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기독일보에서 매주 몇몇 지역교회 목회자들의 최근 설교문을 요약 정리해서 소개하는 <주일강단>을 시작합니다. 척박한 이민사회에서 눈물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목회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말씀이 갈급한 심령으로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은혜와 소망을 전해줄 것을 믿습니다

큰사랑교회 담임 김성환 목사
본문 : 고전 2:1~5 “믿음의 본질3”


믿음의 본질 첫번째는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한 사랑입니다. 두번째는 진리입니다. 진리가 없는 사랑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진리가 너희가 자유케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살펴 볼 때 인간적인 측면에서 예수님은 성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분의 가르침은 간결했고 명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다고 증거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삶 역시 선하고 인자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동안 유대인들이 받들었던 율법보다 더 높은 차원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율법은 ‘살인 하지 말라’는 행동적인 규약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사람을 미워한 것이 곧 살인이다”라고 했습니다.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행동으로 나오기 전에 생각을 차단 시켜서 온전하고 거룩한 삶을 살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율법에는 또한 ‘거짓말 하지 말라’는 9계명이 있습니다. 그것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뿐만이 아니라 삶으로 진리를 가르쳐 주신 주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려고 할 때 우리 안의 많은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마음을 다하여 믿는 믿음입니까? 어떤 신앙입니까? 여러분이 믿음의 본질에 대한 설교를 들으시면서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마음을 다하는 신앙을 소유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 사도 바울입니다. 당대 유명한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는 차세대 리더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 예수를 믿지 않고 기독교를 혐오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볼 때 민족의 반역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인을 모두 잡아서 옥에 가두려고 다메섹으로 향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는 길에 신비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들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이후로 그의 삶은 완전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도가 됩니다.

로마 전 영토를 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가는 곳곳 마다 수 많은 역사가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철학과 교육의 중심지인 아테네로 향했습니다. 아테네에서 아레오바고에서 아주 멋진 설교를 합니다. 기승전결이 논리적으로 딱 떨어지는 아주 잘 짜여진 흠 잡을 것이 없는 설교를 합니다. 행전 17장은 아주 통쾌한 설교입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구원에 이르는 성령의 역사 그 무언가가 결여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그 곳을 떠나 고린도에 옵니다.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훗날 그 당시를 회상하며 보낸 편지가 오늘 본문입니다. 1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것 사람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고전 2장 1절~2절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못박힌 사건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테네 사역을 통해서 깨달은 사실입니다. 그는 아무리 사람의 지혜롭고 논리적인 설명으로 철학자들을 설득 해보려고 했지만 그들을 구원을 시키기 보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발과 기독교에 대한 조롱과 회의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사도바울은 더욱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찔림을 받고 하나님께 돌아 오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구원 시키는 능력이고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 시키는 대속의 능력입니다. 옛날에 노예가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누군가 그 주인에게 그 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 때 지불해야 하는 돈을 속전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대신 속전을 지불해서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는 행위를 대속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다 죄의 종, 죄의 노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죄의 삯은 두려움입니다. 영원한 두려움과 사망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죄의 값으로 영원히 죽는 것이 마땅하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로부터 구속해 주시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 택하신 방법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말미암은 대속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형틀이었습니다. 이 십자가는 문화적으로 예술적으로 최고 수준인 로마인이나 헬라인이 고안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로부터 야만민족이라고 손가락질 받았던 이들로부터 만들어진 것입니다. 십자가는 마지막 호흡을 다할 때까지 천천히 죽어가면서 십자가에서 가해지는 모든 고통을 하나 하나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최고 경지까지 경험하는 것이 십자가의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보통 죄인에게는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사악한 사람과 국가의 반역자들에게 국한시켰습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혐오 그 자체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십자가는 저주스러운 것입니다. 사람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십자가는 아주 참혹한 형틀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인과 유대인은 합작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기대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기대가 무너진 그 순간 예수님으로부터 마음이 돌아서고 기대가 분노로 바뀌고 급기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쳤습니다. 그 당시 여러가지 존재했던 사형 방법 중에서 한 가지의 방법,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은 분명히 누군가에 의해서 민중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짜고 민중을 선동했던 것입니다. 그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가뭄의 단비처럼 많은 백성들의 마음을 적셔 주었습니다. 그 당시 종교적인 기득권을 누렸던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눈의 가시와 같았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자신들이 세워 놓은 종교 체계를 정복할 수 있는 위험한 인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그를 없애는 것으로 문제의 씨앗을 제거할 수 있다고 그들은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없애는 일에 십자가 형틀을 사용하게 되면 율법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저주 아래 있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무에 달려서 스승이 죽게 되면 제자들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 운동의 뿌리가 완전히 잘려지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음모와 계략을 꾸미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읽어보면 놀랍게도 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에 성공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냅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와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고 그 결과 주님은 십자가라는 인류 최악의 형틀에 달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하신 이유는 그만큼 우리 인류의 죄질이 나쁘다라는 의미입니다. 평안한 죽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죄가 없으신 예수님도 우리의 죄를 담당했을 때에 그 죄의 중함으로 인해서 우리가 받아야 하는 수치와 저주를 마지막 호흡이 떠날 때까지 우리의 고통을 몸소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정도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죄값을 마지막까지 지불한 후에 우리를 용서하시는 죄에서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이루신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흘린 피와 버리신 생명이 그것이 바로 속전입니다. 십자가 사건과 모든 고난이 대속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리시기 오래 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대속 제물로 오셨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죄와 그로 인한 형벌로 자유케 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붙드는 자에게 그들을 구원케 하시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예배를 받아 주시는 단 하나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 중보자가 되시고 우리를 위해서 대속물,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우리 죄악을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유일한 능력입니다. 이 외에는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 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도를 닦고 아무리 많은 선행과 자비를 베풀어도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지 못하면 왜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십자가를 지게 하셨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죄인임을 깨닫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죄에서 해방케 하는 놀라운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이 왜 주님의 십자가외에는 다른 것을 증거하지 않겠다고 고백했을까요? 주님이 달리신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 볼 때 그 영혼이 참다운 자유함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 앞으로 나오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고백하기 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며 겸손하게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의 기쁨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아틀란타 엘림장로교회 담임 권오병 목사
본문 : 빌3:12~14 “당신은 무슨 스타일?”


