리한 아이들이 많은데 학교가 없어서 못 배우고 있으니 학교를 세워달라는 간절한 부탁 때문이다. 유 목사는 그것이 마음에 빚으로 남아 학교 건물과 기숙사를 지었지만 재정이 부족해 아직 시작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워 했다. 현재는 신학교를 열어 전도된 현지인들 가운데 소명을 받은 이들을 훈련하고 교육하고 있는데, 훌륭한 교수진 보충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독신으로 현지에서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사역에 매진한 탓일까. 몇 년 전, 갑작스레 찾아온 심부전증으로 죽음의 문턱에 갔었던 유빠울로 선교사. 상파울로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한국으로 나간 그에게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었다.

"몸이 아파 사역지를 떠나면서 하나님 주신 일이 여기까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기적적으로 낫고 돌아와 보니 더 큰 일들을 많이 주세요. 밖에서 보시는 분들은 제가 열악한 환경에서 힘들게 사역한다고 안타까워 하시고 눈물도 흘리시는데 저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선교사로가 아니라 현지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거기 사는 것이고 그게 뭐 특별히 힘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만 하라고 하실 때까지 살아야죠."

유빠울로 선교사는 아마존 선교 혹은 오지 선교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교회 건축에 있어 오지이고 낙후됐기 때문에 교회 건물도 나무로 대충 지을 수 있다고 여기고 1-2만 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첫 번째다. 아마존의 경우 나무로 건물을 지으면 1만불 가량이면 충분 하지만,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기 때문에 십 년만 지나도 이런 나무 건물은 썩어 버리게 된다. 그럼 결론적으로 십 년만에 1만 불이 사라지는 결과가 나타난다. 이를 막으려면 벽돌과 시멘트로 튼튼하게 지어야 하는데 아마존 현지에는 벽돌 공장이 없어 전부 외지에서 들여와야 해서 1-2만 불로는 턱 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라고. 그래서 2만 불의 건축 헌금을 받아 놓고 교회를 지으려면 그 만큼의 돈이 더 필요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어렵게 어렵게 지어올린 것이 지금의 사역의 터전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또 한 가지는 단기 선교를 올 때에도 현지인들과 같아지려는 낮은 마음을 갖고 와 달라고 부탁했다. 현지인들은 자신 보다 미개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하고 부족해도 우리와 같은 형제요 자매라는 마음이 그 어떤 물질이나 선물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꿈이 있냐는 질문에 유 선교사는 '극장식 교회'를 하나 짓고 싶다고 답했다. 음악선교단으로 브라질 한인교회들을 돌며 청년들을 깨웠던 기억이 있는 만큼 문화 선교에 대한 열정과 비전이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특별히 음악을 좋아하고 정이 많은 한국인들과 비슷한 심성을 가진 브라질 사람들에게 문화는 훌륭한 선교의 도구가 되고 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저도 당연히 선교사로 살지 않았을 겁니다. 청년들에게 열린 마음, 새로운 것을 수용하시는 태도 그리고 현지인들과 같아 지려고 노력해 오신 삶의 모습 자체가 저에게는 선교의 방향이고 전략입니다."

유빠울로 선교사의 사역은 페이스북 페이지 'Amazonas Holiness'를 통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