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기독일보에서 매주 몇몇 지역교회 목회자들의 최근 설교문을 요약 정리해서 소개하는 <주일강단>을 시작합니다. 척박한 이민사회에서 눈물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목회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말씀이 갈급한 심령으로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은혜와 소망을 전해줄 것을 믿습니다

새생명교회 담임 유영익 목사
본문 : 약2:14~26 “내 믿음을 보이리라”


사도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선포했습니다. 믿음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히브리서 저자는 11장에 강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 23절에 ‘믿음을 따라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라고 강조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기독교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성경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과 상반 된 가르침을 본문에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24절 보겠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믿음만으로는 아니니니라” 라고 가르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말씀 때문에 종교개혁가 마티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다’ 라고 불렀습니다. 왜냐면 이것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약화시키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야고보서가 지푸라기 같이 연약한 것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지푸라기에는 우리 심령을 찌르는 예리한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지 점검하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삶 속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돌아보게 합니다. 내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 그 믿음을 어떻게 진짜 믿음이라고 보일 수 있을까요? 마음으로 가지고만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살아있는 믿음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라고 야고보는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주는 메시지의 핵심은 죽은 믿음은 송장같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 믿음은 운동합니다. 역사합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3 종류의 믿음을 설명합니다. 14절입니다. 야고보는 믿음 자체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 믿음이 행함 속에서 움직이는 운동력이 없다면 그 믿음이 능히 당신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당신의 믿음은 정말 구원 받은 믿음이 맞습니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소개하는 3종류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갖고 있다는 믿음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삶에 천국과 지옥의 문제를 결정하는 중요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은 믿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1세기 초 교회 나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그들에게 참 믿음인지 점검하라고 말을 합니다. 15절, 16절입니다. 이 상황 속에서 도울 수 있는 데도 말만하는 것이라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말을 합니다. 그러한 믿음에 대해서 17절에 이런 결론을 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장례식장을 참석해 보면 예배를 마치고 조문객들이 인사를 합니다. 고인 앞에서 잠시 묵도하고 함께 하지 못한 시간에 대한 아쉬움을 나눕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활동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믿음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죽은 믿음은 아무 역사가 없습니다. 삶의 변화와 감동이 없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데 그 믿음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행동하는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죽은 믿음이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죽은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교회 나오시면서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지만 아무 믿음 없이 죽은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둘째로 야고보는 지식적인 믿음만 가지고 있는 구원 받지 못하는 믿음을 소개하면서 18절, 19절에 또 다른 종류의 구원 받지 못하는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능력을 행하지 못하는 믿음을 19절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지 못하는 또 하나의 믿음은 ‘귀신적 믿음’입니다. 몇일 전 기사를 읽다가 전세계 무신론자 비율이 급증하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대부분 유럽과 아시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대표적인 무신론 국가로 5위가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기독교의 폭발적 성장을 이룬 한국이 무신론 국가 5위라는 놀랍지 않습니까? 아이러니한 것은 귀신들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귀신도 하나님 계심을 믿고 하나님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귀신들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귀신들은 자신들이 심판을 받고 고통 받는 곳을 알고 있어요.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심판하는 심판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귀신들이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너무나 그들의 미래의 일어날 것에 대해서 자신들의 최후에 대해서 알기 때문에 귀신들도 떱니다.

죽은 믿음이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아는 지식적인 믿음이라면, 귀신적 믿음은 지식적으로 알 뿐만 아니라. 감성적으로 느끼는게 있다는 것입니다. 막연한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알고 있어도 지식적으로 알고 있어도 동의 할 수 있어도 느낀다 할지라도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 한다고 생각할 때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앞에 설 때 난 널 모른다고 한다면 얼마나 무섭고 슬픈 일입니까? 죽은 믿음도 귀신적 믿음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야고보서는 20절부터 또 하나의 믿음을 소개합니다. 구원 받는 믿음은 행하는 역사하는 역동하는 믿음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라합을 소개합니다. 21절에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23절입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쳤을 때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은 장면은 창15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몇 차례 아브라함에게 자식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늘의 셀 수 없는 별과 같이 너의 후손이 많아 질것이다’ 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창 15장 6절입니다. ‘그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를 한번도 죄를 짓지 않은 자 처럼 여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의롭다라고 불러 주십니다. ‘칭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는 것이 어떻게 보여졌는가?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라는 말이 언제 완성이 되어 보여졌는가? 그것은 이삭을 드릴 때 완성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순종하기를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한다고 했을 때 마음이 담겨 있는 만큼 갈등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일찍이 일어나 모리아산으로 갔습니다. 이삭을 잡으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제 내가 나를 경외하는 줄 내가 아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는 두 사건을 들어서 이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말합니다. 22절입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 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삶의 현장에서 보여질 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 받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어떤 결과가 따라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그 공로. 그것을 믿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내 마음에 영접할 때 하나님은 의롭다 말씀하십니다. 그 믿음이 증명되는 것은 그 믿음이 활동 할 때 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13장 5절에 말했습니다. 정말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어떤 모양을 통해서라도 살아 있는 믿음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나는 믿음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인가 돌아 보아야 합니다. 오늘 중요한 문제를 야고보서 말씀을 통해서 던졌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구체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나는 정말 죄인이라고 내 자신과 하나님 앞에 시인하신 적이 있습니까? 지금도 시인하십니까? 두번째 질문입니다. 나는 내가 지은 죄의 대한 심판과 형벌이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심판과 형벌로부터 구원 받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까? 셋째 나는 내가 지은 죄를 기억할 때 마다 후회와 아픔을 느끼면서 죄로부터 돌아서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리고 돌아서는 증거가 있습니까? 네번째 나는 나의 죄의 형벌에서 오직 구원하실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 믿고 마음에 영접하셨습니까? 그런 적이 없다면 오늘 주님께 고백하기 원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죽은 믿음입니까? 귀신적 믿음입니까? 구원에 이르는 역동적 믿음입니까?