많은 사람들이 무언인가에 잡혀 사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힘이 있다는 것, 그렇게 믿는 것에 잡혀 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오직 예수님께 잡혀 있습니다. 주님의 잡으심은 세상의 것들에 잡히지 않고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돈과 마시는 것, 어떤 사람은 운동, 드라마 심한 경우 도박에 잡혀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직 주님에 잡혀 살기 원합니다. 어떤 사람의 관심과 그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느냐는 얼굴, 말과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그 사람 마음 속에 있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믿으면 그것을 따라 살고 배우고 흉내 내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삶의 스타일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대중매체 미디어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대중 매체를 많이 보면 그것을 따라 하려고 합니다. 머리 스타일을 바꾸고 착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매력, 원래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안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스타일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이 시대의 세상의 문화를 연구하면서 세상의 영향을 미치겠다고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지난 주까지 5천만명이 이 가수의 동영상을 봤다고 합니다. 세상에 문화에 마음이 사로잡혀서 노래를 만들었는데 난리가 났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한 주간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사로잡혀 있는 한 사람도 사람들을 춤추고 노래 하게 하는데 그리스도 예수께 잡혀 있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경에서 잠시 왔다 지나가는 유행이 아닌 영원한 가치와 진리에 붙잡힌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영원한 것을 사랑하는 사모함 때문에 빌립보 교우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전히 잡힌 바 된 그리스도를 향해서 좇아가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붙잡힐 때 우리 안에 비록 상황과 환경이 어려울지라도 우리 안에 열정과 열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시대를 향해서 “이 시대를 무엇에 비유할꼬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시대는 복음의 나팔을 부는데 사람들은 무반응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무표정하면서 한 가수의 노래에는 모두가 춤을 추고 있습니다. 복음과 영원한 가치와 생명에 대해서는 멍 하니 앉아 있다가 세상에 놀고 먹는 것에 함께 춤을 추는 시대입니다. 세상은 그럴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가치를 따라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재미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돌아 보기 원합니다.

첫번째는 우리는 과연 무엇에 누구에게 잡혀 살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12절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을 좇아 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 잡혔지만 잡으려고 좇아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즐겁게 즐기는 사람을 당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즐거움,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왜 노래를 부르면서 이야기 할까요? 많은 사람 생각에는 그렇게 즐기고 살고 싶다는 동경이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목적이 있는 삶은 열정이 있고 즐기는 삶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영원한 삶에는 영원한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는 사람은 날마다 주의 은혜에 잠겨야 합니다. 다 내려놓고 머리까지 잠겨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8절입니다. 은혜의 자리로 나아갈 때 경건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문화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문화를 통해서 자극을 받고 깨닫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사람들도 오히려 미지근한 예수 믿는 자들보다 뜨거운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혔다면 우리의 삶은 더 주님께 잡힌바 되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사로잡히면 우리를 창조하신 그 모습 그대로 균형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여러분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더욱더 나아가면 주님은 우리를 능력있게 하십니다. 주님께 붙잡힌 그리스도인들은 영원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소망, 하나님의 나라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끝나지 않은 진행형인 하나님의 나라 그것이 여러분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스타일입니다. 잠시 지나갈 것이 아닌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좇아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미래를 위해, 영혼을 위해, 하나님 나라 영광을 위해 좇아가라 합니다.

마지막 세번째는 우리는 푯대를 향하여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세상의 상은 영원한 기쁨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더 큰 목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서 그 때만 즐거운 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는 영원히 현재인 상입니다. 잊혀질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속에서 그 부르심의 상을 향해서 날마다 좇아 가야 합니다. 그 부름을 따라감으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와 법궤앞에서 덩실 덩실 춤을 추었듯이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며 춤을 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께서 주신 푯대를 향하여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려 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것을 끝까지 붙들 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놀라운 상으로 채워주실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