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추천도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입문
저자: 박영선 목사, 출판사: 엠마오

현재, 고든 콘웰 신학교 조직신학 및 역사신학 교수로 있는 데이비드 웰스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진리가 주변으로 밀려났으며, 신학과 진리가 실종된 시대로서 진리를 위한 자리는 없다”고 시대를 평가했다. 굳이 이러한 평가가 아니더라도 교회와 기독교의 신앙은 성경에 근거해야 하며, 신학의 시작도 성경에 기초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상식이 사라져 버려 혼동과 무질서한 기독교세계가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진리가 교회와 성도들의 심령에, 성도들의 교제 한 가운데 그리고 신학교 교실과 성도들의 삶 에서 주변이 아닌 중심에 자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참된 교회의 부흥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교회 안에서의 진리실종은 오늘날의 성경관과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보지 않으려는 전재를 갖고 성경을 대하는 것이 문제이다. 종교다원주의와 진리에 대하여 상대주의의 관점을 갖는 사람들, 성경을 인간의 작품가운데 가장 위대한 작품일 뿐이라고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져 가고 있고 한편으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기면서도 성경에다가 무엇인가 더하려 한다든지, 혹은 성경에 있는 내용 중 믿음을 수 없는 부분에 대하여는 제하여 버리려는 태도도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몰이해에 대해 이 책은 계시의 특성을 설명하므로 서 성경을 보는 관점과 자세와 태도를 바로잡는데 이해의 폭을 넓혀 준다.

오늘날 진리가 실종되었다고 느끼게 되는 부분은 신학을 공부했다는 목회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신학과 신앙을 분리하는 분위기가 편만 되어 있다. 요즈음 신학을 하나님에 관한 것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별로 없지만, ‘신학과 신앙의 관계는 하나다’라고 보는 사람도 얼마 안 되는 것 같다. 이렇게 된 것은 ‘신학이 신앙에 유익을 주지 못하며 신학이 신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지 못한다. 신학은 결코 영적 갈급함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고 여기면서부터다. 이에 대해 이 책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가르쳐 준다. 다시 말해, 성경의 계시는 하나님이 구원에 (즉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갖고 작정하시고, 이에 일하시고, 성취하심에 있어서) 주도권을 갖고 있어 기독교신앙에서 가장 많이 요구하는 것이 순종과 자기부인이며 이는 다른 종교와의 다른 점이라고 설명한다.

오늘날 신학과 목회와의 관계도 보면 결별되어 있음을 확연하게 볼 수 있다. 목회현장에서 하나님에 관한 것으로 시작해서 사람에 관한 것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에 관한 학문은 단절되어있다. 16세기 종교개혁자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신학 없이 인간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이렇게(하나님에 관한 신학으로) 안 인간에 관한 것으로 하나님을 풍성하게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신학 없이 세속의 방법들이 모조리 동원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신학과 목회의 관계에 있어서 신학은 목회를 위한 신학이어야 하고, 목회는 신학이 있는 목회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결별된 이유에 대하여 이 책은 ‘신학의 원리는 계시만이어야 한다는 기본원리를 간과한 결과이듯이 목회의 원리도 신학과 마찬가지로 그 원리를 계시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공공연하게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입에서 말해지는 것 가운데 하나는 ‘교리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교리를 말하고 주장하다 보면 교회들이 갈라질 뿐이고, 교회들의 하나됨을 방해할 뿐이며, 오늘날 같이 복잡하고 다양한 구조 속에서 교인들은 딱딱한 교리를 싫어한다고 스스로 믿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성경의 계시는 수많은 교리를 담고 있다. 교리란 우리들이 믿는 내용을 말하며 그 내용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의 인식 최고 기능은 이성 곧 합리성인데, 이 이성은 계시를 인지하는 기관이지 이성이 계시의 내용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이성이 계시의 내용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폐쇄된 사고의 체계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성과 계시와의 관계를 명확히 아는 것은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목회현장에서 신학적 설교와 교리적 설교는 교회의 부흥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노골화 되어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설교는 신학적이고, 문법적이며, 역사적이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오늘날 설교가 들은 오직 수적 부흥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보다 청중들은 어떤 메시지를 좋아 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게 됐다. 특히 설교자가 교인들을 설득하고 납득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교자들의 생각은 이성과 계시의 충돌을 피하고자 설교에 다른 것들을 가미하는 유혹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게시의 권위를 이렇게 허물 수 는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 말씀되도록 권위를 세우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과거와 달리 구역이 셀 그룹 혹은 목장의 표현으로 바꾸었다. 문제는 이 소그룹을 인도하는 자들이 성경을 읽고 제대로 해석할 수 있겠느냐에 있다. 물론 소그룹을 잘 관리하고, 잘 모이고, 잘 운영하도록 하는 데에만 목적이 있다면 잘 운영되면 그만이다. 그러나 교회의 일원으로서 영적 자람과 성장 그리고 성숙이라는 면을 고려해야만 한다면 신앙과 생활의 원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경해석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해석되는 것이데, 이 책은 계시란 본질적으로 초월적이고 영적인 것이기에 우리에게 인식되기 위해서는 이성이 감각할 만한 어떤 행태 때문에 내용을 오도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계시는 해석되는 것이다. 여기서 제대로 해석하려면 감각하는 언어를 재해석하고, 그 언어의 개념을 새로 정의하기 위해 사건이 선행되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이런 계시의 특성을 간과하는 해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오늘날 교회는 전통과 단절하는 교회로 방향을 틀었고, 특히나 과거 좋은 전통을 향하자는 주장에서는 2세기에 있었던 신비주의와 수도원주의와 로마 가톨릭주의로 돌아가자고 할 뿐이다. 만일 ‘과거의 성경적 계시에 입각하여 돌아가자’라고 할 것 같으면 신약성경의 초대교회로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로, 더욱이 17세기 청교도운동의 시대로 돌아가자고 해야 한다. 참된 신앙의 전통과 공동체를 효율적으로 인도하는 신학의 분야 가운데서 기독교교육이 있어야 한다. 무질서하고 감추어진 사건과 환경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파악하는 눈을 열어주어야 하며 주어진 기독교 신앙유산을 가능한 한 일찍 항복시켜 서 더 높은 경지로의 도전을 시도하는 기독교교육이 실행되야 한다고 이 책은 주장한다. 결국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에 관한 것을 주제로 삼는 신학을 갖고 그 신학의 과제인 존재하는 절대자가 하신 말씀과 하시는 일에 대하여 해석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전수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충실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의 부르심에 신실하게 응답하려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 신학과 계시, 권위와 성경해석, 신학과 기독교육관의 관계에 대한 많은 궁금증을 갖게 할 것이다.

글쓴이 백성봉 목사는 노크로스 소재 한마음장로교회 담임으로 청교도 신앙을 바탕으로한 바른 신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을 표어로 교회를 세워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