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자유로운 사회 속에서 “노예”라는 말은 역겨운 말이고 기분 나쁜 용어입니다. 노예라는 말은 십자가라는 말처럼 두려운 말이요, 강렬한 의미를 가진 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성경 속에서 기독교인을 지칭하는 많은 용어들 가운데 가장 보편적이고 흔한 용어는 “하나님의 노예” 혹은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이 단어가 종(servant)으로 번역되어 그 의미가 희미하여졌으나, 실제로는 노예(slave)입니다. 성경 전체에는 수백 번에 걸쳐 구약성경의 노예라는 “에베드,” 신약성경의 노예라는 “둘로스”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 죄의 노예요, 사탄의 노예되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노예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 곧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유된 노예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소유하시기에 우리는 주님에게 속하였습니다.


현대는 종종 기독교 신앙을 자기의 성공, 건강, 행복, 부, 번영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합니다. 이는 노예가 주인의 뜻보다 자기의 것을 챙기는 것입니다. 소위 종이 주인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가 아니라 자기의 것을 챙기는 삯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요, “하나님의 권속”(God’s household)이라고 선언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핍박에 맞서서 자신을 그리스도인(Christianoi)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당시의 “가이사에게 속한 사람”(Kaisarianoi)이라는 말과 대조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낙인이 찍힌 사람임을 담대히 내세웠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채찍과 매질, 돌팔매질과 고난의 흔적이 바울의 온 몸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노예가 얼굴이나 몸에 주인의 문신이 새겨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문신이 자신의 몸에도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교회의 혼란은 정체성의 혼란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핵심이 있습니다. 노예가 주인 앞에서 권리주장을 하게 되면, 그것은 이미 노예의 신분을 떠나 주인에게 거역하는 중에 있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인의 삶은 나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를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종은 나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인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는 매일 죽는다”고 했던 바울의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