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 두 가지는 다 11절과 연결된 말이다. 그러므로 알곡으로 모아져 곡간에 들여지는 것은 성령세례와 관계가 있고, 쭉정이가 태워지는 것은 불세례와 관계가 있다. 여기서 주님은 손에 키를 들고 계시는 분이다. 곡식을 추수할 때 먼저 타작하고 그 다음에는 키질을 한다. 키질을 하는 이유는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누가 그런 일을 하는가? 주님이 그런 일을 하신다. 이는 추수의 광경인데 성경에서 추수를 언급할 때는 성도들의 휴거를 가리키기도 하고 부활을 가리키기도 한다.

주님은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이것은 심판이다)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시고(주님은 알곡을 귀하게 여기신다)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 오늘 이 시대에 참으로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분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그분을 왕으로 모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그들은 알곡이다. 알곡은 다 곡간에 들어가게 된다. 얼마나 큰 기쁨인가? 곡간에 들어간다는 것은 주님의 곡간, 보관하는 장소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겠다고 했는데 이것은 지옥불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정말 회개치 않으면, 겉으로는 가장 잘 믿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쭉정이가 되어 꺼지지 않는 불, 지옥 불에 들어가는 불세례를 받게 된다.

13-14절,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이 때에 예수께서’란 말은 매우 귀하다. 이때에 30세가 된 예수님이 처음으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셨다. 그 분이 처음으로 나타나셔서 한 일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일이다. 물론 당시의 세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세례란 다른 종교에서 유대교로 개종할 때 사용했던 예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 이스라엘은 요한에게 나아와 다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들은 이제 죄사함을 얻는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인데, 세례를 받으러 나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발걸음은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이다. 갈릴리는 멸시받는 땅이며, 요단강은 죄인을 물 속에 장사하는 심판의 장소이다. 주님은 이 땅에서 영광을 얻으려 하시지 않고, 오직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는 길을 걸어 가셨다. 그분은 그렇게 사셨고, 그렇게 가르치셨다. 우리로 말한다면 시골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나타난 것이다. 나사렛, 갈릴리, 멸시받는 곳에서 출발하시어 죽음과 심판의 강으로 여행하신 것이다. 이것이 그 분이 첫 번째로 사역을 준비하시기 위해 내디디신 발걸음이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길을 이렇게 초라하게 걸어 가려 하지 않는다. 더욱 영광을 얻고 사람들에게 유명하게 되는 태세를 갖추어서 사역하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발걸음은 초라한 발걸음이요 알아주지 않는 준비인 것이다. ‘갈릴리, 요단강 학교 출신’인 것이다. 우리가 성실하게 주님을 따르려면 우리의 길이 이러한 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은 갈릴리 나사렛, 알아주지 않는 곳, 모든 사람이 죄를 자복하고 물 속에 자신을 장사지내는 요단강에 오셔서 지금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다. 선생이 제자에게 배우려고 하는 것은 무한한 겸손인 것이다. 창조주께서 죄인 중 한 사람처럼 세례를 받으시고자 하심은 형용할 수 없는 겸손이심에 틀림없는 것이다.

마이어(F.B. Meyer) 박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나는 은혜의 선물이 여러 층의 선반 위에 있는 줄로 생각하여 키가 높을수록 그 여러 층의 선반들 위의 선물들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후에 깨닫기를 아래로 내려가면서 여러 층에 있는 선반에 놓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선물들을 받아 가지려 하면 내가 높아지기를 구할 것이 아니라 더욱 나를 낮추고 굽혀야 내려가서 선물들을 하나 하나 얻을 수 있다.”

