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기독일보에서 매주 몇몇 지역교회 목회자들의 최근 설교문을 요약 정리해서 소개하는 <주일강단>을 시작합니다. 척박한 이민사회에서 눈물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목회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말씀이 갈급한 심령으로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은혜와 소망을 전해줄 것을 믿습니다

세계로 교회 담임 박정수 목사
본문 : 수 6:20-21 “믿음의 승리자”


오늘은 부흥 다섯 번째 설교입니다. Revival 이라는 단어의 다섯 번째 철자 v로 시작되어지는 victor를 보겠습니다. 이 뜻은 승리자입니다. 이 낱말을 사용해서 ‘믿음의 승리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보겠습니다. 부흥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부흥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 가장 많이 듣는 낱말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모든 신앙의 출발은 믿음으로 시작됩니다. 믿음을 통하여 기적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질 때 믿음 안에서 풍요를 누리고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고 믿음을 통해서 사랑하고 모든 것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본문 여호수아 6장 내용은 여리고 전쟁의 대한 내용입니다. 여리고 전투는 여호수아가 모세 다음으로 이스라엘 지도자가 된 후 가장 먼저 치른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전투를 통해서 저희 들에게 온전한 믿음으로만 우리가 승리가 자가 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깨달아 하나님의 자녀로써 믿음의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40년 만에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가게 됩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40년에서 만 4일이 모자라는 날이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을 예배하는 날이었습니다. 이들은 길갈에서 진을 치고 할례산에서 할례를 받게 됩니다. 성결의식을 갖습니다.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키게 됩니다. 가나안에서 처음 가진 유월절입니다. 유월절 이후 가장 먼저 치른 것이 여리고 전투입니다. 여리고성은 크기가 8에이커 정도로 그렇게 큰 건물은 아닙니다. 700명 정도 살 수 있는 건물입니다. 여호수아 당시 가나안 땅에 도시가 많았습니다. 작은 성이었지만 그 성의 규모에 비해 비중이 큰 성이었습니다. ‘종려 나무의 성읍이다’ 라고 지칭합니다. 여리고성은 군사의 요충지,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여리성은 직접적인 군사작전을 하는 것에 있어서 공격할 수 없는 ‘천연요새’였습니다.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여리고 성벽을 볼 때 어떤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호수아 6장 1절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서 출입을 금했습니다. 강한 성벽을 여리고 성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성을 만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자리에서 절망 했을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가지 약속을 합니다. 첫째 ‘여리고 성은 이미 너희 손에 붙어 놓았다’고 하십니다. 둘째 ‘이 여리고 성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2절 보겠습니다. ‘이미 주었다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벽은 반드시 무너진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여리고 성을 이미 너희에게 넘겨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네 손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말씀을 믿었습니다. 이들은 두려움과 걱정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그 여리고 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을 믿었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갈 때 여리고 성과 같은 난공불락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불가항력의 일들이 우리 삶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리고 성과 같은 문제를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믿고 가기 원합니다. 믿음은 반드시 따라 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기도를 합니다. 믿는 사람은 반드시 기도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늘의 은혜를 믿는 자들에게 충만하게 부어 주십니다. 예배를 귀하게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한다면 행함과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빛이 라고 믿을 때 우리는 빛의 역할을 감당하고 살게 됩니다. 믿음에는 순종이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믿었습니다. 그 믿음을 보기 위해서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면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 성을 장악하고 들어갈 수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병법은 상식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성벽을 돌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도는 것도 규칙과 각자 서야 하는 위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말씀 하십니다. ‘모든 군사들을 데리고 성벽을 돌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돌았던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싸울 수 있는 군사들을 데리고 성벽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서는 위치가 정해져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짊어집니다. 두 번째로 7명의 제사장이 양각 나팔을 불고 언약궤 앞에 서게 합니다. 나팔 앞에는 무장한 군사들이 섭니다. 후군 들이 법궤 뒤로 서게 됩니다. 군사들이 앞과 뒤를 서게 합니다. 그들은 하루에 한번씩 칠일 동안 돕니다. 여섯 번을 동일하게 돌고 일곱째 날은 하루에 7바퀴를 돕니다. 돌 때 나팔을 불면서 돕니다. 마지막 일곱째 날 나팔을 길게 붑니다. 그 소리가 모두에게 들려지면 동시에 모두가 소리를 외치는 것입니다.