실로암한인교회 담임 신윤일 목사
본문 : 요4:46~54 “인생이 바뀔려면…”


우리 인생의 새로운 삶의 변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이 시간은 내적 치유가 되는 시간이 될지도 모릅니다. 자신에게 솔직한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포장해서 살려고 합니다. 삶이라는 것은 진실할 때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자신 속에 있는 문제들을 인정하고 나아갈 때 삶의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감추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면의 상처가 있지만 가면을 쓰고 살아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한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삶의 아픔과 상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왕의 신하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존귀한 사람이었습니다. 왕의 측근이었습니다. 왕궁에 있었던 헤롯 안티파스의 가까운 신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병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왕과 가까운 신하라 할지라도 왕도 자기의 힘도 죽게 된 아들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지위와 명예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 때 가나와 가버나움은 아주 가까운 지역이었습니다. 가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물을 변해서 포도주로 만든 소문이 20마일 떨어진 가버나움까지 들렸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자기는 비록 왕궁에서 굉장한 위치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자기 아들의 죽음 앞에서 체면도 위치도 지위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살려만 준다면 이런 생각으로 예수님이 그 지역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살려 주옵소서’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의 문제 앞에서 솔직해 지는 것입니다. 성경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의 문제 앞에 솔직하고 진실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찾아 갔을 때 예수께서 무시며 비하하는 말을 했습니다. 이 여인은 제가 개라도 좋습니다. 지금 딸이 귀신들려 너무 고통가운데 있습니다. 여인에게는 딸을 살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그런 자리에서 나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사실 벌거벗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 솔직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바디메오에게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내 속에 있는 문제를 고백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디메오가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내 속에 참된 모습을 인정하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 진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허례허식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본문에 왕의 신하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 앞에 도움을 구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 원합니다. 문제는 우리 인생에게 다 있습니다. 문제 앞에서 반응 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4가지 범주 안에서 어디 속하는지 돌아 보기 원합니다. 첫번째 문제가 있으면 내 힘으로 한다. 두번째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구한다. 세번째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 위 세가지 중 하나도 아니라면 이 사람은 절망 중에서 자살을 하던지 폐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자가 믿는 자입니다.

50절입니다. 말씀을 믿고 갔더니 말씀을 믿고 갔습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 말씀 전에 48절을 보겠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주를 생각해 보세요. 지구가 우주 안에 얼마나 작은 물체인지 알고 계시지요. 우주 안에 엄청난 은하계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우주 한 가운데 떠 있는 작은 물체 위에 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아닙니까? 걸어다니는 자체가 기적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었더니 하나님의 기적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결국 성경 전체 내용의 주제는 궁극적으로 믿는 자들을 향한 회복과 축복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을 주시고 회복을 보장하시는 분이십니다.