14절에서 요한이 주님의 세례 받으시려 하심을 만류하여 말한 것은 첫째는 하나의 겸손일 수도 있고, 둘째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충분한 인식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요한의 주님께 대한 태도는 겸손한 것이고 또 좋은 것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분이 요한에게 세례 받으려 하심은 겸손이실 뿐 아니라 사람들과의 교분(交分)을 위한 것이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세례받을 필요가 없으시지만 그분은 고고하게, 거룩하고 의로우시며 죄 없으신 위치에 남아 있지 않으시고 다른 죄인들과 같이 되시어(죄는 없으시지만), 세례를 받으심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신 것이다. 우리 목회자들도 예수님을 닮아 많은 성도들의 수준에 내려가 그들과 자신을 일치시켜 그들의 마음과 함께 하며 사역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1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첫째로 그분의 무한하신 겸비요, 둘째는 모든 사람과의 교분을 갖기 위함이요, 셋째는 15절의 말씀처럼, 의를 이루시기 위함이다. 그분은 모든 사람의 대표자로서 오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 아래 속하시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책임을 갖고 계셨다. 그분이 행한 의는 다 우리에게 돌아오게 된다. 그러므로 그분은 의를 온전히 지키신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당시에 다 침례를 받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셨다. 주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한 사람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그 당시에 역사하시는 하나의 규정에 순종하셨다. 그분은 그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우리(we)가 이와 같이’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의 대표이심을 가리키고, 우리 모두를 그분 안에 포함시키신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16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주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 오신 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받으신 것이고, 그것은 하나의 의이다. 이것이 첫번째이다. 또 하나는 그분 자신은 온전히 자기 자신을 죽음에 넣고 부활 안에서 사역하려 하신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실제로 삼 년 반 동안 그렇게 자기 자신을 살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하지 않고 자기의 말을 하시지 않고 오로지 죽은 자의 위치에서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시고 아버지의 말씀을 하시면서 사셨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분이 어떻게 사역하실 것인가를 표명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렸다고 했다. 오늘 우리도 주 예수님의 세례(침례)에서 한 번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어떻게 하면 하늘이 열릴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하면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올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하면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우리가 다 사모하는 바이다. ‘비둘기같이’에서 비둘기란 성경에서 온유하고 순수함을 의미한다. 주님의 사역의 일생은 비둘기로 상징된 바처럼 온유하시고 한 가지 일(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시는 것)만을 주목하셨다. 그분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심으로 사역하시며(11:29), 그분의 사역은 비둘기같이 순결하심으로 성취될 것이다(10:16). 이것은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신 것에서 이미 그 특징이 정해진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형체로”가 추가되어 있다(눅 3:22).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 하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더 많이 추구하고 열심을 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 기도를 많이 해야 하므로 기도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님이 하신 것을 보면 아버지의 뜻에 자기를 복종시키신 것이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주님은 반드시 이러한 길을 가셔야 했다. 그것이 주님에게 쉬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요한은 주님을 소개하는 사람이다. 참으로 주님은 요한보다 크신 분이다. 그런데 주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자신을 낮추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을 기꺼이 물 속에 장사 지내시고 다시 올라 오셨다. 그분이야말로 물 속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분이시다. 정작 죽어야 할 사람은 바리새인들이었고 죄인들이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물 속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거룩하신 분이신데 물 속에 들어가셨다. 자원해서 들어가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뜻이 아무리 어렵고 또 힘들다 해도 순종하는 위치에 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신다. 성령이 임하신 것은 그분의 일생, 사역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이며 이사야 61장 1절, 42장 1절, 시 45편 7절의 성취였다. 그분은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준비로서 요한에게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세례를 받으셨고, 아버지로부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이다. 죄인을 위한 구속의 역사에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모두 관련되심을 볼 수 있다.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다. 아들은 물에서 올라오시고, 성령은 비둘기처럼 아들 위에 내려오시며, 아버지는 아들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17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하심, 곧 성부의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심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예수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다. 이러한 성부의 증거는 사람들의 반대와 멸시와 배척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에(17절), 중간에(17:5), 마지막에(요 12:28) 선포되어졌다. 이는 이사야 42장 1절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를 반영하고 있다. 그분의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하늘의 소리가 ‘고난 받으시는 종의 노래’와 연결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내 아들’로 부르심으로서 신격의 제 2격인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식 인준이 된 것이다. 여기서 ‘사랑하는’이란 말은 헬라어로 ‘아가페토스’로서 질적인 측면을 강조한 ‘유일한 사랑’을 의미한다. 또 이 단어 속에는 사랑이라는 심정적 측면만이 아니라 선택의 측면도 있다. 이 구절에 근거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아들을 유일하게 사랑하셨다는 것을 안다.

‘기뻐하는’이란 말은 헬라어로 ‘유도케사’인데, 시제가 초시간적인 부정 과거이다. 그러므로 그 분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이다. 예수는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다. 이를 문자의 뜻을 고려하여 번역하면 ‘이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유일하게 나의 선택함으로 사랑하고 기뻐하였던 자’인 것이다. 성부께서는 그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이는 나의 유일한 영원 전부터 사랑하는 아들이니라’고 확인 인준을 해 주신 것이다. 아름답고 귀하다. 오! 우리는 3장 마지막에서 왕이신 예수님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완전히 왕으로서 즉위하신 것을 본다.


유동근 목사는...

유 목사는 대전고와 충남대학교·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美 퍼시픽 신학대학원(Th.M., D.D), 워싱턴 신학대학원(Th.D) 등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는 온누리선교교회 담임목사, 美 퍼시픽 신학교 교수, 국제선교 신학, 신학연구원(IMC) 학장, 예장 국제선교연합총회 총회장, 글로벌부흥협의회 총재 등을 맡고 있다. 현재까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요한복음,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등 신약 전권을 강해해 책으로 펴냈고 창세기, 모세5경, 여호수아·룻기, 사무엘상하, 전도서·아가서, 이사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등도 출판했다.