하루 한 바퀴씩 나팔을 불면서 돕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어도 순종이 없으면 그 믿음은 무용지물 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적 판단으로 믿어지지 않으면 믿지 않습니다. 눈으로 보고 이성으로 생각되어서 이해가 되어야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때때로 우리 생각으로 이성으로 믿어지지 않는 것을 하라 하십니다. 그것을 믿고 따르는 것이 순종이요 믿음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이해 되지 않아도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때로는 우리의 이성, 우리의 상식,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10절 말씀입니다. 7일 동안 도는 가운데 주신 명령입니다. 여호수아가 준 명령 하나는 침묵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왜 여호수아가 이러한 명령을 했을까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 가운데 왜 죽게 되었는지 알았습니다. 40년 동안의 이스라엘 광야 역사는 불평과 원망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조금만 지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침묵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은 왜 그랬을까요? 나팔 소리만 잘 드리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러분 불평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민수기 10장을 보면 나팔은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데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모으는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길갈의 백성들이 모든 것을 책임 지고 도는 군사들이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나팔은 하나님이 전쟁을 공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특별한 때를 알릴 때 ‘나팔이 사용되었습니다. 나팔이 울릴 때 군사들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길게 울려 퍼질 때 하나님이 완전히 성을 무너뜨린 그 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9장입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이 내려 올 때 나팔이 울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나팔 소리만을 들으면서 여리고 성을 바라볼 때 ‘저 성은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성, 그 성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무너뜨릴 수 있는 성’임을 깨닫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이들은 마지막까지 힘을 내고 마지막에 모든 힘을 쏟습니다. 백성들, 군사들, 제사장들 모두가 길게 나팔을 불고 이 소리들은 모든 백성은 큰 소리를 외칩니다. 이 성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함성을 지를 때 하나님께서 땅을 흔드시고 무너지게 하십니다. 히11장은 믿음으로 이 성이 무너졌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 성을 무너지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갈 때 하나님께서 인생의 모든 여리고 성을 무너지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더 크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담임 허연행 목사
본문 : 말 3:7-12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말라기 선지자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흉년의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농사를 짓지만 메뚜기나 병충해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포도 농사를 짓는데 중간에 다 떨어져서 수확기에는 소득이 없었습니다. 하는 일 마다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계속 이어져 백성들 안에는 절망감과 허탈감이 쌓이게 되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계속 일어나는지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떤 일에 원인이라도 알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고통은 계속 되고 답답함은 커졌습니다. 그 당시 그들은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꿈과 희망을 가지고 성전을 재건하려고 했습니다. 성전을 에워싸고 있는 성벽도 쌓았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일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 왕국만 임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꿈에 부풀어서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다리던 메시야 왕국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려움과 시련이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준비를 다 했는데 왜 기다렸던 하나님의 약속은 이뤄지지 않고 어려움만 생기는지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돌아오라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원인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은 너희가 떠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치료방법은 ‘내게로 다시 돌아오라 그러면 나도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하십니다. 백성들은 말씀 자체는 쉽고 간단한데 그 의미가 와 닿지 않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돌아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토록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와서 살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이미 돌아 온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백성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70년을 살았습니다. 그 당시 바벨론은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습니다. 문화적, 경제적으로 제일 앞서 가는 나라였습니다. 바벨론에서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이 200만명이 됩니다. 고레스 왕이 해방을 선포하고 다시 돌아 온 사람이 5만명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처음은 시온을 너무나 그리워했던 사람들입니다. 70년이 지난 후 5만명은 고향으로가서 다시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인도로 1차 귀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의도는 무엇입니까?’ 몸이 돌아왔다고 해서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이 어떠했는가? 본문 가운데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인 예배였습니다. 예배를 드리려면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저들이 가지고 온 제물을 보니 괜찮은 제물은 다른 곳에 쓰고 눈이 멀고, 다리를 저는 짐승을 가지고 왔습니다. 최고의 좋은 것은 자신의 이익에 맞게 쓰고 가장 낮은 것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중심을 보고 계셨습니다. 마지못해 혹은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자기의 신앙을 지키기기 위해서 근근히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세를 하나님은 지적하는 것입니다. 몸은 나에게 돌아와 있지만 마음은 아직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우리가 돌아가는 길이 무엇입니까?’ ‘돌아 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성경 곳곳에서 ‘나에게로 돌아 오라’ 말씀 하십니다. 도대체 돌아 온다는 개념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거리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과 언약의 줄을 통해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쌍방이 언약에 대해서 성실할 때 언약을 지킬 때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둘 중에 어느 한쪽이라도 이 언약을 어길 때는 그 언약은 휴지 조각이 되는 것입니다. 어긴 사람에게는 벌칙이 따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 관계를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그 언약에 대해서 성실하셨습니다. 문제는 인간에게 있습니다. 사람은 돌아서면 그 언약을 쉽게 잊어버리고 지키지 않았습니다. 원칙대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순간으로부터 바로 공의의 벌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지키지 않는 인생들에 대해서 오랜 시간 참아 주셨습니다. 다시 언약의 관계 안으로 올 것을 촉구하시고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초대를 받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초대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언약에 불충실하면서 그 언약을 깨고 있다는 것 조차 잊고 살아 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깨우쳐 주시기 전까지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돌아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의 음성을 놓치지 말고 들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내게로 돌아 오는 자들에게 나도 돌아 가리라.’하셨습니다. 만나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전능하신 주님이 그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여 주시기만 하면 오늘의 여러분의 문제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주님과 멀어져 있는 인생은 탕자의 모습과 같습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 가기만 하면 아버지는 그를 자녀로 맞아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실 때 변함 없는 사랑으로 대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탕자는 집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큰 아들은 물리적으로 아버지 곁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늘 아버지 집에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재산을 요구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와 잔치를 베풀었을 때 큰 아들은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큰 아들의 항변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내 안에 첫째 아들과 같은 자신의 의로움이 커서 아버지의 마음이 깨달아 지지 않는 모습은 없는지 돌아 보기 원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 하십니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하십니다.