일평생 인류 역사를 연구한 찰스 베어드는 역사를 통해서 보게 된 것 4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사람들의 잔인함과 파괴 속에서도 더 힘있게 건설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연좌맷돌은 천천히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정확하고 섬세하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꿀벌들이 꽃의 꿀을 따면서 수정시키는 하나님의 신비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네번째는 깜깜한 인간의 역사의 밤 중에 하늘의 별이 더욱 빛나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 빛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일곱개의 기적이 나와 있습니다. 첫번째 기적은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 기적입니다. 세번째 기적은 5장에 38년된 병자를 고치는 기적입니다. 네번째 기적은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마지막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이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능력과 사랑으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복음서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한계를 가진 우리의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헛된 것을 구하지 않았는가? 허무하게 인생을 살아 온 것이 아닌가 돌아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한계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용서하시고 품어 주시는 그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소망 속에 살기를 원합니다. 생명력을 갖고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크리스탈한인교회 담임 류성진 목사
본문 : 마6:9~13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먹습니까? 먹기 위해서 사십니까? 우리가 고상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먹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먹지 못해 굶주려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난 과거 우리 나라도 보개고개가 있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어려운 시대가 있었습니다. 먹지 못한 자들에게 인권이니 평화, 철학, 종교라는 것은 다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 있는 이야기 입니다. 오늘 주기도문에서는 사람이 가장 기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욕구를 구하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먹는 것을 구하는 것을 넘어서서 살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목적과 사람의 목적 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 뜻에 대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둘째 부분은 우리의 양식과 우리의 죄에 대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양식을 얻을 수 있고 죄에서 자유 할 수 있고, 용서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그것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구하며 살아갈 때 더 중요한 것을 알고 구하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원리는 늘 똑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기면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자들의필요를 늘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구하며 너무나 바쁜 우리 처지임에도 기도하며 예배하고 나아가는 그런 사람들에게 양식도 채워주시고, 용서해주시고, 시험에 넘어가지 않게 하시고, 악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의 간구가 끊어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는 말씀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라는 간구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간구를 첫 번째로 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나라와 이름, 뜻을 구하고 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간구하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먹는 문제, 생존의 문제 대해서 얼마나 중요하고 우리의 삶을 아시기 때문에 그것을 구하라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맨 첫 자리에 두고 그것을 구하고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먹고 마시는 문제만큼 시급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 오래 되어서 잊고 사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실 인간에게 있어서 먹고 사는 문제는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이 생존할 때 우리 영혼이 생존할 수 있습니다. 육신이 살아야 우리 영혼을 돌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은 우리 삶에 필요한 우리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 생존하게 하는 양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달라는 간구입니다. 살기 위해서 단순히 먹을 것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살아갈 때 최소한으로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앞에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 피조물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구하며 나아가라, 간구하며 나아가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은 귀한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우리가 알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내가 필요한 부분은 놓고 기도하는 시간은 행복하고 감사한 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시간이 허공에 메아리 치는 소리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에서 빵이라는 것은 먹기 위해서 필요한 빵을 말하는 것입니다. 잔치용 케익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빵입니다. 그것을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빵을 위하여서 간구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가 사치하기 위해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하는 이 첫 번째 기도의 이유를 살펴 보기 원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이 기도가 우리 삶에 왜 필요한 것입니까? 왜 우리가 기도하고 간구하며 나아가는 것입니까? 우리의 기도 시간은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날마다 구하라 하는 것입니다. 1년 먹을 떡 덩이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큰 뭉치를 얻게 되면 그 시간 동안 하나님 없이 살 수 있고 내 힘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구하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매일 매일 나아가지 않는 삶은 우리가 영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로 우리 삶을 잘 정리하여서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서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좋은 관계를 맺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아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담아 간구하는 그 시간이 하나님만 의지하고 생각하는 통로가 될 수 있기에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나와야 간구하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행복한 시간입니다. 없어서 힘들어서 괴롭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이 기도가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의 생명과 하루의 생활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는 기도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시편 136:25절입니다. ‘모든 육체에 먹을 것을 주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은 영원함이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선하신 하나님의 손에 의해 온다는 것을 믿고 간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구하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가졌더라도 우리는 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벼랑 끝에 서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기도를 해야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왜 이 기도를 해야 합니까? 세번째 이 기도는 우리 삶의 목적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늘 나라에 있다는 고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나그네입니다. 이 세상 나그네로 사는 동안 하나님 자녀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필요한 만큼만 주십시오 이것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나그네이기에 그 영원한 나라의 기대가 있기에 많은 것을 축척해 놓고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순례자로 우리를 살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바라 보게 하시기에 쌓아 놓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언제가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자는 나그네로 내가 하나님 품에 안길 때까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인 줄 믿습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부를 누릴 필요가 없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성실하게 일해서 경제적인 유익을 가질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 삶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소망이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우리가 저장하고 저축하고 그것 통해서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이 내 삶의 토대라고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 보다 더하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네 번째로 내일의 염려를 하지 않겠다는 신앙 고백의 표시로 우리는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성경에는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오히려 그 분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일들 그것들로 염려하지 않기 위해서 매일 매일 주님 앞에 기도하는 삶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불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저는 내일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내일이 오늘로 변할 때 하나님이 또한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표시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철저히 의존하며 살아가겠습니다. 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때와 우리의 목숨조차 하늘 아버지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늘 필요한 자양분을 공급해 주시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매일 매일 갈급한 마음으로 은혜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내 삶의 필요들을 채워 주시옵소서’ 이렇게 고백하는 자리가 은혜의 자리가 되고 풍성한 자리가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 내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시기 원합니다. 간구하는 자들에게하나님께서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는 은총이 임할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