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기독일보에서 매주 몇몇 지역교회 목회자들의 최근 설교문을 요약 정리해서 소개하는 <주일강단>을 시작합니다. 척박한 이민사회에서 눈물로 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목회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말씀이 갈급한 심령으로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은혜와 소망을 전해줄 것을 믿습니다

크리스탈 한인 교회 담임 류성진 목사
본문: 이사야 44:24-28, 히 11:36-40 “희망을 살아가는 교회”


창립 2주년을 맞아서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기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희망은 ‘삶의 힘을 주고 날개를 달아 준다’ 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희망은 ‘사람을 속이는 헛된 꿈이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강한 용기, 새로운 의지라고 말했습니다. 희망이라는 것은 실현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의 기대가 마음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힘 없고 비천한 사람들이 희망이라는 것을 가지고 유지하며 희망의 힘으로 살아온 사람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주전 6세기경에 나라가 망했습니다. 2차대전 후에 1940년대 되어서 나라를 다시 찾았습니다. 2000년이 넘도록 나라 없이 지낸 나라였습니다. 정치적 독립을 빼앗기고 처음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페르시아, 헬레니즘제국, 로마 계속적으로 식민지로 생활했습니다. 내가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 오시기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형편이었습니다. 99%의 사람들이 희망을 찾을 수 없는 환경 가운데 그들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대를 가득 안고 살았던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도덕적 타락하여서 바벨론에 고통 당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또 다른 예언자는 남은 자를 회복하시고 다시 제자리 찾게 하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유대인은 약속을 마음속에 품고 수백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가진 희망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 가운데 분명히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통치하고 다스리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진리가 우뚝 솟아 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날이 온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 약속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고 그런 나라는 오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유대인들 믿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될 것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투쟁으로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 희망 만이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이사야 43장 23절 복구 될 수 없는 상황인데 다시 중건 된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희망의 힘은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24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테네 사람들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아테네 사람은 철저하게 현실적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원함 속에서 자신의 희망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미래를 계산해서 희망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에 그것이 나의 믿음이고 소망이다 라고 말하는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이 열악해지고 희망이 점점 사라지는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희망을 놓치지 않고 나아갔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과론적인 법칙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 원인을 두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현실의 원인이 하나님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나의 삶의 원인이 하나님이 나의 결과도 책임 질것이라 믿었던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나의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갖고 있는 희망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분명히 안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안다면 우리는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11장 38절 이런 환난 가운데서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11장 39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는데 약속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고 약속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인생이 끝나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 통해서 다시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바다의 모래와 같이 자손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의 때에 풍성한 자식을 주실 것이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힘들게 살았던 모세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꿈꾼 약속의 땅을 잊지 않고 나아갔습니다. 후손을 통해서 이뤄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앙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이뤄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대한 믿음입니다. 삶은 희망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희망하고 나아가라” 말씀하십니다. 내 삶 가운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선포하고 살아가는 것이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틀란타 엘림장로교회 담임 권오병 목사
본문 : 행전 5: 1 – 11 “합당한 헌신”


오늘 말씀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특별헌금을 드린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에 성도들이 모이기 힘쓰고 떡을 떼고 자기 물건 팔아 통용하며 서로 나눠주는 관계가 되자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사람들이 좋은 영향력을 주고 칭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도 부러웠던것입니다. 이 부부도 땅을 팔아 특별헌금을 해서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헌금을 드리려 했는데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어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에 어떤 마음으로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가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96편 8절, 역대상 말씀에도 다윗은 그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해서 드릴 때에 백성들은 하나님께 성전을 짓고 봉헌한다고 하자 백성들은 이미 필요한 것이 다 준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가져왔습니다. 예물을 드릴 때에는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어떻게 드리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 고민을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주님앞에 드려야 합당한 헌신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오늘 아니니아, 삽비라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드려야 하는 합당한 헌신에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번째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 속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출24장 1~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자에게서 받으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십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 어떤 의무감이 아니라. 자기 나타내려 하는 자기 과시가 아닌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성 속에서 자원하여 드리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자기의 영광을 드리려 했을 때 자기를 높이려고 하고 과시하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것보다 못한 상황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바른 가르침 속에 사용될 때 귀하게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 위해 사용되게 됩니다.