주성령교회 담임 김영복 목사
본문: 고후5:18-20 “화목합시다”


여러분 ‘사람은 관계의 동물이다’라고 합니다. 화목하면 행복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유하다고 해도 부부관계, 형제자매관계, 고부관계가 화목하지 않으면 불행합니다. 인간 관계도 다양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 서로의 기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불화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기질로 인해 고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을 통해서 고백합니다. 우리 안의 고유한 기질이 자신을 주장하려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로마서 6장 12절, 13절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합니다. 사욕을 쫓아서 내 욕심을 대로, 기질을 따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질은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기질을 하나님께 드려서 성령 충만함으로 은혜에 자리에 거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라고 말했습니다. 내 고집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연약하고 부족한 것, 아픈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면 연약함 속에서 강함을 물리치는 능력이 나온 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여러분의 생애를 사용하시기 원합니다. 너희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연주하는 지체가 되기 원하는데 어떻게 나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는 있을까요? 본문은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화목 할 수 있을까요? 18절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화목하게 됩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강조하는 로마서의 바울의 신앙이 있다면, 행동하는 야고보의 신앙을 갖춰야 진정한 믿음의 신앙인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새 사람이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해야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이웃과도 화목합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화목한 자리에 서는 믿음의 사람인가’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화목한 직분을 가졌다면 내가 가는 곳곳 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자리를 화목하게 만들고 있는가? 여러분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집사, 권사, 장로, 목사, 찬양팀, 교사 모든 것이 교회를 섬기라고 주신 직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직분 안에 화목하게 하는 모습으로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잎만 무성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닙니까?’ 여러분 내 안의 화목케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주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참으로 화목케 하는 자의 모습입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마5장 9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23절에 ‘형제와 화목하고 예물을 드리라’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 화목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화목하지 않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지 못합니다. 화목하지 않은 자의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 화해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기회가 있을 때 기다리지 말고 화목하는 직책을 받았다면 내가 먼저 가는 것이 화목한 자의 모습입니다. 화해의 악수를 청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화목의 꽃을 피우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섬기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종들이라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평화의 도구,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로 부름 받은 소명입니다. 그 소명을 잘 감당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