아니니아와 삽비라처럼 거짓으로 자기 영광을 드리려고 하니까. 얼마를 감추어지게 되면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게 되는 상황이 생깁니다. 또한 이 예물은 이웃과 좋은 관계 속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과부의 두렙돈을 받으십니다. 그 마음을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드린 특별한 예물을 드린 것 같습니다. 특별한 예물은 바른 목적을 가지고 지혜롭게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예물은 하나님 말씀을 따라 교회를 세우고 필요에 따라 정한 바에 따라 드릴 때 세우고, 나누고, 살리고 다음 세대를 교육하는 것에 쓰이는 것이 예물입니다. 예물은 옛적에 성막을 세우기 위해서 레위인과 제사장 위해서 예물을 드립니다. 또한 과부와 가난한 아이들 위해서 드려졌습니다. 예물은 하나님 앞에 바른 목적으로 드려지고 하나님 말씀에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집행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기 의를 나타내는 도구가 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스스로 멸망하고 다른 이에게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아나니니와 삽비라는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 속에서 이웃에 대한 배려가 없는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병폐가 되고 교회 성장을 막을까봐 하나님께서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그 동기가 바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성령을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는 것이 좋은 예물이 있다는 것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출36장 성막을 세우기 위해 예물을 가져오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관리하는 사람은 지혜와 재능이 있는 바른 분별력과 통찰력을 가진 자가 맡게 됩니다. 본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바르게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제사장이 직무를 감당하게 돕고 영혼을 구하고 선교하는데 사용할 때 주님께서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서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정하면 교회에 건강한 예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칭찬을 돈으로 더럽혀 지지 않도록 공동체의 순결을 지키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합당한 헌신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헌신할 때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고후9장 7절 하나님 앞에 즐거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헌신하시길 축원합니다.

큰사랑교회 담임 김성환 목사
본문 : 요14 16 – 17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


세상 눈에 비춰 볼 때 믿음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원리와 원칙을 뛰어넘습니다. 철통 같은 논리로 무장한 사람이 한계상황에 직면할 때 논리와 지식이 무장해제되고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시작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우리 인간과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서 진정한 신앙이 시작합니다. 인간이 교만해짐으로 자기 잣대로 하나님을 평가합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상은 우리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리는 성령께서 도우실 때 알게 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우리는 믿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 앞에 나온 것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참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에 대한 경건한 지식이 우리 가운데 점점 자라갑니다. 참 신자들은 주님을 깊이 아는 것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접촉점을 주셨습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으로 공급 받고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믿음에 들어오지만 그 믿음이 잘 성장 할 수 있도록 곧게 성장할 수 있도록 올바른 방향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믿음의 방향이 진리입니다. 우리 안에 확고한 믿음이 있어도 방향이 잘못되고 대상이 불분명하면 안됩니다. 성령님은 믿어야 할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완전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완전한 하다는 것은 시간이 변하고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입니다. 성경은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합니다. 다 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에서 다시 사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7절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라고 합니다. 진리가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에서도 진리는 없었습니다. 진리는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진리에는 지식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사람들이 염원하는 영원한 생명이 진리 안에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진리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진리는 자유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죄 짐을 지고 죄의 사슬에 묶여 신음하는 죄의 굴레로부터 해방 시키는 능력이 진리안에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은 모든 절망으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진리는 사상이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 인생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장 5절 성경은 이 세상을 볼 때 어둠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죄로 덮인 영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겉은 화려하나 그 이면은 죄악으로 가득합니다. 그곳에 진리가 임한 것입니다. 진리가 임할 때 어둠 가운데 죄악들이 드러납니다. 그것이 환하게 느껴집니다. 진리의 빛이 임한 것입니다. 모든 죄악이 다 드러납니다. 진리의 빛은 생명의 빛입니다. 진리가 임할 때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율법이 임했을 때 우리 죄를 드러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용서가 없습니다. 율법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리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영워한 생명을 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율법 보다 월등합니다. 복음은 우리 죄를 드러내고 고쳐 주시고 사해 주시고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을 가리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진리는 사람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을 주신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죄인 된 인간이 다른 죄인을 하나님께 인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진리 우리가 말하는 진리는 그 안에는 생명이 있고 우리를 자유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이치 진리는 영원한 생명이 없고 용서의 능력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십자가가 그 곳에 없습니다. 세상 종교의 성인의 가르침 속에서 죄 사함의 은혜와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 말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구도자가 아닌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이 진리의 성령께서 주님의 일에 따르는 일에 관여하십니다. 성령께서 예수를 증언하십니다. 진리의 성령은 곧 주님께로 우리를 이끄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예배 가운데, 말씀 볼 때, 기도 할 때, 예수이름으로 교제 할 때, 봉사할 때 임하십니다. 성령님을 날마다의 삶 가운데 성령님을 의지 하시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